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건우의 초이스 에듀 사무실.
“어떻게 예상하셨어요?”
손다정이 참 신기하다는 듯 건우를 바라보며 질문을 했다.
“뭐가요?”
“이번 모의고사 난이도 조절 실패할 거라는 거요. 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별다른 조치를 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공무원이잖아요.”
“네?”
“공무원이 하는 일이 그렇다고요. 창의적이지 못하고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영혼 없이 움직이는 로봇이라고 해야 하나? 위에서 쉽게 내라고 지시를 해도 알아서 적절하게 난이도 조절을 해야 하는데, 그러다가 괜히 어렵다는 말이 나오면 큰일이잖아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처럼 쉽게 낼 수밖에.”
“아무리 그래도 그게 쉽게 예상이 되나요?”
“역사가 말해주잖아요. 1997년 수능시험이 어렵다고 욕먹으니까 1998년에는 쉽게 나오고. 2001년에는 너무 쉽다고 아우성치니, 2002년에는 또 너무 어렵게 출제하고. 2010년과 2011년도 마찬가지죠. 평이했던 수능시험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너무 어렵거나 너무 쉬우면 그다음 해는 꼭 반대 양상을 보이곤 했어요.”
“그런데 모의고사가 너무 쉽게 나왔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실제 수능시험은 어렵게 나올까요?”
“아뇨. 그래도 쉽게 나올 겁니다. 이미 EBS교재 활용도를 높이겠다고 기자들까지 불러 공언했는데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수는 없겠죠.”
이번 모의고사만큼 쉽게 나오진 않겠지만, 이미 공언한 마당에 어렵게 낼 순 없다.
“그럼 결국 학원들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겠네요.”
“그건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이번 모의고사로 인해 교육부는 또다시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으니까요. 아무리 수능시험이 쉽게 나온다고 해도 학부모 입장에서는 정부의 말만 믿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갈팡질팡하는 난이도를 보며 불안한 마음에 학원에 대한 의존도가 오히려 높아질 수도 있어요.”
“그럼 크레이듀의 공작은 무위로 돌아가는 건가요?”
“그러게요. 정확히 크레이듀라고 꼭 집어 말하긴 힘들지만, 배후가 있다면 헛심을 쓴 건 확실합니다. 공무원을 너무 믿은 게 오판이었죠.”
“100%가 아니면 99% 확실한 크레이듀라고 해두죠. 그런데 대표님. 이대로 가만히 계실 건가요? 이번 모의고사 개입도 그렇고, 스칼라 씨에 대한 루머도 그렇고 굉장히 치사하면서도 집요하잖아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얕잡아 보일 수도 있어요. 뭔가 조처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조금만 더 두고 봅시다. 일단 잔가지부터 하나하나 쳐내고, 한 방에 날릴 수 있도록 기회를 기다릴 생각입니다. 그러니 손 팀장님도 당분간은 학원의 내실을 다지는데 더 많은 신경을 써 주세요.”
***
크레이듀 대표실
“이봐. 박 이사.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원래 계획이라면 지금쯤 사교육 무용론이 슬슬 등장해야 할 시점이잖아.”
“그게 교육부에서 생각보다 문제를 너무 쉽게 내는 바람에 계획이 꼬였습니다.”
“너무 쉽게 출제해서 일이 꼬였다? 내가 직접 나서서 교육부 장관을 비롯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니며 모의고사를 쉽게 출제하게 만들었더니 이제 와서 너무 쉬워서 문제다? 어허. 박 이사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 바보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군, 그래.”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사실 이번 시험이 쉬워도 너무 쉬운 게 사실이었다. 항간에는 장난 삼이 시험을 본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만점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 지경이다.
“그런 뜻이 아니면? 지금 자네가 자네 입으로 내게 말했지 않아? 여기서 모의고사를 쉽게 나오도록 하려고 불철주야 뛰어다닌 사람이 누군가? 바로 나야 나. 그런데 모의고사가 너무 쉽게 출제되는 바람에 일이 틀어졌다고 하면 그동안 내가 고개 숙이며 부탁했던 일들이 모두 뻘짓이었다는 의미밖에 더 돼? 혹시 나한테 책임 전가라도 하려는 거야?”
