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44화 (144/256)

제144화

“야! 복실아. 너 오늘 많이 취한 것 같다. 이제 그만 마셔라.”

잔뜩 힘을 주고 나왔는데 건우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스칼라는 크게 상심했다.

그렇다고 건우에게 짜증을 낼 수도 없었다. 그저 술에게 화풀이하듯 열심히 술잔만 기울였다.

“야! 최건우. 너 자꾸 복실이, 금실이, 이렇게 부를래?”

“네 이름이 복금실인데 그럼 뭐라고 불러?”

“스칼라라니까. ‘스카’나 ‘칼라’라고 불러주면 안 될까? 가끔은 정말 우리 아버지가 원망스럽다니까. 그렇지 않아도 흔하지 않은 성인데, 거기다 촌스럽게 금실은 대체 뭐냐고!”

“뭐가 어때서 그래. ‘복금실.’ 얼마나 정겨운 이름인데. 그 정체불명의 이상한 이름인 스칼라보다 훨씬 낫다. 너 그런데 스칼라가 무슨 뜻인지는 알고 그렇게 지은 거야? 설마하니 수학 벡터에 나오는 스칼라를 알고 있을 리는 없고.”

“응? 수학에 벡터가 나와? 그건 뭐하는 건데? 벡터맨은 아는데.”

“어휴. 말을 말자. 그걸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

“어, 너 나 무시해? 우리가 간다! 지구용사 백터맨! 우흐흐흐.”

“복금실! 헛소리 그만하고 이제 그만 일어나자. 너 여기서 더 취했다간 업고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건우의 말은 이미 늦었다.

벡터맨 흉내를 내던 스칼라는 갑자기 실 끊어진 인형처럼 테이블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얀마! 야! 복금실. 정신 차려. 너 여기서 쓰러지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어휴 이 자식이 정말!”

아무리 깨워도 스칼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건우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업고 술집을 빠져나와야 했다.

***

똑똑똑.

조용한 사무실의 정적을 깨트리는 다급한 노크 소리에 박유하 이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침 일찍 출근해 업무 시작인 9시 전까지는 오롯이 개인적인 시간으로 사용한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왔다는 것은 뭔가 중요하게 전할 이야기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네.”

그는 찌푸렸던 얼굴을 펴고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문이 열리자 보안실 성윤기 실장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사님. 이 시간에 찾아오는 걸 싫어하시는 건 알지만, 빨리 보고를 해야 할 내용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아닙니다. 급한 일이면 당연히 그럴 수 있죠. 그래 무슨 일입니까?”

“혹시 옐로우 레이디라는 아이돌 그룹에 대해서 아십니까?”

“흠. 아이돌 그룹이요? 제가 아는 마지막 아이돌 그룹이 핑클과 S.E.S입니다.”

박유하 이사는 아이돌 그룹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핑클과 S.E.S도 학창 시절 친구들이 워낙 자주 이야기를 꺼내서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지금 옐로우 레이디라는 여성 아이돌 그룹은 핑클이나 S.E.S와 비견될 정도로 선풍적 인기몰이를 하는 중입니다. 특히 그룹의 리더인 스칼라는 과거 핑클의 이효리를 능가하는 섹시미로 대중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스칼라라고요? 인기가 있을만하군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아 보이네요.”

박유하 이사는 성윤기 실장의 설명에 컴퓨터로 ‘스칼라’를 검색한 후 그녀에 대해 간단한 평을 했다.

딱히 관심이 없었지만 성윤기 실장이 아무 이유도 없이 그녀를 언급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신이 빚은 바디라고 불릴 만큼 예술적인 몸매를 자랑합니다. 외모가 뛰어난 데다가 노래까지 잘하다 보니 특히 남자 팬층이 굉장히 두텁습니다. 얼마 전에는 성형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했는데도 털털하고 솔직한 성격이 좋다며 오히려 인기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요?”

“최건우 대표가 방금 말한 스칼라와 사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조금은 시큰둥하게 이야기를 듣던 박유하 이사의 표정이 금세 달라졌다.

“100% 확실하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손을 잡거나 키스를 나누는 모습을 찍은 사진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최근 들어 두 사람의 만남이 굉장히 잦아졌습니다. 밤늦게 나란히 차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도 몇 차례 포착되었고, 가벼운 터치 정도는 스스럼없이 나누는 장면도 목격되었습니다.”

“인기 연예인이라면서요? 미치지 않은 이상 공개된 장소에서 키스를 나누진 않겠죠. 그런데 두 사람은 어쩌다가 친해진 겁니까?”

