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73화 (173/256)

제173화

“그럼 약점이 없어지는 건가요.”

“아니. 사탐 과목만 해도 9개인데, 겨우 두 과목이 추가됐다고 약점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하지만 사탐 라인이 대폭 강화되는 건 확실해. 각 분야에서 최고로 꼽히는 강사 두 명이 역사와 지리를 담당하게 되는 거니까.”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머리 아픈 건 똑같네요.”

“이쪽 일도 쉽다고 얕보면 안 돼. 예전보다 머리를 더 쓰는 느낌이야. 그땐 그냥 잡아와서 족치면 되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면 안 되니까.”

“대단하십니다, 과장님. 역시 아직 감이 안 죽으셨군요.”

무식하다고 구박받아도 고자성 과장의 현장에서의 순간적인 판단력은 누구나 인정할 만큼 대단했다. 차지훈 팀장도 그런 그의 재능을 보고 행정업무를 맡긴 것이다.

물론 결과는 대실패였지만.

“에헴. 그럼 그럼. 내가 누구냐? 스파이계의 전설 아니냐?”

“그렇죠. 미국놈들이랑 내기에서 이기려고 일본 왕태자비 속옷을 훔쳐왔다가 팀장님에게 맞아 죽을 뻔한 전설의 고자성 님이시죠. 흐흐흐.”

“쉿! 미친. 너 인마.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마. 방금 그 이야기 일본놈들이 들으면 바로 칼 들고 달려온다.”

한국 정보국을 무시하는 미국 CIA 요원 때문에 홧김에 일본 왕태자 부부가 묵고 있는 호텔에 잠입해 속옷을 훔쳐온 고자성 과장은, 그 사실을 차지훈 팀장에게 들켜 거의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은 적이 있었다.

그래도 차 팀장에게 걸려서 다행이었지, 만약 천둥벌거숭이처럼 미국 정보국 요원 앞에 일본 왕태자비 속옷이라며 자랑스럽게 내놓기라도 했다면?

외교분쟁은 둘째 치고 지금쯤 태평양 어딘가에서 물고기밥이 되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

어두운 밤. 한 원장은 밝은 달을 조명삼아 지도를 그렸다. 자신의 이러한 행동을 보며 괴벽이라고 놀려대는 사람도 있었지만, 다혈질적인 성격을 억누르기에는 이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었다.

세계 각지의 복잡한 지형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 굴곡 하나하나를 칠판에 그리다 보면 폭발할 것 같았던 상념들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휴. 미치겠네. 이 짓도 이제 약발이 다 된 건가. 마음이 도무지 진정되질 않네.”

지도 그리기가 오늘따라 유난히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학원 운영이 점점 어려워지자 마음이 답답해진 것이다.

은행에 찾아가 이자 상환을 조금 늦춰보려고 했지만, 돌아온 것은 역시나 냉정한 답변뿐이었다.

피해(?) 학원장들 모임에 나갔다오는 날이면 답답한 마음은 더욱 심해진다.

옆에서 자꾸 안 좋은 이야기만 듣자 건우에 대한 분노가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옆에 있었다면 주먹을 날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에겐 와이프와 자식이 있다. 그리고 건우는 그냥 보통 일반인이 아니다.

행여나 화를 참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켰다간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문이 일어날 거라는 걸 알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다.

다혈질인 그도 앞뒤 분간을 하게 할 만큼 건우는 대단한 존재였다.

Rrrr

흔들리는 마음을 겨우겨우 다잡고 있는데 조 원장에게 전화가 왔다.

원래 안면만 있던 사람인데 어려운 일을 함께 겪으며 많이 친해졌다.

한 원장에 비해 형편이 좋은지 종종 술이나 고기를 사주며 많은 힘이 되어줬다.

문제는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면 항상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든다는 사실에 있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초이스 에듀나 건우에 관한 안 좋은 소식만 가져와서는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 조목조목 설명하는데, 듣다 보면 순간 살기가 치솟을 때도 있다.

조 원장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옆에서 안 좋은 이야기만 늘어놓으니, 가뜩이나 안 좋은 감정이 점점 증오로 변하고 있었다.

이러다간 눈이 회까닥 뒤집혀 큰 사고라도 저지를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모임도 자제하고 있다. 그랬더니 이렇게 전화가 온 것이다.

받지 말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조 원장님.”

“오랜만입니다. 한 원장님. 요즘 바쁘세요.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바쁘긴 하죠. 학원이 계속 적자인데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봐야 하지 않습니까?”

“혼자 동서분주 한다고 방법이 찾아질 리가 있습니까? 근본적인 문제점이 사라지지 않는데요.”

