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이 주임님. 저, 너무 악당 같지 않았나요?”
“네?”
“아니. 제가 한 원장님에게 너무 이죽거린 것 같아서요. 꼭 영화에 등장하는 나쁜 놈이 된 기분이었거든요.”
“하하하. 좀 그렇긴 했죠? 특히 ‘잠실에서는 지나가는 강아지도 당신 이야기는 다 안다’는 말은 정말 대박이었습니다. 강아지면 결국 개새끼를 뜻하는 말 아닙니까? 대표님에게 그런 과격한 면이 있을 줄이야. 깜짝 놀랐지 뭡니까.”
“이런. 역시 제가 너무 심했던 걸까요?
나이로만 따지면 한 원장은 거의 아버지뻘이다. 건우는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전혀 아닙니다. 저런 부류는 제가 잘 압니다. 그동안 사고를 친 사건들을 조사해보면 절대 나쁜 놈은 아닙니다. 학생하고 주먹다짐한 것도 술 마시는 제자를 훈계하려고 했던 거니까요. 방법이 잘못된 게 아쉬웠죠.”
“그러니까 제가 더더욱 참았어야 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욱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약자에게 강하게 행동합니다. 술 마시는 학생에게 좋은 말로 다독일 생각은 하지 않고 주먹질을 한 것도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잘하셨습니다. 예의 바르게 행동하면 오히려 얕보이기 십상입니다.”
정확한 분석은 아니었다. 한 원장은 상대를 봐가면서 화를 내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교사일 때는 교장과 싸웠고, 학원 강사일 땐 원장과 싸우던 사람이다.
그걸 모르는 이준규 주임이 아니었지만 굳이 그 사실까지 건우에게 언급하지는 않았다.
***
건우와 이준규 주임이 사라지자 한 원장은 건네받은 물건을 조수석에 던져두고, 조 원장과 약속했던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자동차를 몰았다.
백제고분로를 지나 올림픽대로로 들어섰다. 밤늦은 시간이라 도로는 막히지 않고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학 원장은 올림픽대로 왼편으로 보이는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을 지나면서 점점 자동차의 속도를 높였다.
건우와 함께 온 맹수 같았던 남자에 억눌린 답답한 기분이 그제야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당신 정말 운 좋은 줄 알아. 그러니까 빨리 확인하는 게 좋을 거야.’
그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와 속삭였던 나직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한 원장은 깜짝 놀라 자동차를 재빨리 갓길로 세웠다.
빠아아앙!
“야, 이 개X끼야. 똑바로 운전 안 해?”
갑자기 자동차를 세우자 뒤에서 따라오던 운전자가 열려 있던 창문으로 욕을 내뱉었다. 평소 같으면 당장 쫓아가 욕 배틀을 나눴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한 원장은 그런 욕 따위 들리지 않았다.
눈이 저절로 조수석으로 갔다. 볼펜처럼 생겼지만 이게 녹음기라는 건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확인하기가 왠지 두려웠다. 자신감 넘쳤던 남자의 말투가 신경 쓰였다.
녹음기 안에 무슨 내용이 담겨있는지는 몰라도 그것 때문에 자신이 굉장히 상처받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확인하고 성질대로 깽판을 부리든 냉정해지든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해.’
또다시 그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확인하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이 감정이 지금 한 원장의 심정이었다. 심호흡을 크게 한번 내쉬고 천천히 녹음기를 들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한 원장 그 멍청이는 요즘 왜 이렇게 안 온답니까?]
녹음기에서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는 순간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것 같았다.
조 원장과 자주 어울리던 윤 원장이었다.
생각보다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어렵다 어렵다 하소연하면서도 절박해 보이지 않는 걸 보며 그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건 대충 알고 있었다.
멈췄던 녹음기를 들어 다시 한 번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글쎄 말입니다. 거지새끼처럼 넙죽넙죽 공짜 술은 잘 받아먹더니, 너무 공짜를 밝혀서 탈이라도 난 걸까요?]
그다음에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한 원장의 눈이 질끈 감겼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던 조 원장이었다.
