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그런데 카푸르 회장. 보고서를 보면 그는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의대를 다니다 중퇴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어떻게 다른 과목의 커리큘럼까지 만들 수 있단 말이오? 다른 것도 아니고 교과서요. 생물이야 이해를 하겠다는데, 다른 과목까지 해당 교수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고 하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아서 말이오.”
“저도 처음에는 머레이 이사님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재조사를 지시해도 의심할 구석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빌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천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협상 중이라면 우리가 나서서 지원해줄 경우 일이 더욱 빨리 진행되겠구려.”
“네, 그렇습니다. 아직은 교수들의 반응뿐이지만, 그들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과학과 수학 부문 교과서는 어쩔 수 없이 앨런 초이가 만든 커리큘럼을 선택하게 될 거라고 합니다. 아니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확언하더군요.”
“그것참. 직접 듣고도 이렇게 믿어지지가 않으니. 우리 미국이 그의 커리큘럼을 선택한다는 것은 곧 전 세계가 우리와 같은 선택을 한다는 이야기 아니오. 그런 인재라면 미국에 오게 해서 함께 일하는 것은 어떻소. 우리가 지원해준다면 훨씬 위대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지 않소?”
“동생들을 돌봐야 해서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합니다. 막내 여동생이 지금 10살(한국 나이로 12살)인데 그녀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한국에 계속 머무르겠다고 합니다.”
가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건 건우의 핑계였다.
막내를 제외한다면 두 남동생은 다니는 학교에서는 내로라하는 수재들. 미국에서 공부한다고 해도 크게 어려움을 겪을 일은 없다.
은우 또한 건우의 신념 때문에 공부에 관심이 없어도 영어는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런데도 마이크로소프트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이 학원 강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 시작했던 기부활동에 큰 보람과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건우로서는 무책임하게 미국행을 선택할 수 없었다.
“굉장히 가정적인가 보구려. 나이도 어린데 정말 대단하군. 우리 아들은 앨런 초이보다 나이도 많은데 아직도 술 마시며 말썽만 피우고 다니는데. 에잉.”
“그게 어디 마이클 이사님만 그러겠습니까? 대부분 부모가 같은 마음이죠. 일단 앨런 초이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은 충분히 이해가 가오. 그만한 천재는 분명 세상에 큰 영향을 주게 될 거요. 그런데 말이오, 회장. 시장성 조사는 제대로 해보셨소? 교육 분야라는 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결정하기가 어렵구려.”
“구체적인 수치까지 예측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대략적인 내용만 봐도 엄청나더군요. 말씀드리기 전에 이사님들이 먼저 이해하셔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교육에 있어서 우리 때와 지금의 미국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공부를 포기한 부류야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공부에 관심이 많은 가정은 우리 때와는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로 극성스러워졌습니다. 솔직히 우린 알아서 잘하라는 분위기였지 지나치게 간섭하고 그러진 않았지요.”
“그건 그렇지. 교육열 하면 동북아시아 쪽이 최고였는데, 요즘 우리 미국도 중산층 이상의 경우는 분위기가 그들과 닮아간다는 이야기는 들은 것 같소.”
“맞습니다. 교육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 현시점에서, 곧 대세가 될 커리큘럼에 대한 온라인 독점권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오!”
누군가는 이미 이해를 했는지 감탄을 했고, 누군가는 아리송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분을 위해 제가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교과서에 커리큘럼이 실리고, 우리가 적극적으로 로비를 해서 SAT(Scholastic Aptitude Test, 미국의 학습능력 적성 시험)에도 그 내용을 포함하도록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미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명문대를 지망하는 전 세계의 수재들은 당연히 새로운 커리큘럼을 공부해야겠죠.”
“그것까진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그게 어떤 이득을 가져온단 말이오?”
“전 세계 언어로 만든 동영상 강의와 그 내용이 담긴 참고서를 이북으로 만들어 공급한다고 해도 큰 이득이지만 그것을 애플이나 구글이 아니라 우리가 독점적으로 서비스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스마트 OS 분야에서는 두 회사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는 형국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만든 스마트 윈도우를 통해서만 공급하기로 한다면,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우리 프로그램을 구입해야 합니다. 아니면 옛날 방법으로 공부하던가.”
“아! 그런 방법이 있군요. 그리고 그걸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학생이니 어릴 때부터 우리 회사가 만든 스마트 OS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릴 땐 어쩔 수 없이 사용한다고 해도,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바꾸기 힘들겠군요.”
“거기에 스마트 윈도우와 PC 윈도우가 서로 완벽하게 연동된다는 장점까지 있으니 한번 익숙해지면 웬만해서는 바꾸기 어려울 겁니다.”
“네.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애플이나 구글에 밀리는 것은 기술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사람들이 익숙해진 상황에서 굳이 우리 제품을 이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죠. 그런데 우리 제품을 이용할 필요성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겁니다. 바로 앨런 초이의 커리큘럼 온라인 독점권을 통해서 말이죠. 그건 스마트 윈도우 OS 뿐만 아니라 스마트 기기의 판매량도 엄청나게 늘어나게 될 겁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기만 해도 주가는 큰 폭으로 오를 것 같군. 그렇다면 하루빨리 프로젝트를 시작해야겠구려.”
