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부르셨습니까, 이사님.”
“어서 오세요. 정 실장님. 재미난 기사를 발견해서 불렀습니다.”
박유하 이사는 아침 신문의 사회면에 실린 기사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 않아도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상대가 스스로 무덤을 파준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기사를 발견한 그는 곧바로 정도식 실장을 불러들였다.
“어떤 기사를 말씀하시는 건지?”
“지난번에 초이스 에듀 소속 여자 강사 한 명이 성형수술 논란에 휩싸인 일이 있지 않습니까.”
“아! 기억납니다. 가슴 크고 꽤 예쁘장했던 여자였죠, 아마 영화 홍보 동영상 때문에 유명해졌던.”
“맞습니다. 이름은 윤은영이고. 그때 초이스 에듀 측에서 허위사실을 유포한 사람들에게 대해 강경대응 하겠다며 고소·고발을 했었죠.”
“웃기지도 않는 일입니다. 관심받고 싶어서 광고 동영상을 찍어 놓고, 성형했다고 비난받자 갑자기 피해자 코스프레라니. 솔직히 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정 실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속고 있는 겁니다. 최건우 그 인간이 얼마나 표리부동하고 비양심적인 인간인지 사람들은 모르고 있어요.”
유유상종이라는 사자성어처럼 두 사람의 생각은 비슷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기부다 뭐다 한다고 했지만, 결국 그걸로 항상 이득을 봐왔지 않습니까? 예전에 군대 면제, 정신과 상담 이력, 학력위조로 완전히 벼랑 끝에 몰렸을 때도 결국에는 소아암 어린이들에게 기부한 사실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저희가 최건우 그놈을 옭아매려고 얼마나 노력….”
“정 실장님!”
“네. 이사님.”
“항상 말조심하세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입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렸죠. 제가 제일 싫어하는 캐릭터가 말 많은 사람이라고.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실수를 하게 마련입니다. 지금처럼 말이죠. 항상 주의하세요.”
질책한다기보다는 주의를 환기하는 말투였다.
박유하 이사의 편집증에 가까운 조심성을 잘 아는 정도식 실장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했나 봅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기사를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윤은영이라는 여강사에 대해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처벌을 받았어요. 인터넷 언론사 5개가 벌금형을 받았고, 무려 20명의 사람이 집행유예긴 해도 징역형을 선고받았더군요.”
“저도 그 기사 봤습니다. 그것 때문에 인터넷이 꽤 시끄럽습니다. 처벌이 과하다는 사람들도 있고, 그와 반대로 일벌백계가 필요하다는 사람들도 있고. 여러 가지로 논란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특성 중 하나죠. 피해자가 가해자를 법을 이용해 정당하게 처벌하면, 오히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이상한 경우 말입니다. 덕분에 우리도 일을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은…?”
“그 논란을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잘 이용하라고 부른 겁니다. 찾아보면 아직 어린 대학생이나 가정주부처럼 국민들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가해자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가해자들을 잘 이용해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둔갑시켜야죠. 그렇게만 되면 천하의 최건우도 흠집이 날 수밖에 없겠죠.”
“그렇군요. 언론을 이용해 가해자를 피해자로 만든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저같이 아둔한 사람은 이사님의 총명한 머리를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뭐 한 게 있다고요. 다 제 무덤을 판 최건우 덕분이죠. 고마워하려면 제가 아니라 최건우 그놈에게 하십시오.”
“하하하. 그래야겠습니다. 잘나갈수록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 이제 보니 녀석에게는 그런 겸손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곧바로 최건우 흠집 내기 작업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차근차근 욕심내지 말고 하세요. 당장 무너뜨리길 바라는 게 아닙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 그렇게만 해주세요.”
***
[초이스 에듀 대표의 두 얼굴.]
유군은 이제 겨우 21살의 앞날이 창창한 대학생이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형편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부터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서울에 있는 유명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대학에 입학해서 흥청망청 술 마시며 놀러 다니기 바빴지만, 유군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항상 아르바이트나 과외를 하느라 정신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간 덕분에 부모님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도 무사히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하느라 바빴지만, 공부를 등한시하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도 늘 A학점 이상을 받는 모범생이었다. 이대로 무사히 대학을 마치면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부모님에게 효도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런 유군의 꿈은 조그마한 실수 때문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제 그는 앞날이 창창한 학생이 아니라 꿈도 희망도 없는 전과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유군은 학교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심신이 피곤했었다. 매일 같이 놀기 바쁜 친구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같이 놀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노는 것이 아니라 학교 등록금과 생활비 마련이었다.
스트레스를 많았고, 정신적으로 피로가 누적되었다. 그러다 보니 유군은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다. 다름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타인에게 악성 댓글을 달며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기 시작한 것이다.