“예전에 소아암 어린이 돕기 위한 공익광고를 함께 촬영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광고를 함께 찍으며 친해진 것 같습니다. 알아본 바로는 당시 스칼라가 최건우 대표를 노골적으로 호감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쯧쯧. 최고의 인기 아이돌이라고 하더니 역시나 더럽게 노는군요. 하여간 분칠한 것들 어디서나 하는 짓이 똑같아요. 천박하기 그지없고, 아무에게나 쉽게 몸을 허락하는 지조 없는 것들이죠.”

“좀 그런 경향이 있긴 하죠.”

과한 독설에 성윤기 실장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최건우 그놈을 제가 너무 과대평가했나 봅니다. 깁스라도 한 것처럼 고상한 척 목에 힘주고 다니더니 기껏 만나는 여자가 그런 천박한 연예인이라니. 그래서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있습니까? 첫 만남부터 그렇게 뜨거웠다면 이미 깊은 사이가 되었을 것 같은데요.”

“최근 최건우 대표가 자신이 사는 펜트하우스 아래층에 있는 아파트를 샀습니다. 그 이후로 스칼라가 운전하는 자동차가 그곳 지하주차장에 자주 방문했고요.”

“그것참 용의주도하군요. 동생들이 있는데 집에는 데려갔을 리가 없고. 호텔이나 다른 곳을 이용하기에는 주변 눈이 너무 의식되고. 사는 아파트 같은 통로에 집을 하나 사서 거길 밀회 장소로 이용한다? 정말이지 등하불명(燈下不明)이 따로 없군요. 거기 아파트 시세가 대략 얼마쯤 합니까?”

교육 타운 등 미래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계획들을 은밀히 진행하기 위해 동생들이 드나들지 않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한 것이지만, 두 사람이 그 사정까지 알 길은 없었다.

“50평 아파트이고 평당 3,000만 원 선에서 거래되고 있으니, 대략 15억 원 정도 할 겁니다.”

“휘유. 엄청나군요. 고작 여자와 밀회를 나누기 위해 15억 원을 들인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재벌가 망나니들이 하는 짓과 별반 다를 게 없네요. 어려운 사람을 돕는 천사는 무슨. 사람들이 최건우의 그런 가식적인 모습을 알아야 할 텐데 말이죠. 섹스 비디오라도 몰래 촬영해서 유포해버리면 완벽하게 몰락시킬 수 있는데, 아무래도 그건 어렵겠죠?”

“네. 아파트 단지 자체가 사생활 보호가 잘 되어 있는 편인 데다가 맞은편 아파트까지 초이스 에듀 이름으로 사놓아서 접근 자체가 완전히 원천봉쇄 되었습니다. 남자들 몇 명이 드나드는데 초이스 에듀 관리팀 소속이었습니다.”

“그렇겠죠. 무슨 생각으로 여자 연예인을 만나나 했더니, 역시나 완벽하게 대비하고 있었군요.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틈이 없네요. 틈이 있어야 파고들 여지가 있을 텐데.”

“그런데 어젯밤 재미있는 모습이 찍혔습니다.”

“재미있는 모습이요?”

“네. 여길 한 번 보시죠.”

성윤기 실장은 가지고 온 봉투에서 사진 몇 장을 꺼내 박유하 이사에게 보여줬다.

첫 번째 사진은 스칼라가 흰색 원피스로 한껏 멋을 낸 모습이 찍혀있었다.

“흠. 확실히 몸매가 좋긴 좋군요. 이렇게 붙는 스타일의 흰색 원피스는 웬만해서는 소화하기 어려운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걸 왜 보여주는 겁니까?”

“다음 사진을 보십시오. 최건우가 흰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를 업고 나가는 모습입니다. 등에 얼굴이 가려서 정확히 나오진 않았지만 동일한 원피스인 걸 보면 스칼라 아니겠습니까?”

“그렇군요. 같은 날 같은 장소에 같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두 명일 확률은 희박하니.”

“그리고 이건 최건우의 차가 아파트로 들어가는 사진, 이건 다음날 스칼라가 헐렁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오는 사진입니다. 이것만 봐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감이 오지 않습니까?”

“결정적인 사진이 있으면 좋은데 정황증거밖에 없는 게 아쉽네요. 최건우처럼 용의주도한 놈이 실수하기를 기다리는 건 감나무 아래에서 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과 다를 바 없고, 그렇다고 그냥 덮어두기에는 너무 아깝군요. 어쩐다. 어쩐다. 흠.”

“두 사람이 가볍게 스킨십을 나누는 사진이 있으니 그것과 같이 엮는 건 어떻습니까?”

“어떤 사진이죠?”