“그래서 오늘 회의를 소집하게 된 겁니다. 앨런 초이 대표의 말에 의하면 계약 조건이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애플이나 구글에도 똑같은 제안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빠른 의사결정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럼 이번 프로젝트 진행에 찬성하시는 분 거수해주십시오.”
사이티 카푸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의에 참석한 이사진들의 손이 일제히 올라갔다.
***
“윽. 짜증 나.”
“뭐야. 또 실패했어?”
“막내오빠는 뭐하러 물어봐. 표정에서 다 보이잖아. 지긋지긋한 변비 짜증나. 이런 얼굴인데 뭘. 히히.”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거실로 나오는 동우를 보며 정우와 은우가 한마디씩 했다.
“너희들 조용히 안 해. 가뜩이나 짜증 나는데 너희들까지 시끄럽게 꼭 한마디씩 해야겠어?”
“칫. 작은오빠는 괜히 우리한테 짜증이야. 그러게 평소에 편식하지 말라고 했잖아. 덩치는 꼭 아놀드 슈워제네거처럼 우락부락해서는 어울리지도 않게 변비라니.”
건우가 예전 삶과 지금 삶에서 가장 큰 괴리감을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동생들의 외모 변화였다.
예쁜 얼굴이었으나 통통한 체형과 그늘진 얼굴로 보는 이로 하여금 우울하게 만들었던 은우.
지금은 꾸준한 운동 덕분에 건강한 체형을 가지게 되면서 고작 초등학교 2학년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미인 소리를 듣고 있다.
셋째인 정우도 정말 많이 변했다.
둔해 보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날씬하고 샤프한 귀공자 스타일로 변신했다.
건우 이야기를 할 때는 팔불출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평소에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지내기 때문에 얼음공자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 차가운 모습이 뭐가 그리 좋은지 주변 여학생들에게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누구보다 가장 많이 변한 사람은 단연 동우였다.
188cm의 키에 110kg이 넘는 덩치 덕분에 저팔계나 장비로 불리기도 하고, 심지어 키 큰 북한의 김정일을 닮았다며 놀림을 받기까지 했었다.
그랬던 동우도 정우와 은우처럼 운동을 시작하며 많은 변화가 있었다.
두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살은 빠졌지만 놀림 받는 건 여전하다는 사실이다.
살은 빠졌는데 그 살이 전부 근육으로 변하는 바람에 우락부락한 보디빌더처럼 보이게 됐고, 그때부터 저팔계에서 근돼(근육 돼지)로 별명이 바뀌었다.
“네가 우리 아놀드 형님을 어떻게 알아? 이제 겨우 초딩 주제에”
“내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방에다가 온통 그 할아버지 사진을 도배해놨는데.”
“어허. 할아버지라니. 아놀드 형님에게 어디 그런 망발을.”
“오빠야말로 망발 좀 하지 마. 알아보니 1947년생이더라. 올해로 일흔이야. 일흔. 그런데 형님은 너무하지 않아? 나보고 맨날 초딩이라고 하지 말고 오빠가 철 좀 들어봐. 그리고 근육 운동은 인제 그만 좀 해. 오빠 글 읽어봤는데 솔직히 오빠랑 안 어울리게 정말 좋거든. 그런데 감수성이 충만한 서정적인 글인데, 그 글을 쓴 사람이 알고 보니 근육 돼지라고 생각해봐. 독자들이 얼마나 실망하겠어.”
“아우. 저 꼬맹이 녀석을 정말. 내가 너랑 실랑이해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끄응. 아이고, 배야.”
“그러게 고기 좀 대강 먹으라니까. 작은오빠는 정말 고기를 너무 좋아해서 큰일이야.”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 어휘력이 놀라울 정도로 늘면서, 은우는 건우보다 더한 잔소리꾼이 되었다.
“야! 고기 그렇게 많이 안 먹거든.”
“무슨! 어제도 학원에서 밥 먹는데 고기만 잔뜩 쌓아서 먹었잖아. 가만 보면 작은오빠는 정말 문제야. 큰 오빠가 좋은 일 하자고 만든 식당에서 좀 점잖게 먹으면 오죽 좋아? 학원 다니는 언니 오빠들이 신기한 듯 쳐다보더라. 어떤 언니는 ‘최건우 선생님이 동생들 밥을 굶기나 봐’라고 비웃기까지 했다니까.”
“아오! 너 저리 가. 이놈이 정말. 자꾸 옆에서 알짱알짱 사람 열 받게 할래?”
“열 받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걱정되어서 하는 소리지. 많이 힘들어?”
“그럼 내가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
“변비가 걸려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힘든지 나야 모르지.”
“엄청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정작 화장실에 가면 안 나와. 처음 한두 번은 모르겠지만 하루 종일 그런 일이 반복되면 정말 미쳐버리는 거지.”