윤은영씨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삶은 고단하고 힘겨운데 그녀는 치아교정이니 어쩌니 하며 얼굴을 고쳐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실력도 없으면서 고작 고쳐서 예뻐진 얼굴만 믿고 설치는 모습이 너무 얄미웠다. 치아교정만 한 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도 따지고 보면 성형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들자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그녀를 비난하는 글을 몇 개 올렸을 뿐인데, 그로 인해 전과자가 될 거라고는 꿈에라도 생각하지 못했다.
뒤늦게 후회하고 반성의 자세를 보였다. 앞으로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거라며 자신을 희망으로 생각하는 부모님을 봐서라도 용서해달라고 선처를 호소했지만, 돌아온 것은 냉정한 거절뿐이었다.
명문대 대학생을 그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기부천사로 알려진 최건우 대표. 항상 불우한 이웃을 돕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었던 최 대표가 꿈 많은 젊은이의 희망을 앗아가 버렸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최건우 대표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회의 사각을 밝게 비추려 노력하는 신문. 밝음 신문 오미자 기자.
[어느 평범한 가정주부의 고충.]
아기를 낳은 지 6개월. 정말이지 너무나도 많이 힘듭니다.
아기를 낳기 전까지의 삶은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남편이 조금 짠돌이 기질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지지리 궁상을 떨 만큼 이상한 남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육아로 힘들어서 그런지 요즘 들어 남편의 점점 더 미워지고 있습니다.
이제껏 결혼과 육아로 포기한 부분이 자꾸 떠올라 울컥거릴 때가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아이를 돌보는 일에 돕지 않는 남편이 너무 싫고, 내가 뭐 때문에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 하나 싶기도 해요.
미혼일 때 남편의 말에 속은 나 자신이 정말 한심했습니다. 결혼하면 항상 일찍 퇴근해 함께 저녁을 먹고, 외국 출장을 갈 때는 휴가를 내서 같이 해외여행을 같이 가자고 이야기했었죠.
결혼 전에 굉장히 신뢰를 주며 했던 이런 약속들을 저는 철석같이 믿으며 그와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결혼해보니 알겠더라고요. 남편 말이 모두 거짓이라는 걸. 연봉은 한참이나 부풀려져 있었고, 찰떡같이 약속했던 집안일은 하나도 돕지 않았어요.
남들은 태교여행도 간다는데 결혼하고 몇 년 동안 함께 간 여행이라고는 1박 2일 국내여행이 전부였습니다. 여름휴가에 여행이라고 가자고 하면 항상 듣는 둥 마는 둥 이었죠. 집안에서 남편은 빈둥거리고, 저만 발을 동동거리며 집안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들지만, 아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지우고 있어요. 물론 경제적인 어려움, 세상의 시선, 싱글맘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도 마음에 걸려요. 그렇지만 제가 이 남자와 계속 살아야 할지 확신이 들지 않아요.
제가 아프다고 해도 신경도 쓰지 않고 출근해버리는 남편. 퇴근하면 자기 새끼인데도 얼굴 한 번 힐끔 쳐다보고 TV에 정신이 나가버리는 남편. 그러니 집안일을 돕는 것은 상상도 못 하겠죠?
일하고 아기 키우고 집안일하고. 친정엄마가 제가 일하는 동안 아기를 돌봐주는 일도 너무 죄송스러워요. 남편은 그런 엄마에게 선물은커녕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전하지 않아요.
주말에는 시댁식구 잔뜩 불러서 가뜩이나 힘든데, 일을 더 만들어 주고 있어요.
제 아이에게 다정한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며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저의 그런 소망은 신기루처럼 사라졌어요.
자기 와이프가 아픈지 어떤지 신경도 쓰지 않는 무신경한 남편이 원망스럽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는 게 이렇게 힘든 적은 처음입니다. 위로 좀 해주세요.
이 글은 초이스 에듀로부터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한 가정주부가 예전 인터넷 카페에 남긴 내용이다. 힘든 집안일, 어려운 육아. 그런 스트레스를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으로 풀려 한 것은 잘못이지만, 한 번의 실수로 인해 그녀는 어렵게 지키려던 가정은 물론 아이까지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안타깝게도 그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최건우 대표였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마음 따뜻한 젊은 강사가 아니라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사업가의 모습. 둘 중 어느 것이 그의 진짜 모습일까?
세상의 어두운 이면을 찾아 알리는 어둠신문. 안빛나 기자.
***
초이스 에듀 본점 지하의 정보팀 사무실.
“역시 예상을 못 벗어나네. 실망스럽다고 해야 하나?”
“지난번에 대표님을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모습을 생각하면 기대 이하의 모습이긴 해요.”
“내가 볼 땐 위기감을 느껴서 뭔가 좀 서두른 느낌이야. 그렇다고 방심하지는 마. 모르는 상태에서 당했다면 어느 정도 타격은 입을 수 있는 공격이니까.”
“물론이죠. 그런데 저놈들은 자기들 말고 다른 학원이 정보팀을 운영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나 봐요? 생각보다 방비가 엉망이던데.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PC에 대한 보안도 거의 하지 않고 있더라고요. 웃긴 놈들.”
