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큰 타격을 입은 건 분명하지만 이 정도로 무너질 박유하 이사가 아니었다.
“하나 있긴 했습니다. 하도훈과 직접 연관된 건 아니고 가족 일입니다.”
“가족이요? 누가 사고라도 쳤습니까?”
“원래 하도훈 아버지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원화 가치가 갑자기 떨어져 큰 손해를 봤고, 그 바람에 빚도 제대로 갚지 못하고 회사가 문을 닫았습니다. 채권자들이 사기죄로 고소를 했는데 하도훈이 꼭 갚겠다고 약속해서 지금은 취하됐습니다. 그걸 잘 이용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채권자들에게 돈을 주고 채권을 사 와서 그걸 가지고 사기 쪽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고….”
“됐습니다. 그건 아닌 것 같군요. 너무 약해요. 그리고 만약 문제가 되면 용선재 대표나 최건우가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돈이 썩어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하도훈이 도와달라고 하면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고 도와줄 겁니다. 빚을 갚아줄 사람이 있는데 채권을 가져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 말고는 없습니까?”
“네. 아직은…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공부나 하면서 살았을 샌님에게 무슨 약점이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지요. 제 뒤통수를 치는 데는 그 자식도 분명히 일조했습니다. 최건우야 아직 제가 건드리긴 힘든 입장이니 하도훈 그 자식에게라도 제대로 화풀이해야지 않겠습니까?”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아직은 없습니다. 하지만 없으면 만들어야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 법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나 박유하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줄 생각이니까.”
***
Rrrr
“네. 최건우입니다.”
“안녕하세요. 최 대표님. 저는 은우를 맡고 있는 2학년 2반 담임 방선혜라고 합니다.”
“아! 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제가 먼저 찾아뵙게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꽤 지났다. 둘째 동우는 고3, 셋째 정우는 중3 그리고 막내 은우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건우는 요즘 신경이 전부 세계교육으로 쏠려 있어 동생들에게 조금 소홀했다.
아침저녁은 항상 같이 먹고 저녁 이후에는 동생들도 학원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든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있다 보니 예전과 비교해 덜 신경 쓰게 된 건 사실이었다.
여러 정황상 이전 삶에서 건우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곳은 세계교육과 박유하 이사가 확실해 보였다.
건우는 위험요소는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제거해야 한다며, 동생에게 소홀한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은우의 담임이 전화를 해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이번엔 막내가 무슨 사고를 쳤을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호호호. 아닙니다. 최 대표님이 좋은 일 하시느라 많이 바쁜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학생에게 큰 문제가 없다면 학부모님이 학교에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최 대표님이라도 불러도 괜찮죠? 은우 오라버님이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마땅히 부를 호칭이 없네요.”
“선생님 편할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뭐라고 부르시든 상관없습니다.”
다행히 대화하는 첫 느낌은 좋았다.
잠깐 대화하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마는 은우의 1학년 담임이었던 4차원 그녀보다는 평범해 보였다.
자신을 ‘지원 씨’라고 불러달라며 과하게 친한 척을 하던 사람이라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네. 그럼 최 대표님이라고 부를게요. 제가 전화를 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혹시 우리 은우가 사고를 친 겁니까?”
“사고요? 호호호. 사고는 아니니 안심하세요. 은우가 좀 말괄량이 경향이 있긴 해도, 천성이 워낙 밝고 맑아서 친구들이 많이 좋아해요. 의협심도 강해서 약한 친구 괴롭히는 아이들이 있으면 항상 나서서 그러지 못하게 말리기도 하고요.”
“그게 너무 과할 때가 있더라고요.”
“아니에요. 오히려 은우 덕분에 우리 반에는 누굴 왕따 시키는 그런 분위기는 전혀 없답니다.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그게 다 은우 덕분인 것 같아서 담임인 저로서는 참 고마워요. 집에서 잘 가르쳐서 그런 것 같아서 역시 최 대표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우에게 세 동생은 자식이나 다름없다. 그런 동생이 칭찬을 받자 건우는 자신이 칭찬받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말괄량이라 걱정을 했는데 한결 마음이 놓였다.
“최근에 제가 바빠 신경을 제대로 못 써서 항상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은우가 그렇게 행동했다면, 학교에서 바르게 잘 배워서 그렇겠죠.”
“아니에요. 은우는 워낙 알아서 잘하는 아이라 가르칠 것도 없어요. 얼마나 똑 부러지는데요. 그러니 최 대표님도 은우 학교생활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제게 물어볼 게 있다고…요?”
“아, 맞다! 죄송해요. 워낙 유명하신 최 대표님과 직접 통화를 한다고 생각해서 너무 긴장했나 봐요. 제가 너무 말이 많았죠. 다름이 아니라 은우의 장래희망 때문에 전화를 드렸어요. 좀 이해가 가지 않았거든요.”
