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4일 차.
[강 모 의원 성추행 이력 처음 아니다. 고깃집 종업원 등 피해자 제보 이어져.]
[수천억 원대 공사 수주. 강 모 의원 개입 의혹 일어.]
[철도 비리, 해운 비리 의혹까지. 강 모 의원 육해공 비리 3관왕 등극.]
강 의원의 미성년자 성추행 사건은 초이스 에듀 정보팀의 노련한 언론플레이에 의해 다른 논란까지 덧붙여지면서 수많은 의혹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강 의원과 친분이 있는 국회의원이 그를 두둔하기 위해 ‘할아버지가 귀여운 손녀 같아 엉덩이 몇 번 두들긴 게 뭐가 그렇게 잘못인가? 우리 손녀는 궁디팡팡을 너무 좋아해서 내가 가면 엉덩이부터 내민다’라고 했다가 국민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이제 국회의원이 지나가면 대한민국 여성들은 하는 일을 멈추고 엉덩이를 내밀어야 한다’, ‘초야권도 아니고 누가 국회의원에게 미성년자 엉덩이를 만질 수 있는 권리를 줬나?’라는 식의 격앙된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져 경찰에 출두한 가해자가 특별대우를 받으며 조사 같지 않은 조사만 받고 풀려났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시민단체들은 더는 좌시할 수 없다며 강 의원에 대한 규탄 시위를 시작했다.
여당과 정부는 포털사이트 등을 압박해 어떻게든 논란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차지훈 팀장과 팀원들의 신속한 대응에 속수무책으로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했다.
얼마 전 온라인 강의 서비스 강화 등의 목적으로 500억 원을 들여 서버를 강화했던 것도 여론몰이에 큰 힘이 되어줬다.
기사를 삭제해도 막강한 서버를 바탕으로 조회 수 조작 등을 하며 끊임없이 각종 사이트의 메인에 올렸고, 기사를 보고 분개한 네티즌이 가세해 개인 블로그나 SNS 등을 통해 퍼 나르며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져갔다.
강 의원의 미성년자 성추행 소식과 잇따라 터진 각종 비리 의혹으로 대한민국 전체가 들썩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온갖 루머를 만들어 스칼라를 괴롭히던 악플러들은 강 의원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그들은 비난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지 그게 꼭 스칼라일 필요는 없었다.
이미 받은 상처는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으로써는 사건이 더는 커지지 않고 이 정도에서 마무리된 것만 해도 정말 다행이었다.
스칼라에 대한 대중들의 비난이 일단락되었다고 해도, 건우는 그냥 ‘다행이다’라며 손 놓고 있지 않았다.
각종 루머를 퍼트린 언론사와 악플러들을 상대로 천문학적인 금액의 소송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다.
과거에도 선처 없이 단호하게 처벌한 이력이 있음에도, 여러 가지 사회활동으로 선한 이미지만 쌓았던 것이 이런 문제를 불러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욱 강력하게 대응하리라 다짐했다. 장만복 회장이 이미지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악플러에 대한 단호한 대처는 국민들 대부분이 지지하는 일이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문제의 언론사와 악플러에 대한 뒷조사도 지시해놓았다.
만약 그들이 역으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면 조사한 내용들을 풀어 다시는 억울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놓을 계획이었다.
***
“그동안 힘들었지? 미안해. 찾아가지도 못하고.”
대중들의 모든 관심이 강 의원에게 향하자, 스칼라와 옐로우 레이디는 그제야 겨우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건우는 위상백 사장에게 ‘늪 매니지먼트’에 대한 모든 권리를 넘겨받고, 사태를 진정시키고 나서 비로소 스칼라를 만났다.
“네가 왜 미안해. 나 때문에 곤욕을 치른 건 너였는데. 그때 우리가 만났으면 기자들이 또 난리 쳤을걸? 연예인이랑 친해지면 이런 게 안 좋은 것 같아. 그치?”
4차원 같은 엉뚱한 모습을 종종 보여도 건우에 대한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자신보다 건우를 먼저 생각할 만큼 스칼라는 여전히 애틋했다.
“에이, 그건 아니다. 넌 잘 못 느끼나 본데, 나도 유명인이야. 우리나라에서는 너보다 내가 더 유명해, 이거 왜 이래.”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스칼라 앞에서 건우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하긴. 네가 좀 인기가 많긴 하더라. 너랑 공익광고 같이 찍었다니까 얼굴만 서로 알고 지내던 여자 연예인들이 소개 좀 해달라고 어찌나 조르던지.”
“뭐어? 그런 일이 있었어? 예뻤어? 그럼 소개 좀 해주지 그랬어?”
“그럴 걸 그랬나? 그중에는 얼굴이 엄청 예쁜 영화배우도 있었거든. 몸매는 몰라도 얼굴은 나보다 백배는 예쁜 친군데. 마음씨도 착하고 나와 달리 학창시절에도 열심히 공부만 해서 절대 나쁜 루머 같은 건 돌 사람이 아니야.”
“야! 복실이. 너답지 않게 갑자기 왜 그래?”