“아하. 그러니까 똥은 마려운데 똥이 안 나와서 죽을 것 같다는 소리네. 정말. 하루 종일 똥 마려운 기분으로 살려면 진짜 힘들겠다.”
“으이그. 말을 해도. 그래. 하루 종울 똥 마려워 미치겠으니까 넌 그만 좀 하고 가라. 응?”
동우가 아무리 짜증을 내도 은우는 꿈쩍도 안 했다.
“변비엔 우유가 좋다던데. 아까 보니 냉장고에 우유 있더라. 그거 먹어 보던가.”
“그래? 변비에 우유가 좋아? 그거 확실한 거야?”
“아마도? 아니라도 뱃속에 뭔가를 집어넣으면 결국 밀려서라도 나오지 않을까?”
“그런가? 아! 몰라. 일단 먹어보자.”
은우의 말에 혹한 동우는 주방으로 달려가 냉장고를 열고 우유를 벌컥벌컥 마셨다.
“컥컥. 이게 뭐야. 야! 최은우. 이 우유 뭐야. 뭔데 우유에 건더기가 다 있어. 크윽. 이게 무슨 냄새야. 에이. 상했잖아. 너 설마 유통기한 지난 우유를 나보고 먹으라고 한 거야?”
“유…유통기한 지난 우유였어?”
“너, 정말 죽어볼래?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상한 우유를 먹으라고 할 수 있어? 네가 내 동생 맞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그런데 상한 우유면 더 좋은 거 아냐? 먹고 설사하면 변비는 없어지는 거잖아.”
“너 오늘 나한테… 윽. 배 아프다. 으…!”
은우에게 화를 내려던 동우는 갑자기 아파오는 아랫배를 부여잡고 혼비백산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봐. 효과가 벌써 나타나잖아. 변비 해결되면 전부 내 덕분이라는 거 알아야 해.”
동우는 은우의 장난에 변비는 해결했지만, 심한 복통과 설사로 며칠 동안 계속 화장실을 들락날락해야 했다.
***
“어서 오십시오. 지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최 대표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덕분에 잘 지내지는 못했습니다.”
“네?”
“하하하. 대표님이 던져주신 숙제를 해결하느라 너무나도 바쁜 시간을 보냈거든요.”
약속한 시간이 흐른 후 건우의 데이빗 송 지사장은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고민이 많으셨나 봅니다.”
“저도 저지만 본사 경영진에서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여러 의견이 오고 갔지만 대표님이 제안하신 의견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충분한 미래 성장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빌 게이츠 회장님까지 각별한 관심을 가졌고, 최종 회의에도 참석하셨습니다. 그만큼 회사 내부에서도 큰 이슈가 되고 있다는 의미죠. 그분이 그러더군요. 대표님과 꼭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요.”
“빌 게이츠 회장님이요? 정말 그분이 저랑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하셨다고요? 아! 그건 정말 영광스러운 일인데요. 기회가 된다면 저도 꼭 그러고 싶습니다.”
여전히 세계 최고의 부자 중 한 명. 하지만 다른 부자들과 달리 가지고 있는 재산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해서 수많은 사람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사람이 빌 게이츠다.
맨손으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는 것도 대단한데, 그렇게 모은 재산을 다시 사회에 환원한다는 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어떤 기업이었던 간에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했다.
“우리와 계약을 하게 되면 당연히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런 큰 계약을 제가 대표로 할 수는 없으니까요. 미국에 가시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도 그렇군요. 계약 금액만 생각해도 보통 계약이 아니니 한국에서는 어렵겠죠? 음. 매일같이 수업이 잡혀있어서 시간 내는 게 쉽진 않을 것 같은데….”
수조 원대의 계약이 걸려있는데 학원 수업이 걱정이라며 엄살을 부리는 건우. 그만큼 이번 계약이 자신이 있다는 또 다른 표현이었다.
“원하신다면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수업을 하실 수 있도록 미국 현지에 준비해놓겠습니다. 그리고 대표님을 위해 본사에서 특별히 전용기를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미국에 체류하시는 동안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겠다고 연락이 왔으니, 꼭 계약하지 않더라도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하하하. 전용기를 타고 미국까지 갔는데 계약을 안 하고 올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우선 지사장님이 가지고 오신 계약 조건을 듣고 싶군요.”
“우선 초이스 애플리케이션 인수 조건은 대표님이 말씀하신 대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0.5%, 약 20억 달러 가치의 주식을 양도하겠습니다. 대신 대표님이 분할 상환하겠다고 한 10억 달러는, 가칭 MS Choice의 계약금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대표님과 마이크로소프트가 동업해서 만들 회사에 대한 60%의 지분을 우리가 가지는 조건으로 10억 달러의 주식을 무상으로 지급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대표님은 우리 회사의 지분 중 0.5%를 보유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마이크로소프트 이사 자격을 얻게 됩니다.”
계약금만 1조 원이다.
전용기를 제공하겠다는 말에도 놀랐는데 계약금으로 10억 달러를 지급하겠다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엄청난 배포에 건우는 혀를 내둘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