“장래 희망이요? 은우가 어떤 걸 장래 희망으로 썼는데요.”
“그게… 조강지처가 꿈이라고 하더라고요.”
“네? 조강지처요? 아니 웬 조강지처. 정말 은우가 조강지처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까?”
은우 담임의 말에 건우는 황당했다.
조강지처의 뜻이 뭔가? 사전적 의미를 보면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어가며 고생을 같이 해온 아내라는 뜻으로 곤궁(困窮)할 때부터 간고(艱苦)를 함께 겪은 본처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인 은우의 꿈이 난데없이 조강지처라니 건우로서는 기가 막혔다.
“네. 은우가 직접 상담지에 썼는데, 지금 다시 봐도 조강지처라고 적혀있네요.”
“은우가 왜 갑자기 조강지처가 되고 싶다고 썼을까요?”
건우는 너무 황당해서 이렇게 되묻고 말았다.
“그…그러니까 저도 그게 궁금해서 전화를 드린 겁니다. 은우에게도 물어봤는데, 그냥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은 꼭 조강지처가 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대답하는데 좀 더 꼬치꼬치 묻기도 그렇고. 고민 끝에 최 대표님에게 전화를 드린 거예요.”
“흠. 저도 은우가 왜 갑자기 그런 꿈을 가지게 되었는지 잘 상상이 안 가는군요.”
“사실 전화 드리는 걸 좀 망설였어요. 실례되는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어떤 게 궁금하신데요? 은우와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지 괜찮으니 편안하게 물어보세요.”
“혹시 최 대표님이 여자 친구를 자주 바꾸거나 그러진 않으세요?”
좀 황당한 질문이었지만 은우 담임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니요. 그런 적도 없고, 지금껏 동생들에게 제 여자친구 이야기를 꺼낸 적도 없습니다.”
“그럼. 혹시 정말 혹시 은우 아버님이 바람을 피우신 적은 없으세요? 정말 죄송해요. 이런 질문은 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은우와 제대로 상담하려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것부터 알아야 하거든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아닙니다. 선생님 마음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은우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담임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에요.”
“음. 부모와 자식 간이라도 서로의 일에 대해 전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100% 확신은 할 수 없습니다만, 제가 알기로 부모님의 금슬은 누구보다 좋았습니다. 제 눈에 그렇게 보였으니 은우 눈에도 비슷하게 보였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최 대표님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모습이나 은우가 약한 친구들 돕는 모습을 보면 부모님도 정말 훌륭하신 분이셨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럼 다른 이유겠네요. 친한 친구 부모님 중 누군가가 바람을 심하게 피울 수도 있고요. 요즘 2학년이면 정말 알 건 다 아는 나이라서 부모님들도 항상 행동을 조심해야 하거든요. 부모님의 사소한 행동이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저도 될 수 있으면 동생들에게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 잘하지 못하고 있지만.”
“에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이미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계신 분이니 충분히 잘하고 계신 거죠. 학원생 한 명이 쓰러지는 일이 생겼다고 저녁 급식을 추진했다는 인터뷰를 보고 얼마나 감동했는지 몰라요. 정말 대단하세요. 은우나 다른 동생들도 최 대표님을 보고 배워서 훌륭한 사람으로 자랄 거예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모르니 제가 은우와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요즘 들어 은우와 속 이야기를 많이 못 한 것 같아서 미안했는데, 오늘은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왜 그런 꿈을 가졌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정말 감사해요.”
“아닙니다. 오빠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그럼 은우와 이야기해보고 이유를 알게 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
은우의 꿈이 조강지처라는 이야기를 들은 건우는 막내가 왜 그런 꿈을 가지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신도 모르는 상처를 건드릴 수도 있어서 다짜고짜 은우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Rrrr
“응. 건우야.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다름이 아니라요. 고모. 혹시 아버지와 엄마가 예전에 사이가 안 좋았어?”
답답한 마음에 건우는 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모라면 혹시 이유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뭐?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아니 오늘 은우 담임에게 전화가 왔는데 녀석이 꿈을 쓰라고 하니까 조강지처가 되고 싶다고 적어 냈다고 하잖아.”
“뭐? 조.강.지.처? 정말 은우 꿈이 조강지처가 되는 거래?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아버지와 엄마 사이가 나빴나 싶어서. 나야 몇 년간 미국에 있었으니까 두 분 사이가 어땠는지 정확히 모르잖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지만 은우를 위해서라면 물어야 했다.
