제176화
우물 안의 개구리.
자신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우물 속에서 보이는 하늘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개구리와 다를 바 없었다.
아집이라는 틀을 깨고 열린 눈으로 바라보자 건우가 얼마나 힘든 결정을 했는지, 그리고 그 결정이 얼마나 대단한 이슈를 낳고 있는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피해 학원 모임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모임을 만들고 건우와 초이스 에듀를 성토하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도 깨달았다.
한 원장은 그동안 선입견을 가지고 냉소적으로 바라봤던 건우가 완전히 달라 보였다.
아니, 솔직히 존경받는 직업과는 거리가 먼 학원 강사가 그런 엄청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부러움과 놀라움을 넘어서서 위대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떻게 보면 같은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일종의 경외감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라이브 스트리밍 강사진에 합류하고 싶은 간절한 욕망이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다.
‘내가 만약 저들과 함께 초이스 에듀가 자랑하는 스타강사 자리에 오를 수 있다면.’
교사 출신인 한 원장은 돈보다는 학생들이 그들에게 주는 신뢰와 존경이 더 부러웠다.
자신을 찾아온 정확한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건우와의 만남이 한 원장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마음이 절박해졌다.
이번 기회는 절대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건우를 만나기 바로 전까지 계속해서 ‘침착하자’고 되뇌며 성질 급한 마음을 누르려 애썼다.
“어제와는 너무나도 다른 반응이라 놀랍기까지 하군요. 혹시 어젯밤에 무슨 엄청난 심경의 변화라도 있으신 겁니까?”
“대단한 심경 변화는 아닙니다만 한 가지 작은 깨달음은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우물 안의 개구리더군요. 그걸 깨닫고 나니 겨우 진짜 하늘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게 모두 대표님이 전해주신 선물 덕분 아니겠습니까?”
“제가 드린 선물이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제가 왜 한 원장님을 찾아갔는지도 추측해보셨습니까?”
“혼자 설레발치며 김칫국부터 먼저 마시는 꼴이 될 수 있겠지만, 혹시 저를 초이스 에듀 강사로 영입하려는 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강사로요? 자기감정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해서 어린 학생이랑 주먹다짐까지 한 분을 우리 학원 강사로 영입하려고 거길 찾아갔다고요? 정말 대단한 설레발인데요.”
간절히 기대했건만 건우의 반응은 예상과 달리 냉소적이었다.
“휴우, 혹시나 했는데 역시 아니었나 보군요. 하긴 제가 대표님이라도 사고뭉치인 저를 강사로 받아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건우의 도발에도 한 원장은 약간의 아쉬움만 표했을 뿐 큰 감정 기복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루 만에 바뀌었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큰 변화라서 직접 도발을 한 건우도 놀랐다.
그러나 아직 테스트가 끝나지 않았다.
“다행히 사고뭉치라는 사실은 인지하고 계셨군요. 사실 병이라는 게 원인을 알아야 치료를 할 수 있습니다. 한 원장님 같은 경우는 일종의 정신병인 분노조절장애입니다. 의학적 용어로는 post-traumatic embitterment disorder. 그러니까 외상 후 격분장애라고 부릅니다. 정신적 고통이나 충격 이후에 부당함, 모멸감, 좌절감, 무력감 등이 지속적으로 빈번히 나타나는 부적응 반응의 한 형태죠.”
“정신병이요?”
“정신병이라고 하니 기분 나쁘십니까?”
“네. 미친놈이라고 하는데 기분 좋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정신병의 일종이면 치료도 가능한 겁니까?”
기분 좋을 리 없다면서도 한 원장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물론입니다. 사실 정신병이라고 하면 미쳤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어디까지나 선입견입니다. 그냥 우리가 감기에 걸리듯 그냥 뇌가 약간 아픈 것뿐이죠. 원인만 제대로 안다면 감기보다 치료가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정신과 의사가 있는데, 소개해드릴까요?”
