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에이. 그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덕분이라니. 형이 잘나서 그렇지.”
“오! 작은형이 웬일이야? 큰형 잘난 걸 다 인정하고.”
“야. 나도 질투할 사람 가려가면서 한다. 솔직히 우리 형이지만, 정말 사람이 맞나 싶을 때가 있다니까. 너무 대단해서 존경조차 못 하겠어. 솔직히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지 않았다면, 외계인이라고 의심했을지도 몰라.”
“내가 외계인이면, 우리 가족 전부 다 외계인이지.”
“모르지. 형만 어디서 주워왔을 수도 있잖아.”
“뭐야?”
“하하하. 농담이야. 형이 아빠를 제일 많이 닮았는데, 어떻게 주워 와. 엄마가 그랬어. 가끔 형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고. 예전에 처음 연애할 때 아빠랑 판박이래. 크면 클수록.”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던데.”
“내가 봐도 형이 아빠를 제일 많이 닮긴 했어. 나나 작은형은 엄마를 더 닮은 것 같고. 은우는 음… 그러고 보니 우리 은우 많이 예뻐졌네?”
건우의 넉살 덕분에 금세 다시 분위기가 좋아진 4남매.
부모님 두 분 중 누구를 더 닮았는지 은우의 얼굴을 바라보던 정우가 갑자기 막내의 외모를 칭찬했다.
“뭐? 어라. 그러고 보니 우리 막둥이 왜 이렇게 예뻐졌지? 역시 머리가 나쁘면 예뻐지는 건가?”
“어휴! 작은오빠는 끝까지. 오빠! 그렇게 유치하게 놀면 절대 여자 친구 못 사귄다.”
“저 봐. 얼굴이 예뻐지면 뭐하나? 성질이 더러운데.”
“그래도 살이 빠져서 그런가 예뻐지긴 정말 예뻐졌다.”
“정말?”
“그럼. 통통하던 볼살이 빠지니까 얼굴이 확 핀다.”
그동안은 동생이라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은우의 얼굴은 세 사람이 모두 감탄할 만큼 예쁘게 변했다.
집안의 모든 식구가 고기를 좋아하고 운동을 별로 안 하는 바람에 예전 삶의 은우는 꽤 통통한 편이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해 귀엽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통통한 모습 뒤에 이렇게 예쁜 얼굴을 감추고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럼 더 예뻐지게 다이어트를 할까?”
“안 돼! 지금은 많이 먹고 튼튼해질 시기야. 오빠가 군것질이랑 야식만 말리고, 평소에는 잘 먹게 하는 이유가 뭔데? 건강이 최고야. 잘 먹고 열심히 운동하고. 알았지?”
“응. 알았어.”
“그런데 형.”
“왜?”
“아무리 그래도, 형 나이가 이제 겨우 21살이잖아.”
“그래서?”
“21살에 이룰 거 다 이루면, 그 이후 삶이 참 재미없지 않아?”
“글쎄. 너무 바빠서 그럴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는데.”
“그래도 좀 보기 그래. 형도 뭔가 취미라도 하나 만들어.”
“그래? 취미라면 운동은 하고 있는데?”
“그런 것 말고. 뭐랄까? 음. 부드러운 취미도 하나 가져보라는 거지.”
“그거 괜찮은 생각이다. 큰형. 악기를 배워보는 건 어때?”
“악기를?”
“응. 악기. 좀 여유가 있는 집안은 자식들에게 두 가지는 필수로 가르친대.”
“그게 뭔데?”
“수영이랑 악기 연주. 무슨 악기든,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어야 삶이 더 윤택해진다나.”
“괜찮은 말이긴 한데, 좀 바빠서 말이야. 내가 그럴 시간이 있을까?”
“동생이 가라사대.”
건우가 바쁨을 핑계로 악기 배우는 일을 미루려고 하자 동우가 얼른 나섰다.
“뭐?”
