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64화 (164/256)

제164화

공소한은 남들보다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운 편이다.

머리가 나쁘지 않아 공부는 곧잘 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는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명석한 편이긴 해도 학교공부만으로 학원이다 과외다 하며 비싼 돈 들여 사교육을 받는 다른 친구들을 능가할 만큼 압도적으로 뛰어난 머리를 가진 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성적은 점점 떨어져만 갔다.

어떻게든 뒤처지지 않으려고 교과서와 참고서를 가지고 코피를 흘려가며 공부해봤지만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며 소한이의 부모는, 자식을 제대로 공부시켜주지도 못하는 무능한 부모라며 많은 자책을 했다.

소한이 또한 부모님의 상심이 얼마나 큰지 잘 알았다. 실망감을 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의 벽은 의지만으로 쉽게 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최건우. 많은 사람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젊은 사업가.

하지만 소한이는 그가 싫었다.

아무리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해도, 결국 사교육 통해 돈을 버는 사람이었다.

사교육을 받지 못해 성적이 떨어지다 보니 억지스러운 건 알아도 자꾸 최건우 그 사람이 원망스러웠다.

매달 어마어마한 금액을 기부하며 어려운 사람들 돕는다고 하는데, 한 번도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정말 어려운 ㅜ을 돕는지 아니면 그냥 쇼하는 건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근로장학생 정책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편이 어려운데 공부를 잘하는 학생을 뽑는다니, 말장난도 아니고 어이가 없었다.

형편이 어려운데도 공부를 잘한다는 게 그의 경험상으로는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래저래 건우는 자기도 모르게 소한이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소한아!”

“어. 왜?”

“오늘 경준이 형이 와서 강연회 연다고 하는데, 갈 거야?”

강경준은 소한이의 고등학교 선배이자, 작년 초이스 에듀의 근로 장학생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수학능력시험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전국 1등을 차지한 주인공이었다.

“글쎄. 거기 가서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집안 형편은 계속 어렵고 성적은 마음대로 오르지 않자 소한이는 점점 더 냉소적으로 변했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선배의 강연 소식에도 시큰둥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가 가장 싫어하는 건우의 애제자로 알려진 사람 아닌가?

솔직한 말로 잘난 사람의 잘난 척하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왜?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혹시 알아? 공부에 대한 노하우라도 제대로 알려줄지. 괜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됐어. 난 별로.”

“그래? 그럼 마음대로 해. 조금 있으면 강연회 시작한다고 하니 난 가볼게.”

별 반응이 없자 친구는 더 이상의 설득은 포기하고 대강당으로 이동했다.

대부분의 학생은 강연을 듣기 위해 자리를 비웠고, 텅텅 빈 교실에 홀로 남은 소한이는 교과서와 참고서를 뒤적이며 억지로 공부를 시작했다.

툭툭.

한참 동안 책을 보고 있는데 등을 두들기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아보니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빙긋이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사람. 양복 대신 교복 입은 모습을 떠올리자 눈앞의 남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오늘 강연을 하기로 한 경준이었다.

“아…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래. 안녕.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내가 누군지 아는가 보구나.”

“그럼요. 우리 학교에서 선배님 모르면 간첩인 걸요.”

“하하하. 그런가?”

“그런데 오늘 강연회 있다고 하던데, 여기서 뭐 하세요?”

“아직 시간이 남아서 예전 교실 둘러보고 있었어. 네가 앉아 있는 그 자리, 예전에 내가 앉았던 자리거든.”

“그러세요? 혹시 앉아보고 싶으신 건가요? 자리 비켜드려요?”

“아니야. 됐어. 그런데 넌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내 강연회에는 관심이 없나 봐?”

“네. 뭐… 그다지.”

“왜?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공부에 왕도가 있나요? 그냥 열심히 하는 거죠.”

“하하하. 왕도가 없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냉소적인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소한이 앞에서도 경준이는 여전히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전국 수석으로 이름을 날렸으니 더는 고생할 일이 없다. 들리는 말로는 건우의 수제자라는 이유로 엄청난 과외비를 받고 있다고 한다.

“네? 뭐 있을 수도 있겠네요. 돈이면 되는 거겠죠. 비싼 학원 다니며 못하는 과목은 고액 과외로 보충하고. 그런 게 왕도겠죠?”

“너, 집이 가난하지?”