“오빠하고 언니야 세상 사람들이 전부 부러워하는 잉꼬부부였지. 절대 그럴 사람들이 아니야. 그리고 혹시 정말 만약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은우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일 분들이 아니야. 네 동생들 앞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 절대 상상이 안 가.”
“역시 그렇지?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 아니지? 알았어. 고마워, 고모.”
“그래. 혹시 은우랑 이야기해보고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게 되면 내게도 알려줘. 우리 말썽꾸러기 은우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조강지처를 써냈을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호호호.”
“끄응. 그래. 나도 고모처럼 웃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끊어. 이따 다시 전화할게.”
혹시나 싶어 고모뿐만 아니라 외삼촌에게도 전화해서 물어봤지만, 반응은 두 사람 모두 같았다.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오리무중이었다.
“형. 나왔어. 어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사람이 와도 모르고 있어.”
“어. 어? 왔어. 아니야.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아니다. 너한테라도 물어보자.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사람은 너니까 네가 가장 잘 알 수도 있겠다.”
은우에 대한 건우의 고민은 동우가 학교를 마치고 근로장학생 일을 하기 위해 학원에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혹시 예전에 부모님이 크게 싸우신 적이 있어?”
“뭐? 아빠 엄마가 왜? 내 기억으로는 없는데.”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내가 기억 못 하겠어? 완전 천지개벽할 일인데. 갑자기 무슨 일인데, 그래?”
“아니 은우가 학교에서 꿈을 써내라고 했더니 조강지처라고 했다지 뭐냐.”
건우는 결국 다시 한 번 은우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는지 몰랐다.
“뭐? 조강지처? 아빠 엄마 사이가 얼마나 좋았는데. 절대 아빠 엄마 때문은 아니야. 녀석이 엉뚱해서 이상한 꿈을 적어 낸 거겠지. 그러니까 고민하지 말고 직접 물어봐.”
“역시 그래야 하겠지?”
“그럼. 형처럼 그렇게 고민해봐야 아무 결론도 안 나온다고. 이럴 땐 직접 물어보는 게 최고야.”
***
아무리 생각해봐도 은우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오자 건우는 사무실 바로 옆에 마련해둔 공부방에서 놀고 있는 막내를 불렀다.
“은우야.”
“응. 오빠. 왜 그래?”
“사실은 방금 너희 담임선생님에게 전화가 왔거든?”
“선생님에게? 우리 선생님 좋지? 히히. 작년 선생님보다 더 좋은 거 같아. 친절하고 상냥하고 말씀도 부드럽게 잘하셔.”
“그래. 오빠가 이야기해봐도 그렇더라. 좋은 선생님 같았어. 그런데 내가 은우한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그게 뭔데?”
“은우 꿈이 조강지처라면서?”
“응. 맞아. 그게 왜?”
은우는 건우의 질문에도 왜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음.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는데?”
“갑자기? 원래부터 내 꿈이 조강지처였어.”
“뭐? 그럼 왜 원래부터 꿈이 조강지처였는데?”
“좋은 부인이 되고 싶은 건데. 그게 그렇게 이상해?”
“이상한 건 아닌데. 좋은 부인이 되는 게 나쁜 건 아닌데…. 뭐? 좋은 부인이라고?”
건우는 은우와의 대화에서 뭔가 핀트가 어긋나는 것을 느꼈다. 조강지처가 좋은 부인이 아닌 건 아니지만, 그 뜻 자체가 좋은 부인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은우가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다.
“응. 좋은 부인.”
“너 조강지처가 무슨 뜻인지 알아?”
“알지. 좋은 부인이라는 뜻이잖아.”
“그래 조강지처가 좋은 부인인 건 맞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거든. 왜 갑자기 조강지처가 되고 싶었던 거야? 어떤 계기가 있을 것 아냐?”
“예전에 신사임당 위인전기를 읽었는데, 집안 잘 돌보고 자식 잘 키운 훌륭한 분이라고 하잖아. 그리고 5만 원짜리 지폐에도 나오는 분이고. 그래서 나도 그분처럼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럼 안 돼?”
아….
은우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건우는 할 말을 잃었다.
“은우야! 그건 조강지처가 아니라 현모양처야.”
“아! 그런 거였어? 신사임당이 조강지처가 아니라 현모양처였어? 그럼 내 꿈은 이제부터 현모양처 할래.”
은우의 대답은 쿨했다.
온 가족에게 전화해서 호들갑을 떨었던 일치고는 너무 허무한 결말이었다.
그냥 단어가 헷갈렸다는데 은우보고 뭐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건우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문자 하나를 보냈다.
- 선생님. 저 은우 오빠 최건우입니다. 방금 은우와 이야기를 해봤는데, 녀석이 단어를 헷갈린 것 같습니다. 조강지처가 아니라 현모양처랍니다. 죄송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