“근본적인 문제점이요?”

“최건우 대표가 이번 사태의 원흉 아닙니까? 그 사람이 사라져야 우리도 숨통이 좀 트이겠죠. 그렇지 않고서는 뾰족한 방법이 있겠습니까?”

무슨 말인가 했더니 시작부터 최건우 이야기다.

“이제 겨우 20대 초반인데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앞으로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지.”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대책 마련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것 아닙니까? 필요하면 집단행동이라도 해야죠. 아무도 무시 못 하게 말입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단합된 힘을 보여줘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거야 그렇죠.”

“그럼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합시다. 그거랑 관련해서 이야기도 좀 나누고요.”

“술이요?”

“하하하. 사람들끼리 의기투합을 하려는데 술보다 좋은 게 어디 있습니까?”

모임을 할 때마다 위기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매번 술판을 벌여서 불만이었는데, 또다시 술을 마시러 나오라고 하니 기가 찼다.

그러나 조 원장의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들으니 차마 나가기 싫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알겠습니다. 강남이시죠? 지금 학원인데 제가 곧 그리로 넘어가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럴 땐 술이 최고죠. 오늘 한번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봅시다.”

전화를 끊은 한 원장은 강의실을 대강 정리하고 내키지 않는 걸음걸이로 주차장을 향했다.

그 순간 두 개의 그림자가 그의 걸음을 막아섰다. 어두운 지하주차장에 건장한 체구의 두 남자가 나타나자 다혈질의 한 원장도 잔뜩 긴장이 됐다.

“한 원장님.”

“누, 누구요?”

자신을 아는 듯한 사내의 말에 그제야 놀란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초이스 에듀의 최건우입니다.”

***

“뭐랍니까?”

조 원장이 한 원장과 통화를 끝내자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 원장이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곧 온답니다.”

“그놈 참. 예전에는 그렇게 사고를 잘 치고 다니더니 요즘 들어 갑자기 왜 이렇게 신중해졌는지 모르겠군요.”

“나이도 먹었고, 게다가 가족이 생겼지 않습니까? 아무리 앞뒤 안 가리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라도 이젠 행동이 조심스러워지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도 얼마 안 남았어요. 그 성격이 어디 가는 건 아니거든요. 옆에서 조금만 바람을 넣으면 제대로 사고 한번 칠 겁니다.”

“그래야죠. 정말 이대로 가면 초이스 에듀 때문에 다들 말라죽습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에요. 한 원장이 그 돌파구가 되어주면 좋으련만. 다른 곳에서 부탁받은 것도 있고….”

“쉿! 말조심하세요. 누가 듣습니다. 부탁은 누가 부탁을 받았다고! 우리는 그냥 초이스 에듀가 사교육 시장을 독점해서 선량한 학부모와 학생들이 고통받는 것을 막기 위해, 우국충정의 진실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는 겁니다. 잘 아시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세요?”

“허허허. 죄송합니다. 그렇죠. 우리는 단지 대한민국의 교육을 걱정하는 국민의 한 사람일 뿐이죠. 한 원장이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 같은 훌륭한 대업을 결심하면 좋을 텐데.”

***

“한 원장님.”

“누, 누구요?”

“초이스 에듀의 최건우입니다.”

“누구라고요? 최건우요? 지금 초이스 에듀의 최건우 대표를 말하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이렇게 직접 뵙는 건 처음이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건우가 한 발짝 나서자 얼굴이 가로등 불빛에 드러났다. 잔뜩 경계하고 있었는데 낯선 이의 정체가 건우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한편으론 그토록 싫어하는 인물에게 겁을 먹었다는 사실에 짜증과 불쾌감이 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 사람을 놀래키는 겁니까?”

한 원장의 말투에는 당연히 날이 서 있었다.

“놀라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이목을 피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이목이요? 본인이 무슨 연예인이라도 된답니까? 이목은 무슨….”

“저 때문이 아니라 한 원장님 때문입니다.”

“저요? 이것 보쇼. 최 대표. 나는 당신과 달리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사람입니다. 남의 이목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쓸데없는 소리 하려거든 그냥 가보쇼.”

“저와 달리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요? 그 말씀은 마치 제가 굉장한 범죄자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럼 당신이 범죄자가 아니란 말이오. 나도 듣는 귀가 있소. 그렇게 어린 여자애들을 좋아한다고요? 하긴 최 대표 나이가 어리니 여고생이랑 썸싱이 생기는 걸 무조건 나쁘다고 몰아붙일 수는 없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중생은 너무 한 것 아니오? 그러다 잘하면 초등학생이랑도 일을 치르겠수다. 막내가 아직 초등학생이라던데, 동생 보기 부끄럽지도 않소?”