“동생이 가라사대, 사람은 자고로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녀석이 뭐라는 거야?”
“형만 우리에게 미션을 주라는 법 있어? 우리도 형에게 미션을 줄 수 있다고. 얘들아 내 생각에 동의하지?”
“응!”
“당연하지.”
“그 봐. 애들도 동의한다잖아. 그러니까 형도 바쁘다는 핑계로 학원 일만 하지 말고, 아무 악기나 하나 배우도록 하세요.”
“하하. 녀석들. 그래 좋아. 그럼. 나 혼자 말고, 다 같이 배우자.”
“뭐? 형 그건….”
“왜? 사람은 자고로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며?”
“아니 그렇지만. 나는 좀 빼주면 안 될까? 이제 고3 올라간다고. 악기 배울 시간이 어디 있어?”
“악기 연주 배운다고 시간 빼앗길 것 같아?”
“물론이지.”
“염려하지 마. 형이 있잖아.”
건우가 동우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형이 뭘?”
“전에도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형에게 개인교습 받고 싶어 난리라고. 내가 특별히 우리 둘째를 위해 친히 개인교습을 해줄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오! 그러면 작은 형 내년 수능에서 만점 받는 거 아냐?”
“에이. 그건 좀 오바다.”
“경준이 형을 봐. 큰형한테 짧은 개인 교습 몇 번 받았다고 만점 받았잖아.”
“그래서?”
“그런데 작은형은 아무래도 친동생이니까 큰형에게 훨씬 더 많은 개인 교습을 받을 수 있을 거 아니야? 그런데도 만점을 못 받으면, 그건 바보라는 이야기지.”
“뭐가 어째? 야! 만점이 쉬운 줄 알아?”
건우네 식구들은 갑자기 나온 수능 만점 논쟁에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1년 뒤의 이야기지만, 둘째 동우는 2017년 수학능력 시험에서 고작 한 문제만 틀리는 쾌거를 거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점을 못 받았다며, 가족들에게(특히 은우에게) 두고두고 놀림 받는 불쌍한 고3이 되고 만다.
***
2015년 12월 XX일.
드디어 초이스 에듀 아현동 본점에서 개원식을 개최하기로 한 날이 밝아왔다.
한편으로 이날은 세 명의 용의자가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기도 하다. 기가 싱크빅의 용선재 대표, 세계교육의 박유하 이사, 크레이듀의 나성천 대표.
초이스 에듀와 함께 우리나라 학원가를 사 등분하고 있는 실력자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서 만난다.
시가총액 2조 원을 넘겼던 엄청난 신화의 주인공이지만, 이제는 늙은 호랑이로 평가받는 용선재 대표.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던 세계교육을 순식간에 대한민국 두 번째 학원으로 성장시킨 젊은 실력자 박유하 이사.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와룡그룹의 마케팅실장까지 역임한 최고의 실력자였으며, 얼마 전 크레이듀의 새로운 대표로 부임한 나성천 대표.
마지막으로, 혜성처럼 나타나 학원가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교육계의 새로운 아이콘 최건우 대표.
용호상박. 난형난제, 백중지세, 막상막하.
이들 네 명이 지금 그렇다.
그리고 이들의 만남은 학원가의 총성 없는 전쟁을 알리는 서막이 되었다.
***
직원들은 아침 일찍부터 출근해 행사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식이 열리는 곳은 쌍둥이처럼 세워진 두 건물 사이에 마련된 아담한 공원.
학생들의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작게 마련된, ‘공원’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정원에 가까운 녹조 공간이었다.
그곳이 지금 우아하고 아름답게 변신하는 중이다.
추운 날씨를 대비해 적당한 거리마다 파티오 히터라고 불리는 야외용 히터가 설치되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테이블과 의자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마무리는 형형색색의 꽃과 순백색의 레이스들. 손다정은 이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분이 바로 그분인가요?”