언제나 활기차고 에너지 넘쳤던 스칼라. 그런데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자조 섞인 푸념에 당황한 듯 물었다.
“나다운 게 어떤 걸까?”
“너다운 게 너다운 거지. 밝고, 명랑하고, 활발하고.”
“그게 정말 나다운 걸까? 사람들이 그래.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고. 그리고 네티즌들은 그러더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인데도 그럴 줄 알았대. 그게 나다운 거래.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안 난다더라. 공부 열심히 안 하고 수업 땡땡이친 적은 있어도 친구들 괴롭히거나 돈을 빼앗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낙태? 임신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애를 지워? 그런 것들이 어떻게 나다운 게 되지?”
큰 상처를 입은 듯 넋두리를 하는 스칼라의 모습에 건우는 그냥 조용히 다가가 안아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래. 넌 정말 착하고 예뻐.”
“성형 중독은 아니지만, 성형 수술은 한 건 사실이야. 그래도 걸레처럼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다니지 않았어.”
“쉿. 그만해. 사람들이 떠드는 말 전부 그냥 악의에 찬 한심한 인간들이 내뱉는 쓰레기 같은 이야기라는 거 너도 알잖아. 그런 것들 때문에 상처받지 마. 그냥 네가 너무 예뻐서 사람들이 질투하는 거야.”
“내가 예뻐?”
“그럼 예쁘지.”
“나 좋아해?”
“그럼 좋아하지.”
여자로 잘 모르겠지만 친구로서 스칼라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와아. 최건우가 웬일이래. 좋아한다는 말을 다하고.”
“사실인걸, 뭐.”
“그래, 여자가 아니라 친구로서 나를 좋아하긴 했겠지. 내 마음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게 되게 서운했는데 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니까 되게 설렌다. 조금 마음이 아파도 루머에 시달릴만하네. 호호호.”
“좋아할 것도 많다.”
“당연히 좋지. 지금까지 아팠던 게 싹 다 날아갈 정도로 좋아. 항상 고민했거든 나만 안달이고, 나만 널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내가 널 좋아하지 않았으면 친구로 만나지도 않았을 거야.”
“그거야 모르지. 연인 사이가 되는 건 싫고, 나랑 자고는 싶고. 그래서 친구로 맴도는 걸 수도.”
스칼라가 보기에 건우는 참 모를 친구였다.
결혼하자는 것도 아닌데 꼭 확신이 필요할까? 두 사람은 아직 20대 초반이다. 마음 가면 사귀고 아니면 헤어지면 그만인. 그런데 건우는 생각이 너무 많아 보였다.
좋게 말하면 너무 신중했고, 나쁘게 말하면 너무 우유부단했다.
“뭐어? 그건 좀 말이 안 된다. 그러려고 마음먹었으면, 꼭 너 아니라도 여자는 많았거든.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그동안 나랑 어떻게 해보려고 유혹하는 여자들 되게 많았어. 너도 아까 그랬잖아. 엄청 예쁜 연예인이 나 소개해달라고 그랬다며. 나, 그런 남자야.”
“호호호. 그래. 그건 맞아. 아무리 예쁜 여자가 유혹해도 눈 하나 깜빡 안 하던 너였는데, 그래도 나는 친구라고 같이 놀아줘서 되게 좋았어. 넌 싫은 건 잘 못 하잖아. 그래서 너도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 그냥 그게 너의 속도고, 느린 거라고 생각했어. 기다리면 언젠간 될 거라고.”
스칼라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말이 꼭, 이젠 안 그럴 것처럼 이야기한다? 서운해지려고 그래. 나 너 싫지 않아. 매력적이고 예뻐. 지금은 누군가와 연애를 할 여유가 없을 뿐이야.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고 돌봐야 할 동생들이 있고 초이스 에듀도 정상궤도에 올려야 해.”
“넌 참 영감처럼 말을 한다. 고작 22살인 주제에.”
“맞아. 내가 좀 애늙은이야. 네 말처럼 그래서 연애감정도 다른 사람과 달리 속도가 느려. 그리고….”
“건우야.”
“응?”
“부탁이 있어. 나 한 번만 안아 줄래?”
“그게 뭐 어렵다고 부탁까지 해.”
스칼라의 부탁을 들은 건우는 그녀를 천천히 껴안았다. 건우의 품에 안긴 스칼라는 가슴에 얼굴을 대고 천천히 체온을 느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위로가 되는 걸 느꼈다. 역시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는 가슴이 따뜻했다.
“고마워”
“뭐가?”
“이것저것 전부 다.”
“고마울 게 뭐 있어. 우린 친구인데.”
“그러네. 우린 친구지. 그래도 고마워. 넌 정말 좋은 남자 같아. 절대 널 못 잊을 거야.”
“꼭 다시는 안 볼 것처럼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그래 맞아. 우리 이제 친구로서도 만나지 말자.”
건우의 표정이 굳었다.
“뭐? 금실아. 갑자기 왜 그래?”
“연예인이라는 게 참 허망한 것 같아. 자그마치 10년이야. 10년 동안 정말 피땀 흘려가며 연습해서 이 자리에 올랐어. 그런데 내려가는 건 한순간이더라. 나도 처음에는 연애할 수 있지, 쿨하지 못하게 그거 가지고 그러나 어이가 없었어. 그런데 어떡해. 그게 현실인걸.”