“네.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요?”

“아니 전혀 문제가 안 되지. 그냥 너의 반항적인 눈빛을 보니 예전에 내 모습이 생각나서 말이야. 나도 세상이 온통 원망스러울 때가 있었거든.”

“세상이 원망스러운 게 아니라 불공평한 세상이 싫은 것뿐이에요.”

“그게 그거지 이 녀석아. 혹시 부모님이 안 계시니?”

“아뇨. 부모님 모두 살아 계시는데요.”

“그럼 부모님이 장애가 있으셔서 아무런 경제적 활동도 하기 어려운 거?”

“왜 자꾸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틀렸어요. 두 분 모두 열심히 돈을 벌고 계세요. 단지 큰돈을 벌지 못하고, 갚을 돈이 많을 뿐이죠.”

소한이는 경준이 앞에서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자신이 의아했다.

“바보 같은 자식. 그런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형이 뭘 안다고요!”

“너 내가 초이스 에듀에서 근로 장학생이었던 거 알지?”

“네. 알아요. 그런데 그게 왜요?”

소한이의 말투가 한층 더 퉁명해졌다.

“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동생 둘밖에 없었어. 그리고 같이 근로장학생을 했던 현주는 고아야. 동생과 보육원에서 생활했지. 동훈이는 부모님이 모두 계시지만 중증 장애인이고, 윤혜는 어머니만 계시는데 많이 아프셔. 문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실종 상태야. 사망이 확인되지 않아 정부 지원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 그리고 전부 동생이 있어서, 아르바이트하며 그 돈으로 동생들 용돈이며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어. 넌 어때?”

“그, 그게….”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근로 장학생으로 뽑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래도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생각지도 못한 경준의 설명에 소한이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입만 뻐금거렸다.

“빚이 좀 있으면 어때?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건강한데. 솔직히 난 네가 부럽기만 한데, 넌 세상이 그렇게 불공평하게만 보이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에요. 단지 비싼 돈 들여가며 사교육 받는 친구들이 부러워서….”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런 의미에서 넌 네 강연회에 강제 참석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게는 내 이야기가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까 속는 셈치고 대강당으로 같이 가자.”

“강제 참석이요?”

“그래. 어떡할래. 싫어?”

“아니요. 갈…게요.”

약속된 시간이 되고 경준의 강연이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후배님 여러분. 저는 지난해 이곳 고등학교를 졸업한 졸업생 강경준입니다. 세상에서 힘든 시기를 마주하고 있는 후배님들의 소중한 시간을 저를 위해 할애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1년 전보다 훨씬 성숙하고 여유가 생긴 경준은 수백 쌍의 눈동자 앞에서도 전혀 떨지 않고 차분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강연을 부탁받았을 때는 솔직히 많이 꺼려졌습니다. 하지만 제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최건우 대표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제가 가지고 있는 저만의 노하우와 경험담이 누군가에게는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그 한 사람을 위해 용기를 가지고 단상에 서라.”

“그래서 용기를 냈습니다. 누군가 한 명은 제 이야기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요.”

경준은 능숙한 말솜씨를 자랑했다.

참석 학생들 대부분이 자기도 모르게 경준이 하는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얼마 흐른 것 같지도 않았는데 사방이 어두워졌고 강당에 라이트가 켜졌다. 관심이 집중된 강의도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만 더 하고 오늘 강연은 마치겠습니다. 예전에 교장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면 정말 싫었는데 제가 똑같이 말을 하게 되는군요. 마지막으로….”

강당이 잠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저는 몸이 편찮으신 할머니와 아직 중학생인 두 동생과 살고 있습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힘들게 하루하루 살았었죠. 한때는 세상에서 제가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함께 일했던 근로장학생 친구들도 그렇지만, 이번에 새롭게 선발된 2기 근로장학생 중에는 우리보다 훨씬 더 힘든 삶을 살면서도 항상 미소를 짓고 살아가는 후배가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두 분 모두 식물인간 상태이고 밑으로는 다섯 명의 동생과 치매가 걸린 할아버지까지 있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저조차도 엄두가 나지 않는 어려운 환경 속에 살아가는 그런 후배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릴 뻔했습니다. 그런데 환하게 웃고 있는 그 친구를 보니 그럴 수 없더군요. 제가 눈물을 흘리면 열심히 살아온 후배를 오히려 모욕하는 것 같았거든요.”