나성천 대표의 표정은 평온했으나, 그의 말은 박유하 이사의 폐부를 찌를 만큼 신랄했다.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뻘짓이라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대표님에게 책임 전가를 하겠습니까? 단지 교육부 공무원들의 무뇌아적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이봐, 박 이사.”
“네. 대표님.”
“난 박 이사에게 거는 기대가 정말로 컸어. 그런데 지금 보니 박 이사 자네와 세계교육이 초이스 에듀에게 밀려 박살이 난 이유를 알겠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계획을 수립할 땐 말이야. 항상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어야 해. 계획이 성공했을 때도 어떤 식으로 성공을 거두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만들어두는 게 기본 상식이지. 하물며 실패했을 때야 당연히 대책 마련을 해놨어야지. 안 그래?”
“맞습니다.”
“지금처럼 이렇게 아무 대책도 없이 멍하니 서 있다는 건 모의고사가 이렇게까지 쉽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나 또는 난이도가 너무 낮을 경우를 대비한 대비책을 전혀 준비하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리고 둘 중 뭐가 됐든 확실한 것은 자네가 무능하다는 사실이야. 안 그래?”
“죄, 죄송합니다.”
박유하 이사는 그저 머리만 열심히 조아렸다.
“어허. 이게 그냥 단순히 죄송하다 한마디로 끝날 일이야? 박 이사 자네를 고용해달라며 자신만만하게 행동하던 모습은 다 어디 갔어? 최건우와 초이스 에듀를 무너뜨릴 비책을 여럿 준비했다고 들었네만. 옐로우 레이디라고 했나? 최건우와 그 아이돌 그룹 리더와 엮는 것도 결국 실패를 했더군. 두 사람이 소꿉친구인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대표님 그건 두 사람이 소꿉친구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필이면 강 의원 성추행 사건과 그 이후 계속되는 비리 의혹들로 언론에 관심을 제대로 못 받은 게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건우가 스칼라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정치인 비리사건을 일부러 크게 터트린 것이지만, 사건에 건우가 개입했을 거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껏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연예인들을 이용한 적은 많아도, 연예인 스캔들을 무마하기 위해 정치인을 이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겠지. 암. 자네는 잘했는데 운이 안 따른 거지. 항상 자네는 불운하고 최건우는 행운이 넘치고. 안 그래? 위기 상황이 아무리 닥쳐도 기적 같은 반전이 일어나 그를 구해주지. 병역비리와 정신과 상담 이력으로 문제가 될 때도 하필이면 학력 위조 이야기가 터지면서 이슈가 병역이나 정신병이 아니라 학력위조로 전환되었지. 거기다 또 하필이면 소아암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 시위까지 나서고. 이번에도 하필이면 정치인 스캔들이 터져 스칼라와 최건우의 열애설은 흐지부지되고. 항상 운이 따르는 최 대표가 얄미워죽겠군, 그래?”
위로가 담긴 것이 아니라 명백히 비꼬는 듯한 어투.
그럴수록 박유하 이사의 고개는 점점 아래로 향했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긴? 자네는 재수가 없어서 일이 꼬이고, 최건우 대표는 항상 운이 좋아서 잘 풀리고. 그게 자네가 하고자 하는 변명이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박 이사 자네의 가장 큰 문제는 최 대표를 너무 얕잡아보는 것 같아. 그런 운이 연달아 계속 일어날 수 있다고 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한 번 생각을 달리해보자고. 만약에 학력위조 이슈를 최건우 대표가 직접 터트린 거라면? 그리고 소아암 어머니의 시위도 그 배후에는 최 대표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정말, 정말 터무니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이번 정치인 비리사건에도 최 대표가 연관되어 있다면?”
“그건 너무 비약이 심하십니다.”
“과연 그럴까? 나는 그가 보여준 수능시험 적중률이 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말이야 바른말이지 솔직히 인수분해면 ‘인수분해에서 나온다’ 정도로 예측하지 최 대표처럼 디테일하게 적중하는 건 정말 어렵거든. 그것도 한 문제가 아니라, 과목별로 전부 따지면 백 문항이 넘어.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게 더 터무니없는 일이지. 안 그래?”
“네. 저도 그건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니까요. 그래서 행여나 문제 유출을 한 것은 아닐까 그쪽으로 알아보는 중입니다.”
“그래서 자네가 안 되는 거야.”