“이 사람이 감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옆에서 조용히 건우를 수행하던 정보팀 이준규 주임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발끈하고 나섰다.

‘헉! 무, 무슨 놈의 눈빛이….’

살아온 환경부터가 다르다. 욱하는 성격이 있다고 알려진 한 원장도 따지고 보면 남들보다 성질이 더러운 토끼일 뿐이다. 토끼는 그래 봤자 토끼다. 절대 맹수는 될 수 없다.

이준규에 살벌한 눈빛에 한 원장은 맹수 앞에 놓인 초식동물처럼 꼼짝달싹 못 하며 창백한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이 주임님. 저랑 약속한 것 잊으셨습니까.”

“하지만 대표님. 저 인간이 하는 소리 들으셨지 않습니까? 아무리 뚫린 입이라고 저렇게 함부로 나불대는 인간은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아야 정신을 차립니다.”

“이 주임님!”

“아…! 죄송합니다. 대표님. 너무 말도 안 되는 모함에 제가 잠시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이준규 주임은 자신이 모욕받은 것처럼 화를 냈지만, 건우의 낮고 강한 어조에 굳은 표정을 풀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놀라셨죠? 이 주임님이 저를 워낙 각별하게 생각하셔서 실례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노, 놀라긴 누가 놀랐다고. 여하튼 깡패 새끼 데려와서 사람 협박하는 건 듣던 것과 똑같구려.”

“휴우. 원장님께서 저에 대해 굉장히 많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라이브 스트리밍 무료 서비스 때문에 학원이 어렵다고 들었으니 저를 원망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 때문에 이 주임님까지 모욕하는 건 곤란합니다.”

“곤란하면 어쩔 거요? 저 깡패 새끼 시켜서 사람이나 때리려고?”

말을 막 해도 건우가 계속 예의 바르게 나오자 마음이 놓인 한 원장은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절대 자기를 어쩌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이 주임님. 한 원장님을 조사한 내용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대표님. 나이 42살. XX 대학 사범대학교 지리교육학과 졸업.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교사생활을 하는 첫해 술 먹고 욱하는 성격을 못 이겨 취객과 주먹다짐을 벌임. 교사의 품위를 손상시켰다고 징계를 받았으나 이듬해에는 고등학생과 싸움을 벌이다 경찰에 체포. 이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주변 압박에 못 이겨 사표를 씀. 강의 실력은 좋아 학원에 취직했으나 다혈질적인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빈번하게 사고를 쳤고, 이 때문에 합의금으로 물어준 돈만 억대가 넘어가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것참. 이력이 화려하시군요. 조사한 내용으로만 보면 누가 깡.패.새.끼. 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니 뻔뻔한 건지 아니면 자신이 했던 실수는 금방 까먹는 돌대가리인 건지 헷갈립니다.”

지금껏 예의 바르게 행동하던 건우였다. 하지만 이준규 주임을 계속 모욕하는 한 원장의 모습을 보며 태도를 바꿨다.

“지, 지금 뭐하자는 거요? 사람 뒷조사는 왜 한 거요? 그걸로 나를 협박이라도 할 셈이오?”

“협박이요? 무슨 협박이요? 학원가에서 깡패 강사라고 소문날 대로 소문난 한 원장님인데 굳이 뒷조사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잠실에서는 지나가던 강아지들도 원장님 이야기는 훤히 알고 있더군요.”

“이보시오! 지금 나를 모욕하려고 찾아온…!”

건우의 이죽거림에 심한 모욕감을 느낀 한 원장이 욱하며 성격을 드러내려 했으나, 뒤에서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는 이준규 주임과 눈이 마주치자 금세 꼬리를 내리고 말을 얼버무렸다.

“먼저 모욕한 것은 한 원장님인 것으로 아는데요.”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요. 갑자기 찾아와서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한 원장님을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지만, 오늘은 그냥 선물만 하나 전해드리고 가겠습니다. 조금 전에 들어온 정말 따끈따끈한 선물입니다. 어디 가시는 길인지 모르겠지만, 가기 전에 확인부터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우리가 되게 어렵게 구했거든요. 이 주임님.”

“알겠습니다, 대표님. 당신 정말 운 좋은 줄 알아. 그러니까 이건 빨리 확인하는 게 좋을 거야. 내용 확인하고 성질대로 깽판을 부리든 냉정해지든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하도록 해.”

이준규 주임이 볼펜처럼 생긴 물건을 건네주자, 건우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물건은 받은 한 원장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자신의 자동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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