“좀 통속적이죠? 너무 뻔한 이야기라서 후배님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와 닿을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금 삶이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로 어렵다고 느낄 수 있지만, 여러분의 삶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밝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 명심해주세요. 자기보다 나은 처지인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은 괜찮지만, 그들의 삶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비관하며 살지는 마세요. 너무 위로만 바라보면 욕심이 생기고 그건 여러분을 망치게 할 겁니다.”

“욕심 말고 열정을 가지도록 노력해보세요. 열정은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하지만, 욕심은 원하는 것 이상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열정은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힘이고, 욕심은 남을 이기기 위해 애쓰는 힘입니다. 어차피 노력할 거라면 남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만족을 위해서 그 시간을 사용하세요. 그러면 지금 삶이 훨씬 행복해질 겁니다. 강연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바쁜 시간 쪼개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와아아아!”

강연이 끝나자 우렁찬 함성과 열렬한 박수 소리가 대강당에 울려 퍼졌다.

경준이에 의해 강제로 참석했던 소한이도 가슴에 와 닿는 그의 이야기에 자기도 모르게 열심히 손뼉을 쳤다.

다른 건 몰라도 욕심과 열정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스스로를 위해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친구들을 이기기 위해 공부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답답했던 명치가 뻥 뚫리듯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

강연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온 소한이는 평소보다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공소한. 선생님이 부르신다.”

“나를? 왜?”

“몰라. 그냥 별말씀 없으시던데.”

“그래? 알았어.”

갑작스러운 호출에 의아해하며 교무실로 가자 담임 선생님과 경준이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한이 왔구나. 경준이가 그러던데, 아까 잠깐 만났다면서?”

“네. 교실에 있다가 만났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글쎄다. 내가 아니라 경준이가 볼일이 있는 것 같거든. 할 이야기가 있나 보더라고.”

“선배님이요?”

“그래. 너 좀 보고 가려고 내가 특별히 부탁드렸다. 영광인 줄 알아. 하하하. 여기서 이야기하긴 그렇고 상담실 비었다고 하니 일단 거기로 자리 옮기자.”

“네. 선배님.”

두 사람은 교무실로 나와 옆에 있는 상담실로 이동했다.

“자. 이거 받아.”

상담실에 도착하자 경준이는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 소한이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선물.”

“선물이요? 왜 갑자기 선물을…?”

“너도 소식 들었지? 초이스 에듀에서 라이브 스트리밍 무료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네. 듣긴 들었죠. 하지만 그걸 보려면 컴퓨터나 스마트폰, 태블릿 같은 게 있어야 한다고 해서 관심을 끊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주는 거야.”

“선배님이 왜 이걸 제게 줘요?”

“그놈의 선배님 소리는. 그냥 형이라고 불러. 한 살밖에 차이 안 나는데 선배님은 너무 징그러워.”

“네? 아, 네. 그런데 형이 왜 이걸….”

“라이브 스트리밍 무료서비스를 앞두고 홍보하는 거야. 서비스가 시작되면 너는 앞으로 한 달간 강의를 듣고 정확한 소감을 남기는 거지. 귀찮으면 하는 수 없고. 싫어?”

“아…아니요. 할게요.”

그냥 핑계라는 걸 알았지만 소한이는 선물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 잘 생각했어. 그리고 이번에 각 통신사와 협의해서 원하는 학교를 대상으로 전 교실 무료 와이파이 존을 설치하기로 계약했거든. 우리 학교도 이미 신청했다고 하니까 통신료 부담 없이 최건우 선생님의 환상적인 강의를 들을 수 있을 거야.”

상당한 비용이 드는 일이지만 통신업체 후발 주자인 KGT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무료로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고마워요. 선배님. 아니 형.”

“고맙다는 말은 나중에 성적이 오르면 해. 담임 선생님에게 이야기 들어보니 소한이 너 머리도 좋다고 그러시더라. 너, 한 번도 최건우 선생님 강의 들어본 적 없지? 이번 기회에 들어봐. 신세계를 보게 될 거야.”

“네. 꼭 들을게요. 저도 그 선생님 강의,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듣고 싶었거든요.”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소한이가 가장 싫어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던 건우는 경준이의 적극적인 홍보(?) 덕분에 꼭 한번 듣고 싶은 명강의 선생님으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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