“그리 쓸모 있는 사진은 아닙니다. 그냥 가볍게 머리 위에 손을 올리는 장면이 전부니까요. 그래도 잘 엮으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는 될 수 있습니다.”

성윤기 실장은 준비해둔 사진 몇 장을 찾아 책상에 올려놓으며 눈빛을 반짝였다.

“아닙니다. 그걸로는 약해요. 미성년자도 아니고 성인 젊은 남녀가 사귀고 하룻밤을 보냈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조금 시끄럽겠지만 금방 사그라질 겁니다. 이걸로 이야기를 꼬아보는 건 어떻습니까?”

“어떻게요?”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여자를 남자가 자기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다음날 자기 옷이 아니라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왔습니다. 무슨 상상이 듭니까?”

“둘이 하룻밤을 보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건 이야깃거리가 안 됩니다. 좀 더 자극적인 기사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분노할 수 있는.”

박유하 이사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살짝 위로 말려 올라갔다.

“설마 성폭행으로 몰아가자는 말씀이십니까? 확실한 증거도 없이 그렇게 몰아가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초이스 에듀 측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스칼라라는 여자가 스스로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백한다면요?”

“그럼 좋겠지만 한참 잘나가는 여자 아이돌이 그런 걸 스스로 밝힐까요? 실제로 성폭행을 당했다고 소속사에서 쉬쉬할 겁니다.”

“그럼 소속사를 움직이면 되겠군요. 우리 뒤에 누가 있는지 잊으신 건 아니죠? 와룡 그룹의 힘이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돈으로 움직일 수 없는 건 없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가능합니다.”

“채찍을 사용하려면 스칼라가 소속된 소속사 사장의 약점을 찾아봐야겠군요. 그렇죠?”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소속사 사장 조사를 시작하겠습니다.”

***

위상백은 늪 매니지먼트 사장이다.

요즘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실 날이 없다.

바로 옐로우 레이디의 폭발적인 인기 덕분이다.

소속사 가수들의 연이은 실패로 위기에 큰 위기에 처했었지만, 예상치 못한 옐로우 레이디의 성공에 기사회생했다.

큼지막한 CF도 들어오고 있는 만큼, 이대로 인기가 계속된다면 돈방석에 앉을 날도 머지않았다.

Rrrr

“네. 늪 매니지먼트입니다.”

- 여기 와룡그룹입니다.

“네? 아… 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그런데 다짜고짜 와룡그룹이란다.

장난전화 같아서 끊으려다가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네? 와룡그룹에서 무슨 일로요?”

- 만나보시면 압니다. 좋은 일일 수도 있고, 안 좋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자신감 넘치는 말투가 영 마음에 걸렸다.

설마 스폰서 제의라도 하려는 건가?

생각해보면 그것도 나쁘진 않다. 지금 이대로도 좋지만 와룡그룹 뒷배가 생긴다면 금상첨화다.

그런 일은 리더인 스칼라나 막내인 은아가 잘 어울린다.

속으로 계산을 끝낸 위상백은 짐짓 여유를 부리며 통화를 이어갔다.

“무슨 일이시죠? 제가 좀 바쁩니다만.”

- 지금 이렇게 여유 부리시면 나중에 후회할 텐데요. 괜찮으십니까?

“지금 협박하십니까? 아무리 와룡그룹이라고 해도 이렇게 다짜고짜 협박하면 곤란합니다.”

- 그럼 전화 끊으시던가요.

“네?”

- 후회 안 할 자신 있으면 전화 끊으라고 이 양반아. 귓구멍이 막혔나?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뭐라고? 미친 새끼. 너 이 자식 뭐야? 너 와룡그룹 아니지? 미친놈이 어디서 구라를 까고 있어! 아가야. 그렇게 멋모르고 장난전화를 하다가 손모가지 잘리는 수가 있다.”

- 새끼. 상황 파악 못 하고 센 척하기는. 어이. 위상백. 너 작년 8월에 홍콩 관광 갔다가 마카오 들렀지? 거기 카지노 가서 10억이나 날렸다면서? 그 돈 어디서 났을까?

“너 누구야?”

- 와룡그룹이라니까.

“원하는 게 뭐야, 이 자식아!”

- 그리고 3년 전에 자살한 당신 소속사 가수 이영희. 사실은 당신이 성폭행해서 자살한 거잖아. 컴백 실패로 우울증에 걸려서 자살했다고 언론에 약을 쳤다고 그 비밀이 영원히 감춰질 줄 알았어?

“뭐? 헛소리하지 마! 그런 개소리는 누구한테 들었어?”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지만 상대는 태연자약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뭔가 잘못 걸린 느낌이다. 이젠 전화를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게 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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