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박 이사님의 망상이 아니었으면 좋겠군요.”
“지금 우리 세계교육이 여론의 역풍을 맞고 있는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아니죠. 세계교육과 박 이사님이 너무 무리수를 둔 탓이 아닙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최건우가 운영하는 정보조직이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겁니다.”
“네? 정보조직이요? 저기 박 이사님. 충격을 받더니 정신이 어떻게 된 것 아닙니까? 학원을 운영하면서 무슨 정보조직까지 운영한다고 그러십니까? 말이 될 법한 소리를 하십시오.”
박유하 이사의 말에 나성천 대표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타박을 놓았다.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온라인과 스마트 시장이 성장하면서 학원 사업은 고부가가치 사업으로 변했습니다. 통계청 조사로 15조 원이 넘었고, 민간 자료 조사에 의하면 30조 원 규모라고 합니다. 이런 황금알을 낳는 사업에 정보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계속 해보세요.”
“저도 이미 정보조직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옆에 있는 정도식 실장이 바로 제가 운영하는 정보조직의 수장이고요. 상당한 경력을 자랑하는 능력 있는 사람인데도 초이스 에듀의 정보팀에 말려 일이 이 지경이 된 겁니다. 믿어 주십시오. 명확한 증거는 능력이 부족해서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정황증거는 꽤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잠깐만 시간을 주시면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나 대표님도 저처럼 최건우를 쉽게 보고 사업을 시작하면 정말 큰코다칠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절대 보통 놈이 아닙니다.”
“흐음. 초이스 에듀가 정보조직까지 운영한다?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겼군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저도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겠죠. 좋습니다. 시간을 드릴 테니, 박 이사가 말한 정황 증거라는 거 한 번 가지고 와보세요. 일단 그걸 보고 다시 이야기하죠. 만약 사실이면 저도 본사에 지원요청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자리를 옮기시죠. 정보팀이 있는 사무실은 4층에 있습니다. 자료는 거기 다 있습니다. 가시죠.”
***
“대표님 상황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세계교육과 박유하 이사의 몰락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건우였지만, 차지훈 팀장이 가지고 온 소식은 뜻밖의 이야기였다.
“크레이듀가 개입한 것 같습니다.”
“크레이듀요? 거긴 외국어 전문 학원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영어 교육으로 재미를 보더니 입시학원 시장까지 욕심을 냈던 모양입니다. 발표는 아직 안 났는데 세계교육을 크레이듀가 인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금 전에 크레이듀의 나성천 대표가 세계교육에 방문하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세계교육은 이대로 무너지지 않는 겁니까?”
다른 일이었다면 이렇게 조급하게 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 삶에서 자신을 몰락하게 만든 주범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교육에 대한 건우의 적개심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동안 세계교육에 연속적인 타격을 주며 회생불능의 상태로 몰았던 것도 전부 복수심 때문이었다.
이제 고지가 눈앞인데 예상치 못한 크레이듀가 개입을 해서 세계교육의 몰락을 막았다고 하니 실망이 컸다.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크레이듀는 와룡그룹이 지원하는 사업체입니다. 같은 재벌이라고 해도 세계그룹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와룡그룹이 대형할인점이라면 세계그룹은 슈퍼마켓 수준입니다. 그런 대단한 곳에서 세계교육을 인수했으니 지금까지 받았던 타격은 금방 회복할 겁니다.”
“그럼, 박유하 이사는요.”
진짜 중요한 건 세계교육이 아니라 박유하 이사였다.
“박유하 이사가 세계그룹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라고 해도 친족입니다. 세계그룹이 그냥 몰락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가 제공한 증거에도 박유하 이사가 직접 개입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니 곧 꼬리 자르기가 시작될 겁니다.”
“결국 그렇게 되는군요. 그건 정말 아쉽습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실망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대표님이 박유하 이사에게 이 정도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계셨다면, 저희가 무리해서라도 증거를 찾아낼 걸 그랬습니다.”
건우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데 너무 조바심을 냈다.
생각해보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유리해지는 건 미래를 알고 있는 자신이었다.