녹음기를 들고 있던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길 바랐지만, 역시 조 원장 또한 자신에게 좋은 의도로 접근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믿었던 마음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더 들어볼 것도 없었다. 배신감에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치밀었다.
“이 개X끼들. 이 씨X 놈들. 내가 당장 찾아가서 두 잡놈들을 때려죽여 버리고 말 거야.”
마음은 당장 차를 몰아 약속장소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성질대로 깽판을 부리든 냉정해지든 알아서 하라던 남자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자 미칠 듯이 치솟았던 화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젠 조 원장과 윤 원장이 기다리고 있는 강남의 술집으로는 갈 수 없었다. 그 자리에 가면 차갑게 식은 마음이 불타오르듯 금방 치솟을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건우에게 연락할 수도 없었다. 자존심도 상했고, 모욕적으로 대했던 자신의 행동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이 와중에도 상할 자존심이 있다는 사실이 뭔가 코믹했다. 갈팡질팡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오늘은 일단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집에서 가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다 보면 화난 이 마음을 어느 정도 정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런데 한 원장 이놈은 왜 이렇게 안 온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약속은 칼같이 지키던 사람인데, 왜 이렇게 늦는지 모르겠습니다.”
조 원장과 윤 원장은 한 원장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그를 기다리며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다가 무슨 사고라도 난 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사고가 났으면 어쩌죠?”
“어쩌긴요. 그럼 다른 먹잇감을 찾아봐야죠.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딱 그 짝이지 않습니까. 자기가 개똥인 걸 인증하는 것도 아니고. 쯧쯧.”
“그냥 신경 끄고 제대로 놀아봅시다. 그놈이 생각이 있으면 사고 수습하고라도 금방 오겠죠. 어이, 마담! 여기 산뜻하고 어린 여자애들로 일단 두 명 들여보내.”
오기로 한 사람이 오지 않았다. 정말 사고가 났을 수도 있지만, 그러든 말든 그들에게는 별 상관이 없었다.
***
“그런데, 대표님.”
“말씀하세요. 이 주임님.”
“한 원장 이력을 보면 문제가 많아 보이는데 괜찮겠습니까?”
한 원장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이준규 주임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한 원장님 성격에 문제가 있어 보이긴 하죠?”
고자성 과장에게 한 원장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을 때 건우도 고민이 많았다.
“문제가 있어 보이는 정도가 아닙니다. 저 정도면 거의 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애들 가르치는 일은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 학생 시절 신경질적인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정말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확대해석, 과민반응, 피해의식은 예사였고, 자기 기분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손찌검을 하곤 했었죠.”
“예전엔 그런 선생님들도 계셨죠.”
“저야 성격이 좀 무신경해서 그런대로 잘 견뎠지만, 그 선생님 때문에 상처받은 친구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한 원장이 그런 사람이라면, 그동안 쌓아온 초이스 에듀의 명성에 큰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이 주임님 말씀도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대부분 학교 선생님은 학생들을 사랑으로 대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몇몇 개념 없는 교사가 그런 성실한 선생님의 얼굴에 먹칠하곤 하죠. 다행스럽게도 오늘 만난 한 원장님은 그 정도 악질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개선의 여지도 충분히 있고요. 만약 구제불능의 문제아였다면 제가 직접 만나러 오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가요? 그런데 솔직히 오늘 대표님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거의 구제불능 또라이처럼 보였습니다.”
이준규 주임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던 한 원장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제게 악감정이 많아서 그랬을 겁니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저 때문에 자신이 망하게 생겼다면 친절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오해이긴 하지만 그런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 대표님은 가끔 너무 노인네 같으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제가요?”
“네. 세상을 달관했다고 해야 하나? 웬만한 일로는 놀라지도 않고, 좋게 이야기해서 나이답지 않게 노련해 보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노인네 같고요?”
이미 40살까지 살았던 과거의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 삶은, 보통 사람은 겪기 어려울 만큼 고된 삶이었다. 거기에 회귀라는 과학적으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남들에게 말하면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은 이상한 경험까지 했다.