“힘들었다는 건 알아. 하지만 이제 금방 괜찮아질 거야.”
“나 혼자라면 그동안 고생했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계속 너를 만났을지도 몰라. 건우 넌 그만큼 멋지고 사랑스러운 남자니까. 천천히 내게 올 때까지 기다려보고 싶어.”
“그럼 그렇게 하면 되잖아.”
“그런데 나 좋자고 동생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잖아. 웃긴 게 뭔지 알아?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나를 보며 어떤 원망도 하지 않아. 그 아이들이 너무 착해. 그게 더 미안해서 미칠 것 같아. 사장이 미쳐 날뛰는데도 날 위해 나서준 애들이야. 난 절대 걔들 포기 못 해. 이미 늦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부터는 남자고 뭐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동생들을 위해 살 거야.”
스칼라의 왼쪽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 내렸다.
“동생들을 위해 산다고? 그럼 네 삶은?”
“그러는 넌? 너도 동생을 위해 살고 있잖아.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아니지. 내 꿈은 반짝반짝 빛나는 가수가 되는 거였으니, 원래 꿈을 찾아가는 거야. 그러니까 건우야. 제발 나 흔들지 말아줘. 지금도 어렵게 말하는 거야. 나도 널 놓치기 싫어.”
“그런데?”
최근 들어서야 그녀의 지극한 마음을 알고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던 건우였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네가 얼마나 대단한 남자인지 깨달았어. 난 그냥 너를 인기 많은 연예인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예전에 김현아 선수 기억해?”
“알지. 왜 몰라.”
“김현아 선수 남자 친구가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거 봤지? 물론 그 남자가 잘했다는 건 아냐. 그런데 일반인과 사귀었다면 그냥 조용히 끝날 수도 있는 일을, 김현아의 연인이라는 이유로 과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건 사실이야. 말하자면 온 국민이 시누이이며 시어머니인 셈이야. 난 자신 없어. 널 정말 좋아하지만, 너와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며 끊임없이 손가락질 받으며 살 자신이 없어. 그러니 건우야. 우리 그냥 멀리서 서로를 응원만 하자. 친구로서.”
스칼라의 말에 건우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자신이 부담스럽다며 저렇게 애절하게 말하는데 더는 뭐라고 설득하기도 어려웠다.
“친구로서?”
“그래. 오늘 정말 고마웠어. 네게 좋아한다는 말도 듣고, 평소보다 훨씬 다정하게 대해줬던 너의 행동도 내게는 모두 소중한 추억이 될 거야.”
“하나만 물어보자.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새로운 사장님에게 잘 보여봐야지. 인성 좋기로 소문난 분이야. 능력도 있다고 들었어. 마케팅 쪽이 약하다고 하는데 그건 따로 전문가가 있대. 너도 알겠지만 사장이 바뀌고 우리 회사가 완전히 달라졌어. 무려 이청수야. 이청수가 우리 회사 동료라고. 그런 능력이면 우리도 재기할 수 있을 거야. 난 믿어.”
스칼라는 있는 힘껏 웃음을 지었다.
지금 회사를 인수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건우는 아직 스칼라에게 말하지 않았다. 일부러 속인 건 아니고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얼굴을 보니 앞으로도 사실대로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겉으로만 좋은 사람일 수 있잖아.”
“알아. 난 이제 예전의 순진한 스칼라가 아니거든. 정 안 되면 누드 화보 찍지 뭐. 재기만 할 수 있다면 그것도 어렵지 않아. 지금 내 심정으로는 몸을 파는 게 아니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악으로 깡으로 버틸 거야. 그리고 건우야.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무슨 부탁?”
“장만복 회장님이랑 친하지?”
“응. 나를 많이 도와주신 고마운 분이야.”
“그분에게 말씀드려서 우리 좀 잘 부탁드린다고 이야기해주면 안 될까? 목숨을 걸고 열심히 할 테니까 한 번만 믿고 제대로 밀어달라고. 응?”
못할 게 뭔가. 애초에 스칼라와 옐로우 레이디를 위해 인수한 회사다.
“그것만 하면 돼? 원한다면 다른 것도 도와줄 수 있어.”
“아니. 그거면 돼. 난, 나와 우리 애들을 믿거든. 이청수를 스카우트할 정도로 힘 있는 분이 밀어주신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어.”
“그래. 그럼 내가 꼭 도와달라고 말씀드릴게. 내 말이라면 들어주실 거야.”
“고마워, 건우야.”
“정말 괜찮겠어?”
“물론이야. 네게서 평생 쓰고 남을 만큼의 에너지 충전을 받았더니 갑자기 없던 의욕이 생겨. 그러니 나 걱정하지 마. 이래 봬도 이 바닥에서 10년 넘게 굴러먹었어. 똥인지 된장인지는 안다고. 그럼 나, 가볼게.”
스칼라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건우의 뺨에 키스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건우는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뺨에 손으로 가져다 대며 묵묵히 뒷모습만 지켜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