“아닙니다. 저한테도 그러더니 절친했던 도훈 선배에게까지 수작을 부린 박 이사가 마음에 안 들었을 뿐입니다. 나쁜 놈이니 언젠가는 잡을 수 있겠죠. 그러니 앞으로도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물론입니다. 대표님이 항상 저희를 걱정해주셔서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거야 당연합니다. 차 팀장님 같은 인재를 어디서 또 구하겠습니다. 저랑 오래 같이 일해주셔야 합니다.”
“하하하.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크레이듀가 입시학원 시장에 뛰어들었다는 건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군요. 지금은 초이스 애플리케이션이 되었지만, 전신이었던 코니 애플리케이션에 수작을 부린 게 크레이듀입니다. 세계교육보다 악질이면 더 악질이지 착하진 않을 겁니다.”
“악질인 데다가 세계교육 정보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능력도 있는 곳입니다. 만약 와룡그룹이 마음먹고 정보팀을 움직인다면 아무리 경험 많은 저라고 해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요? 그럼 정말 큰일 아닌가요?”
“하지만 그럴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와룡그룹이 진행하는 사업이 한두 개가 아닌데 그걸 전부 팽개치고 크레이듀를 지원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는 마십시오.”
와룡그룹이 지원한다고 해서 와룡그룹 전체를 감당해야 하는 건 아니다.
건우와 차지훈 팀장이 싸워야 할 대상은 크레이듀다. 어려운 싸움일 순 있어도 이기기 불가능한 싸움은 아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겠죠. 여우가 떠났다고 좋아했더니 호랑이가 나타난 격이지 않습니까. 크레이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우리 정보팀을 보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인원이나 장비 필요한 것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이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지원해달라고 일부러 대표님을 협박한 것 같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하하하. 협박하신 것 맞습니다. 이젠 잃을 게 많아져서 겁이 납니다. 지금 제가 돕고 있는 어려운 환경의 사람들, 학원에서 일하고 있는 근로장학생들. 그들을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는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널 생각입니다. 저는 차 팀장님만 믿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 믿음에 꼭 부응하겠습니다. 반드시 와룡그룹이 아니라 와룡그룹 할아버지가 와도 밀리지 않을 정보팀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
“뭔가 확실한 증거는 없군요.”
박유하 이사의 설명을 들은 나성천 대표의 말투는 시큰둥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말투와 달리 심각했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에 당황한 듯 보였다.
박유하 이사는 그런 그의 얼굴에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나 대표님이라면 충분히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좋습니다. 박 이사님 말처럼 초이스 에듀가 개입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좋은 정보를 알려줘서 고맙긴 합니다. 덕분에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보가 전부라면 제가 박 이사님과 함께 일해야 할 명분으로는 부족할 것 같군요.”
말은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학원을 말아먹은 놈과 같이 일하기에는 뭔가 찝찝하다. 제대로 된 뭔가를 보여라’라는 의미였다.
그 말을 못 알아들을 박유하 이사가 아니었다. 다행히 나성천 대표의 관심을 끈 것에는 성공했으니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였다.
만약 여기서 자신의 필요성을 어필하지 못한다면, 이대로 폐기처분당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박 이사는 절박했고, 그래서 필사적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 저의 실패는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최건우를 너무 얕잡아 본 것입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놈이 보통 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예전처럼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전 박 이사님의 반성문을 듣고자 시간을 내준 것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최건우에 대한 분노가 너무 커서 말이 길어진 것 같군요. 중요한 것은 그놈이 정말 보통 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최건우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단순히 몇 번의 시행착오만 거치면 그놈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나 대표님이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놈은 점점 더 진화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분명 어리숙한 모습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놀라울 만큼 머리가 좋은 데다가 이젠 손속까지 과감해졌습니다.”
“글쎄요. 저는 박 이사와 생각이 다릅니다. 손속이 과감해졌다고 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자신의 선배가 위기에 처했다고 전 재산을 거는 어리석은 결정을 할 것 같습니까? 남의 일에 그렇게 오지랖 넓게 나서는 사람만큼 상대하기 쉬운 건 없습니다. 박 이사의 실수를 덮기 위해 상대의 능력을 너무 과대 포장하면 곤란합니다.”
나성천 대표는 쉽게 설득되지 않았다.
“만약 그것까지 계산에 넣었다면요.”
“뭐라고요?”