건우와 관련된 안 좋은 기사들이 우후죽순 올라왔지만 정보팀은 그렇게 다급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놈들이 정상이야. 고작 애들 가르치는 학원에서 운영하는 정보팀에 수십억 원씩 투자하는 간 큰 경영자가 우리 대표님 말고 또 있을까? 솔직히 좀 과하긴 하잖아.”
“그래서 더 궁금해요. 대표님의 머릿속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지. 단지 학원끼리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이런 투자를 할 리는 없다고 보거든요. 분명히 뭔가 더 원대한 계획이 있는 것 같은데 속내를 모르겠단 말이에요.”
“궁금하면 대표님 컴퓨터라도 해킹해보지 그랬어?”
“으악. 어떻게 우리 고용주의 컴퓨터를 해킹할 수 있어요. 저도 그 정도 개념은 있다고요.”
“그렇게 개념이 있어서 예전에 일할 땐 회사 서버며, 검찰 서버며, 경찰 서버까지 제 앞마당인양 그렇게 들락날락했던 거구나?”
“아니 뭐. 회사는 제가 좀 과하긴 했지만, 경찰이나 검찰은 어때요. 우리 소속도 아닌데.”
“이 자식아. 검·경은 같은 공무원 아니냐?”
“에이. 그냥 궁금했을 뿐이라니까요.”
“뭐가?”
“검찰·경찰에서 일하는 높으신 양반들은 과연 야동을 볼까 안 볼까. 그게 궁금했을 뿐이라니까요.”
차지훈의 지적에 윤종수가 장난스럽게 키득거렸다.
“녀석도 참. 그래서 대표님 컴퓨터에는 야동이 있디?”
“아뇨. 없던 걸… 이 아니고. 하하하. 이 양반 정말 무서운 사람이네. 팀장님 이런 식으로 찌르기 있기 없기?”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윤종수. 그러나 차지훈은 이미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넌 그래서 현장요원이 못 되는 거야. 그 정도 유도신문에도 홀딱 넘어가는데 무슨 수로 현장에서 버티겠어?”
“그러게요. 제가 무능한 걸까요? 아니면 팀장님이 유능한 걸까요?”
“둘 다. 아무튼. 그래서 대표님은 또 언제 해킹한 거야? 고용주도 해킹하는 이 개념 없는 놈아.”
“그건 아니고. 처음에 팀장님이 팀에 합류하라고 하셨을 때,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서 살짝 살펴봤었죠. 별다른 성과는 없었지만요.”
“그래? 아무것도 없어?”
“네. 컴퓨터에 절대로 자료를 남기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그럼?”
종수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전부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는 스타일이지 싶어요.”
“하긴. 원체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예전에 내가 처음 대표님에게 조사 내용을 보고할 때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
“왜요?”
“첫 임무라서 나름대로 잘 보이려고 열심히 자료를 준비해서 보고했단 말이야. A4 분량으로 거의 50페이지 정도 되었을걸?”
“그런데요?”
“그걸 일일이 전부 보고하고 나서 자료는 이메일로 보내드리겠다고 했거든. 그랬더니 ‘괜찮습니다’라고 하는 거야.”
“오호. 좀 황당했겠네요. 팀장님이 조사한 자료가 마음에 안 들었나 싶기도 했을 것 같고.”
“그렇지. 그래서 내가 물었지. 조사 내용이 뭔가 부족하십니까? 다시 조사할까요? 이렇게 물었는데. ‘아닙니다. 내용이 많지 않아 전부 외웠습니다’라고 하잖아.”
“으악. 10페이지도 아니고 50페이지를요? 딱 한 번 읽어 줬는데 그걸 외웠다고요?”
“내 말이. 처음에는 이 사람이 날 가지고 장난하나 싶었거든. 솔직히 넌 본 적 있냐? 책 학 권을 한 번 보고 전부 외우는 사람.”
“있기야 하죠.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런데 실제로 존재하긴 하네요. 신기하다.”
“신기하기만 했겠냐. 그래서 오기 반 호기심 반의 심정으로 내가 보고한 내용에 대해 지나가는 말로 한 번씩 물어봤거든.”
“그래서요? 제대로 대답하던가요?”
윤종수의 눈이 호기심을 반짝였다.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더라. 몇 페이지 몇 번째 줄에 있는 내용인지까지 기억하는 걸 보고 이 사람은 나 같은 보통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구나,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부러운 능력이네요.”
“부러운 능력이긴 하지. 그런데 가끔은 안 좋을 것 같기도 해.”
“왜요?”
“인간에게 내려진 축복 중 하나가 망각이라는데 웬만한 건 전부 기억할 것 아니야. 안 좋았던 기억들마저도.”
건우가 겪었던 안타까운 사건을 떠올린 차지훈의 얼굴이 잠깐 어두워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