지금의 건우는 오늘 당장 외계인이 나타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만큼 단련되어 있다. 그러니 감정 기복이 적은 게 당연했고, 그런 모습이 다른 사람 눈에는 노인네 같아 보일 수도 있었다.
건우도 다른 사람이 자신을 특이하게 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모습을 쉽게 고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죠. 하지만 자꾸 보니 그게 대표님의 매력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호들갑 떠는 대표님은 상상이 가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한 원장의 모습도 그리 놀랍지 않은 건가요?”
“고 과장님이 한 원장님을 강사로 영입하면 어떠냐며 건의했을 때는 저도 꽤 고민했습니다. 지금껏 한 번도 그분을 우리 학원에 영입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저도 이 주임님처럼 성격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학생을 가르치는 것에는 반대하는 입장이니까요.”
“그런데 왜…?”
“어쨌든 건의가 들어왔으니 한 원장님에 대해 제대로 분석을 시작했죠. 그런데 실력이 정말 기대 이상이더란 말입니다. 강의 모습을 돌려보고 또 돌려볼수록 자꾸 욕심이 생기더군요.”
“성격은 정말 개차반이던데 그래도 실력은 다른가 봅니다?”
한 원장이 맘에 안 들었던 이준규 주임은 건우의 설명에도 여전히 투덜거렸다.
“네. 실력은 좋아요. 성격만 고치면 이승훈 선생님이나 윤은영 선생님 급으로 발전할 충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어요. 그러니 제가 욕심을 부리는 거죠.”
“그런데 나중에 혹시라도 한 원장의 과거 이력이 초이스 에듀이 발목을 잡을 거라는 걱정은 안 드십니까?”
“그건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포장이요?”
“네. 마케팅만 잘하면 폭력 강사에서, 제자들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열혈 강사로 변신시킬 수 있습니다. 다행히 한 원장님 과거 폭력사건의 피해자들에게는 다들 문제가 있었거든요. 솔직히 학생이 술 마시고 유흥가를 돌아다니는 걸 봤는데 교사가 그걸 모른 척하는 게 더 문제 아닐까요?”
“그렇긴 하지만.”
“한 원장님이 선생님이기 때문에 훈계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와중에 싸운 건 잘못됐지만 욕을 하고 덤비는 학생과 치고받고 싸운 거지 일방적인 폭행은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한 원장님을 초이스 에듀에 영입하면 진심으로 학생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가슴 뜨거운 강사로 대중들에게 어필할 생각입니다.”
“폭력 사건을 바로 공개하시게요?”
가슴 뜨거운 강사로 어필한 건 과거 사건까지 모두 꺼내놓고 시작하겠다는 의미였다.
좋은 일도 아닌데 굳이 미리 공개할 필요가 있는지 이준규 주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숨기면 곪아요.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는 걸 봤는데 자꾸 숨기려다가 나중에 그 문제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까지 커져버리더군요. 시비를 건다면 분명 문제가 될 수 있는 이슈입니다. 그럴 바에는 먼저 밝히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어가는 게 낫습니다.”
“대표님은 한 원장에게 연락이 올 거라고 확신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성격이 급해서 그렇지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이 주임님이 전해준 파일을 들었다면 자신은 단지 이용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았을 겁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까요?”
“글쎄요. 배신감에 화가 나서 깽판을 부릴 수도 있고, 멘붕이 와서 아무것도 못 하고 멍하니 있을 수도 있겠죠.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왜 파일을 전해줬는지 궁금해서 다시 연락할 수도…. 아! 지금 대표님은 한 원장을 테스트하고 있는 거군요.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한 원장에 대한 대표님의 입장도 달라지는 건가요?”
“네. 솔직히 저도 한 원장님에 대해 100%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예전만큼 급한 성격은 아니라고 하니 어떤 판단을 할지 두고 보고 싶습니다. 만약 자기 성질을 다독이고 우리에게 연락한다면, 일단 가능성은 있지 않겠습니까?”
조 원장에게 찾아가 화풀이를 한다면 인연은 이용당하지 않도록 도움을 준 걸로 끝낼 생각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