“번거로운 게 아니라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전 지금까지 그냥 제가 성격이 좀 괴팍하고 과격하다고 생각했지 분노조절장애와 같은 정신장애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만약 고칠 방법이 있다면 고치고 싶었는데, 방법이 있다고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됐다 싶은 생각이 들자 건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원장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한 원장님.”
“네? 갑자기 왜 그런…?”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한 원장님에게 어떤 동의도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테스트를 했습니다.”
“테스트를요? 저한테 무슨 테스트를 할 게 있다고요?”
“사실 내부적으로 한 원장님을 지리 과목 강사로 스카우트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찬성과 반대 의견이 비슷비슷했습니다. 실력이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반대하는 분들도 한 원장님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욱하는 성격이 너무 큰 불안요소라고 했습니다. 음. 그러니까….”
“굳이 좋게 말씀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랄 맞은 성격이라서 초이스 에듀에 와서도 학생들과 주먹질을 하지 않을까 불안하셨던 거겠죠.”
“맞습니다. 폭력 사건이 일어나서 이미지가 나빠지면 우리 학원으로서도 큰 타격이니까요. 그래서 무례를 무릅쓰고 제가 한 원장님을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제가 화를 냈으면요?”
“그럼 스카우트는 없었던 일이 되었을 겁니다. 제멋대로 테스트를 해서 다시 한 번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합격한 겁니까?”
건우가 거듭 사과했지만 한 원장은 자신이 테스트를 받았다는 것에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사실, 전혀 개의치 않았다.
“네. 합격입니다. 만약 한 원장님께서 우리 초이스 에듀와 함께 일할 생각이 있으시다면요.”
“물론입니다. 원합니다. 정말 원합니다.”
“아, 다행이네요. 그런데 저희와 일하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긴 합니다.”
“그게 뭡니까?”
“아까 말씀드린 정신과 상담을 받으셔야 합니다.”
“당연히 해야죠. 그럼요. 제가 대표님이나 초이스 에듀에 누를 끼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거기에 따른 언론 보도도 우리 마케팅 팀에서 담당할 겁니다. 제 생각은 라이브 스트리밍 강의도 맡기고 싶지만, 아직은 조금 두고 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자체 테스트를 통과하면 그때부터 라이브 스트리밍 강의를 하시면 됩니다. 아! 물론 라이브 스트리밍을 통해 얻어지는 수익은 없기 때문에 원하신다면 강의를 안 하셔도 됩니다.”
건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원장은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죠. 열심히 노력해서 반드시 테스트를 통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 대표님.”
“네? 아! 이건 제가 감사할 일이죠. 하하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
크레이듀 대표실.
“쯧쯧. 한 원장은 결국 초이스 에듀로 넘어가버린 거로군. 최건우 그 자식 정말 영악해. 사고 칠 가능성이 있는 놈을 오히려 품어버린다? 사고 가능성은 없애버리면서 최고 실력의 강사를 영입하고, 완전히 일석이조가 따로 없어. 상대하기 제일 까다로운 놈이 이런 놈인데.”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신경을 썼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아니야. 완전히 밀착마크를 하지 않는 이상 틈은 생길 수밖에 없었어. 우리 상황이 나쁜 건 아니잖아. 무료와이파이와 빈 강의실을 자습실로 제공하면서 학원생 수가 다시 늘고 있으니까. 그걸로라도 만회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그런데 그 불만쟁이들은 어떻게 하지?”
“불만쟁이라면 혹시 학원 원장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늙고 소심해서 그런지 입만 살았어.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고 말이야.”
“다들 서로 눈치만 보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강력하게 리드해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않으니 맨날 만나서 술 마시며 한탄이나 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그러니 쓸모없다는 거 아니야.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이 떨어지는 걸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하는 짓들인지.”
“제가 나서서 푸시를 좀 해볼까요?”
박유하 이사도 이젠 나성천 대표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면서 그가 원하는 게 어떤 건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그래. 대신 티 안 나게. 무슨 말인지 알지?”
“알겠습니다. 한 원장이 초이스 에듀로 간 게 어쩌면 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는 그런 식으로 보상해주고, 누구는 아무런 보상도 없고. 이것만큼 불공평한 일도 없으니까요.”