“그렇지. 어떠냐?”
“와! 정말 예쁘고 멋지십니다. 우리들의 형수님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모든 직원이 개원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별다르게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두 남자가 있었다.
바로 차지훈 정보보안팀 팀장과 그가 새로 영입한 고자성 과장이다.
이들의 주된 업무는 정보 수집. 건우를 제외하고 그들이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장만복 회장이 유일했다.
심지어 손다정에게도 정확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냥 그녀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건우가 운영하는 직속팀이라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같이 바쁜 날에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히터가 있는 조용한 구석 자리에 앉아 수다 떨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지? 저 아름다운 외모. 퍼펙트한 몸매. 똑똑한 두뇌. 게다가 카리스마까지. 최고의 여인이라고 할 수 있지.”
“형님이 극찬하던 이유를 이제야 할 것 같군요.”
“그건 그렇고 준비는 잘하고 있지?”
“그럼요. 완벽하게 준비 완료했습니다.”
“그래. 실외에서 하는 파티라고서 방심할 가능성이 높아. 언제 어디서 속내를 드러낼지 몰라. 조용히 이야기하면 누구도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여긴 우리 홈그라운드야. 이점을 살리지 못하면 우린 프로가 아니거든.”
“그렇죠. 축하식장뿐만 아니라 학원 건물 주변까지 모두 도청장치 설치 완료했습니다. 작은 소리 하나 놓치지 않을 겁니다. 종수 실력 믿으시죠?”
고자성의 얼굴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럼! 잠시 PC방 운영하며 애들 코 묻은 돈으로 먹고살았지만, 그래도 한때는 세계적 해커였잖아.”
“기계 다루는 실력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죠. 아까 가보니 오랜만에 최신 기계, 실전에서 사용해본다고 아주 신 났더군요. 흐흐흐.”
“고장 나지 않게 조심해서 사용해. 아직 대표님에게 아무런 성과도 보여준 게 없단 말이야. 그러면서 뻔뻔하게 비싼 기기들만 사들이니 마음이 편치 않아.”
공무원일 땐 아무 생각 없이 나랏돈을 펑펑 썼었는데, 민간인이 되고 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염려하지 마세요. 용의자가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니 뭔가 나와도 나올 겁니다.”
“흠. 그래야 할 텐데. 아직까진 도무지 오리무중이란 말이야.”
“대기업이 두 곳이나 끼었어요. 만만할 수가 없죠. 너무 서두르는 것도 안 좋아요. 형님이 항상 하시던 말씀이잖아요.”
“야 인마! 자꾸 형님이라고 할래? 팀장님이라고 불러.”
“그럽죠. 팀장님. 그러는 팀장님도 인마, 전마 좀 하지 마슈.”
“뭐라고 인마.”
“아, 좀! 또 인마래.”
“그럼 그냥 고자라고 부를까?”
“아이참. 그냥 고 과장이라고 불러줘요.”
“그래? 알았어. 우리도 이제 연봉 많이 받는 직장인이니까 서로 존중하자고.”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뻥튀기를 안 드슈? 언제는 완전히 뻥튀기 전도사처럼 굴더니.”
“고 과장아. 나도 때와 장소는 가린다. 아무리 그래도 파티에 참석해서 뻥튀기 먹는 것 너무 튀잖아.”
“형수님 앞이라고 점잔 떠는 건 아니고요?”
“크흠.”
“맞구먼. 이런이런. 뻥튀기에 대한 사랑도 여자 앞에서는 한낱 뻥튀기일 뿐이구나. 불쌍한 뻥튀기. 넌 버림받았어.”
***
오후가 되자 초이스 에듀 정문으로 고급 자동차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학원 강사나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진 학원 관련 종사자들도 많이 참석했다.
차가 많이 몰렸지만, XX건설사의 협조로 뒤편에 있는 카이 아파트 단지 안의 주차 공간을 임시주차장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1차로 입주한 아파트 입주민들도 건우 덕분에 집값이 오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약간의 소란함 정도는 충분히 감수해주었다.