“아니, 대표님!”
나성천 대표의 냉혹한 평가에 박유하 이사도 더는 참지 못하고 발끈하고 말았다.
“똑똑히 들어 이 멍청한 자식아!”
“대…대표님.”
“대표님이고 나발이고 간에 징징거리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 멍청한 새끼. 너는 아직도 최건우가 만만해? 대체 개뿔 가진 것도 없는 자식이 머리까지 나쁘면 어쩌자는 것이야. 내가 볼 땐 최건우는 천재야. 너 따위 멍청한 놈이 만만하게 볼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고. 알아들어?”
나성천 대표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계속 이었다. 그동안 박유하 이사는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그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이 실제로 실력인지, 아니면 정말로 단지 운인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 단지 운이라고 해도 계속되면 그것도 능력이야. 그렇다면 그를 상대할 땐 최악의 경우는 염두에 두고 일을 꾸며야 하지 않겠어? 항상 운이 없었다, 상황이 안 좋았다, 그따위 궁색한 변명 따위를 늘어놓을 시간이 있다면 말이야. 안 그래? 왜 대답을 못 해? 응?”
더 이상 박유하 이사에게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아니, 예의를 차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처음에는 영악하게 잔머리 굴리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으나, 몇 달 지켜본 결과 너무 머리만 굴리려는 모습이 못마땅했다. 게다가 꼴에 재벌가의 핏줄이라고 자존심은 높아서 상대방을 너무 쉽게 깔보는 경향까지 있었다.
학원 운영에 있어서 어느 정도 쓸모가 있는 건 인정하지만, 믿고 맡길만한 인재는 아닌 듯 보였다.
“마, 맞습니다.”
“그래. 그렇게 인정을 하라고.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했어. 너 같이 열등감 넘치는 사생아 따위가 만만하게 볼 상대가 절대 아니야, 최 대표는. 죽을 각오로 이를 악물고 덤벼도 이길까 말까 한 상대를 얕잡아보고 있으니, 대체 무슨 수로 이기겠어. 쯧쯧쯧. 한심하기 그지없어. 아무래도 자네에게 초이스 에듀를 상대하도록 맡기는 건 다시 생각해봐야겠어.”
“아닙니다. 대표님. 제발 한 번만 더 믿어주십시오.”
박유하 이사 입장에서는 나성천 대표의 말이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이대로 쫓겨나면 그는 더는 갈 곳이 없다. 이미 세계교육을 말아먹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릎 꿇고 사정해서 크레이듀에 합류했는데, 그곳에서도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쫓겨난다면 완전히 재기불능의 처지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사촌 형인 박준하 전무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크레이듀에 남았다. 뭔가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단순히 재기불능이 아니라 용도폐기가 될지도 모른다.
“믿어 달라? 지금까지는 내가 자네를 안 믿어 준 거야? 박 이사 자네 같은 인재는 어디든 널렸어. 자네의 장점은 단지 세계교육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는 사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세계교육을 완전히 흡수했기 때문에 장점은 더는 장점으로 인정받기 힘들어. 상황이 이런데 내가 왜 자네를 계속 중용해야 하지? 지금 우리 내부에서는 최건우 대표와 경쟁할 것이 아니라 동업을 하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
“와룡그룹에서도 최건우를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아주 못 알아먹지는 않는군. 그런데 단순히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정도가 아니야. 흡수나 인수가 아니고 동업이라는 말이 중요해. 동업이 무슨 뜻이야? 같을 동(同), 일 업(業). 이렇게 두 개의 한자가 합쳐진 말이지. 문제는 같을 동(同)자라고. 다른 곳도 아니고 대한민국 재계서열 2위 대(大) 와룡그룹이 고작 학원이나 운영하는 최건우에게 동등한 자격을 주겠다는 뜻이라고. 그만큼 그를 높이 평가한다는 이야기지. 이런 상황에서 내가 왜 자네를 계속 믿어줘야 하는지 나를 설득할 수 있겠나?”
그제야 완전히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박유하 이사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떻게든 나성천 대표를 설득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순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사생아라며 멸시받았던 아픔, 어머니를 창녀 취급하던 사촌들에게서 느꼈던 모멸감. 이런 감정들이 하얗게 변했던 머릿속을 차갑게 식혀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