“그러게 말이야. 영악한 최건우가 그런 쪽으로는 희한하게 마음이 약해.”
건우는 한기원 원장을 초이스 에듀로 스카우트하면서 A학원을 빚 없이 말끔히 정리해줬다.
계약금 명목으로 해준 일인데, 그 사실이 알려지자 운영이 어려워진 다른 학원들도 건우가 그와 비슷한 수준의 보상을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괜한 동정심으로 제 무덤을 판 거죠. 한 원장을 받아줬다는 전례를 남겼기 때문에 이걸 잘만 이슈화시키면 최건우도 상당한 부담을 느낄 겁니다. 나중에 가서 자신이 한 원장을 영입한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었는지 제대로 깨닫게 해주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회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란 말씀이시죠?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확실하게 알려주고, 또한 최건우 대표의 불공정한 행동에 대해서도 제대로 인식시키면 되는 거 아닙니까? …네. 그럼요. 물론입니다. …네? 그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렇죠. 당연하죠. 지금 바로 회의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남 원장은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제시한 조건이 너무나도 매력적이라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피해 학원 모임 멤버 중 한 명인 한 원장이 초이스 에듀로 스카우트되었다는 소식은 모임 분위기를 매우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그의 행동을 배신이라며 맹렬하게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고, 모임의 결속력을 깨기 위한 건우의 수작질이라고 확대해석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임을 이끌어갈 확실한 리더도, 서로간의 끈끈한 유대감도 없었기에 모임은 사상누각처럼 위태롭게 변했다.
상황이 이런지라 남 원장은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혼자서만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물론, 자신 말고도 조 원장이나 정 원장 또한 비슷한 제안을 받았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뭐 한다고 이제 오는 거요? 남 원장님 때문에 회의시간이 늦어지잖소.”
옥상에서 몰래 전화를 받고 내려오자 회의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성질 급한 윤 원장이 남 원장에게 역정을 냈다.
“죄송합니다. 중요한 전화가 와서요. 모두 기다리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쳇. 여기서 남 원장보다 안 바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바쁜 척은.”
“뭐요? 바쁜 척이라고 했습니까?”
“자자. 여기서 우리끼리 다투면 어떡합니까? 남 원장님이 이미 사과하셨으니 윤 원장님도 그만하시죠. 그럼 회의를 다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대책 회의를 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한 건, 이제 우리도 초이스 에듀에 대해 태도를 명확히 해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초이스 에듀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이미 분명한 것 아닙니까? 당장 라이브 스트리밍 무료 서비스를 중단하든가 아니면 우리가 입은 손해를 보상해주든가. 이것 말고 우리가 취할 다른 태도가 있었습니까?”
“죄송합니다. 정 원장님. 제가 표현을 잘못했습니다. 정 원장님 말씀처럼 우리가 초이스 에듀에 요구할 사항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요구 사항은 정했는데 그걸 어떻게 요구할지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은 논의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 회의에서 그 부분을 제대로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저도 조 원장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매번 술자리에 앉아 불평불만만 늘어놓는다고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이젠 정말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원장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한기원 원장이 초이스 에듀에 들어간 이후 이들도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이번에 한 원장 스카우트해가는 거 보십시오. 점잖은 분들만 계신 자리에서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합니다만, 최건우 그놈이 우리를 개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마치 이런 것 아닙니까? 허튼짓하지 말고 내 말 잘 들어라. 그럼 내가 먹고살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이건 완전히 거지 취급을 하는 겁니다.”
“그게 뭐가 과격합니까? 솔직히 이번 한 원장 스카우트는 정말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피해를 입은 집단의 구성원 중 한 명을 빼간다는 건 우리를 흔들려는 야비한 수작질 아닙니까? 어린놈이 너무 승승장구하다 보니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참석자 중 상당수는 초이스 에듀로 옮긴 한기원 원장이 부러웠지만, 그런 속내를 드러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행여나 속마음이 들킬까 더욱 맹렬하게 건우를 욕하기 바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