“위기에 처한 선배를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거는 로맨티시스트가 아니라 모든 정보를 조합해서 성폭행 사람이 하도훈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언론플레이를 했다면요?”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말입니다. 이번 일을 통해 최건우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엄청난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던 놈입니다. 그런데 이젠 어려움에 처한 선배를 돕는 의리의 남자라는 새로운 이미지가 추가되었습니다. 이 모든 게 모두 그의 철두철미한 계산속에서 이뤄진 것이라면요?”
“고작 스무 살인데 그렇게까지….”
“이게 처음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놈은 항상 그랬습니다. 뭔가 위기가 닥치면 그 좋은 머리로 해결할 뿐만 아니라 상황을 더 좋게 만들어버립니다. 예전 군 면제문제와 정신과 상담 이력 문제도 그동안의 기부활동이 알려지면서 전 국민이 아는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군인, 소방관, 경찰들을 돕거나 진학상담소를 개설하고 학생들에게 고작 1,000원의 가격으로 식사를 제공하는 일도 결국은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 모든 게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십니까? 최건우의 머릿속에서 계산을 마치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언론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계산된 부분도 있었고 선의도 있었다. 하지만 박유하 이사의 눈에는 건우의 선택 하나하나가 전부 계산된 행동처럼 보였다.
“확실히 운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겠군요.”
“운이라면 정말 지독하게 운이 좋은 놈이죠. 하지만 운이 아니라 실력이라면, 제아무리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나 대표님이라고 해도 상대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박 이사님이 나와 함께 일해야 한다?”
“네. 그것 말고도 최건우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몇 가지 방안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요?”
“지금 초이스 에듀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퓨처 앱은 굉장히 효율적인 교육용 앱입니다. 하지만 만들려고 하면 못 만들 것도 없습니다. 애플리케이션 개발자들을 모아 퓨처앱과 비슷한 앱을 만들도록 한 다음 그 프로그램을 표준 교육앱으로 선정하도록 정부에 압력을 넣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표준 교육앱으로 선정만 된다면 우리나라 모든 학교나 공공 기관은 그 앱을 사용해야겠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나성천 대표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 방법은 이미 자신도 준비하고 있었다.
생각이 비슷하다? 이건 밑에 사람으로 부리기 좋은 장점이다. 처음으로 박유하 이사가 마음에 들었다.
“맞습니다.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모든 학교나 공공기관이 사용한다는 것은 정부가 인정한 프로그램이라는 공신력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에는 국민들도 우리가 만든 교육용 앱을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다른 방안은요? 한 가지가 아니라면서요.”
“그건 저와 함께 일하기로 하시면 그때 말씀드리죠. 아무런 확신도 없는데 제 밑천을 모두 보여드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더 고민해봐야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변수는 최대한 줄이는 게 저로서도 좋습니다. 박 상무님.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제가 박 이사님과 함께 일해도 괜찮겠습니까?”
박준하 상무는 당연히 지금 상황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기분을 여기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미 세계교육을 한 번 말아먹었던 녀석입니다.”
“한 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입니다. 저는 박 이사님의 눈빛이 마음에 드는군요. 간절하면서도 필사적이에요. 저런 사람들은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유야 어찌 되었든 세계교육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박 이사 아니겠습니까?”
“큰 도움이 안 될 것 같지만, 나 대표님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함께 일해야죠. 박 이사. 이번에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하도록 해. 또다시 실수해서 집안 망신시키면 그땐 가만 안 있을 거야.”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나 대표님.”
“별말씀을요.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박 이사. 이제 같이 일해야 하는 입장이니 말은 편하게 해도 되겠지?”
“그럼요.”
반말이 뭔 대수랴. 같이 일만 할 수 있다면 욕을 해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것보다 이렇게라도 생명을 연장해서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게 박유하 이사에겐 중요했다.
똑똑똑.
“네.”
“저….”
“무슨 일입니까?”
두 사람이 함께 일하기로 결정하고 앞으로의 행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세계교육의 정보팀에서 일하던 직원 한 명이 찾아왔다.
그 직원은 세계교육이 이미 크레이듀로 넘어간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금 들어온 소식을 누구에게 보고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저….”
“이미 소식을 들었겠지만 세계교육은 크레이듀가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보고할 일이 생기면 내가 아니라 나성천 대표님에게 먼저 이야기하세요. 아셨습니까?”
“알겠습니다. 대표님. 지금 방금 매우 급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급한 소식이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