“저기 온다.”
“용선재 대표군. 용 대표 오른쪽은 오대영 실장이라는 놈인데, 왼쪽에 있는 놈은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저도 잘 모르겠는걸요. 조사할 때만 해도 저런 남자는 없었는데.”
“같이 왔다는 건 측근이라는 이야기잖아.”
“그럴 가능성이 높죠.”
“제길. 시작부터 변수가 생겨. 종수에게 이야기해서 누군지 좀 알아보라고 해.”
“팀장님. 요즘 미국 드라마 너무 많이 보셨나 봐요? 얼굴만 안다고 누군지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준규는 이럴 때 안 쓰고, 국 끓일 때 쓸래? 준규보고 음료 잔 건네는 척하면서 지문 뜨라고 해. 그 지문으로 경찰청 데이터베이스 돌려보면 되잖아.”
“시작부터 경찰청을 해킹하자고요? 이야. 진짜 제대로 하실 모양이네요?”
“그럼 가짜로 하게? 너도 알아봤겠지만, 최 대표 좋은 사람이야. 이왕 그 사람 밑에서 일하기로 한 거 제대로 해야지. 너도 겪어보면 알겠지만, 알면 알수록 빠져드는 뭔가가 있다니까.”
“그러다 손 팀장이 아니라 최 대표가 우리 형수님 되는 거 아닙니까?”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할래? 진짜 고자로 만들어버릴까 보다. 그만큼 괜찮은 사람이라는 뜻이잖아.”
“흐흐흐. 팀장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저야 팀장님 안목을 믿으니까.”
가장 먼저 등장한 용선재 대표.
학원가에서는 한마디로 신화와 같다고 할 수 있는 존재.
그가 운영하는 기가 싱크빅은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 최고의 학원이다. 한때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추격을 허용했다.
그래도 여전히 1위의 학원.
예전만 못한 모습에 이제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아니겠느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건우와 차지훈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초이스 에듀를 감시하던 똘마니의 윗선이 기가 싱크빅의 오대영 보안실장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상황은 급격하게 변했다.
가장 가능성이 없던 곳이 이제는 건우를 해코지한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된 것이다.
용 대표는 가식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푸근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건우와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의 만남은 오늘이 처음이다. 다른 두 곳이 대기업을 등에 업고 성장했다면, 용 대표와 건우는 자신의 능력으로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
맨주먹으로 제왕의 자리에 오른 남자와 맨주먹으로 제왕의 자리를 위협하는 남자의 만남.
드라마틱한 뭔가가 있을 것 같은 상징적인 만남이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평범했다.
“뭔가 재미있는 신경전이라도 일어날 줄 알았는데, 심심하게 만나네요.”
“그럼 사람들 많은 자리에서 몸싸움이라도 벌일 줄 알았어?”
“혹시 알아요. 여자들처럼 머리끄덩이 잡고 싸울지.”
“저렇게 웃으면서 서로 이야기 나누지만, 뒤에는 칼을 숨기고 있을걸? 그것도 아주 시퍼렇고 흉악한 놈으로. 저걸 바로 소리장도라고 하는 거야. 무식한 네가 알랑가 모르겠지만.”
“쳇. 많이 아셔서 좋겠네요. 어! 저 사람 크레이듀 나성천 대표 맞죠?”
“그러네. 이야! 실제로 보니 더 잘 생겼는걸.”
용 대표가 건우와 간단한 환담을 나누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식장으로 이동하는 사이, 크레이듀의 나성천 대표가 학원 정문 앞에 내렸다.
170 후반의 훤칠한 외모와 몸에 딱 맞는 고급스러운 슈트로 스마트하면서도 세련된 멋을 뽐내며 등장하는 그에게서, 원래 나이인 사십대 중반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