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혹시 뭔지 알겠어?]
건우의 부름에 스트리 교수가 반색했다.
[RSFE-325를 꼭 바이러스라고 부를 필요가 있을까요?]
의도적으로 ‘RSFE-325 바이러스’라고 부르지 않고 ‘RSFE-325’라고 칭했다.
해당 미생물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서다.
[뭐?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우리가 아는 바이러스와 99% 일치하는데.]
[하지만 100%는 아니잖아요. 원숭이와 인간은 DNA가 98% 일치합니다. 그런데 원숭이를 인간이라고 부르진 않습니다.]
[오! 그도 그렇군. 상당히 흥미로운 접근법인데? 계속 해봐.]
스트리 교수의 장점이 열린 시각이다. 적어도 5년 후에 집착증이 도지기 전까진.
[만약 RSFE-325가 다른 바이러스를 통해 생식을 하는 게 아니라면요? 바이러스는 먹이일 뿐, 자가 생식을 한다면요?]
[응? 그럼 바이러스가 아니라 박테리아에 더 가까운데. 하지만 초이. RSFE-325는 RNA 하나만 가지고 있어. 절대 박테리아가 될 수 없다고. 거기 논문에도 있을 텐데.]
박테리아는 DNA와 RNA 둘 다 있어 단독으로 각종 생명현상을 보이는 반면, 바이러스는 둘 중 하나만 있다. 그래서 생식 활동이 불가능한 것이다.
[네. 저도 그 부분을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박테리아도 아니겠죠.]
[그럼?]
[교수님.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상상력에 의존한 가정입니다.]
[흐흐. 그래도 두근두근하는군. 자네의 창의성은 언제나 내 예상을 뛰어넘어 기상천외했으니까.]
[만약 RSFE-325가 지금까지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미생물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새로운 미생물이라고?]
[굳이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의 범주 안에 넣을 필요가 있을까요? 둘 다 아닌데. 교수님 연구 결과를 보면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교묘하게 합쳐진 느낌입니다. 이름하여 바이리아? 아니면 박테러스? 음…. 둘 다 어감은 이상하네요.]
[아니지, 아니야. 지금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러니까 네 말은 완전 RSFE-325를 새로운 물질로 보고 연구해보란 말이지?]
건우의 말에 스트리 교수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달았다.
보통 미생물이라고 하면 조류(algae), 원생동물류(protozoa), 효모류(yeast), 사상균류(fungi), 세균류(bacteria)에 바이러스가 추가된다.
그런데 RSFE-325는 바이러스와 가장 유사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 당연히 바이러스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굉장히 황당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스트리 교수에겐 굉장히 그럴싸하게 들렸다.
미생물이 분명해서 자꾸 미생물 카테고리 안에 넣으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바이러스도 아니고 박테리아도 아니다. 그리고 다른 종류는 더더욱 아니다.
아니면 아닌 대로 받아들이고 RSFE-325 그 자체를 연구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스트리 교수는 이상한 선입견에 빠져 바이러스라는 틀에 RSFE-325를 집어넣으려고 애썼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렇게 강조했던 말인데, 자기도 모르게 선입견의 오류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교수님처럼 대단하신 분이 계속 연구했는데도 100% 바이러스가 아니라면 전혀 새로운 종류의 미생물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저 혼자만의 생각입니다.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충분히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어. 초이 너는 이제 그만 올라가서 자. 내일 또 촬영해야 하잖아.]
[네? 그럼 교수님은요?]
[나는 지금 연구실에 가봐야겠어.]
[헉! 지금 이 시간에요?]
시계는 벌써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토론을 나눈 덕분이다.
[지금 네 이야길 듣고 엄청난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잠을 잘 수가 없어. 미안하지만 내일 아침은 같이 못 먹겠군.]
[아닙니다. 어쨌든 진짜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스트리 교수의 반응에 건우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냥 잘못된 전제를 하나 지적했을 뿐인데, 스트리 교수는 마치 모든 걸 이해한 얼굴이었다.
많은 사람이 건우를 천재라고 추켜세우지만, 진짜 천재는 스트리 교수였다.
스트리 교수는 집을 나서서 황급히 대학 연구실로 돌아갔고, 건우는 피식 웃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아무도 없는 빈 거실에 카메라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혼자서 빨간 점을 껌벅이며.
***
초이스 에듀와 건우에 관한 여론은 점점 더 거침이 없어져 갔다.
대중들은 집단 히스테리라도 부리듯 건우를 향한 비난을 하기에 바빴고, 언론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MBS 방송국에서 전격적으로 특집 방송을 편성했다. ‘최건우와 앨런 쇼어 초이 그리고 하버드’라는 제목의 5부작 방송이었다.
전국의 모든 이목은 MBS를 향했다.
정확히 말하면, 방송 시작 며칠 전부터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MBS가 내보낸 짤막한 광고 영상 덕분이었다.
바틀리 버거에서 일했던 사진, 졸업 연설 영상, 노벨상 수상자인 스트리 교수와의 대화 영상.
길진 않았다. 10초도 안 되는 정말 짧은 영상이 전부였다. 목소리도 없이 자막만 나갔다.
‘하버드 수석 졸업 연설’, ‘노벨상 수상자의 애제자’
자막은 이게 전부였다.
그러나 그 영상 하나로 대중들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됐다.
양 피디의 특기인 낚시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덕분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딱 하나였다.
건우의 학력이 사실인지 위조인지 여부.
일부 사람들은 방송까지 하는 걸 보니 하버드 의대를 입학한 것이 사실 아니겠느냐는 긍정적인 추측을 내놨다. 그렇지만 상당수의 사람은 일단 방송을 보고 판단하겠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아무리 방송을 탔다고 해도 원래의 건우였다면, 이정도의 인지도와 특집 방송까지 편성 받을 정도의 관심이나 위상을 가졌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군 문제와 정신과 문제를 거치면서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았고, 거기에 학력위조 논란까지 불거지면서 전 국민의 시선이 건우에게 몰리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어쨌든, 건우는 이제 그냥 사설학원의 일개 강사가 아니다. 대다수 국민이 다 아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게 좋은 이미지든 아니든. 그러나 설사 나쁜 이미지라고 해도 그 이미지를 180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MBS를 제외한 대부분 언론은 ‘최건우와 앨런 쇼어 초이 그리고 하버드’와 관련해 온갖 추측성 기사를 내보냈다.
누군가의 눈에는 최후의 발악처럼 보였지만, 그냥 모른 척했다. 모든 대가는 방송이 끝난 다음에 치르게 해도 늦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대망의 방송 날이 다가왔다.
시청자들은 건우와 방송국 사람들이 함께 하버드에 가서 그의 이력을 증명하는 과정을 조심스레 지켜봤다.
그를 반기는 교수와 학생들. 절친하게 지냈던 룸메이트.
그리고 하버드대의 수재들과 경쟁하면서도 3년 만에 당당히 졸업장을 거머쥔 그의 천재성.
눈에 보이는 객관적 성과도 대단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햄버거 가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한 건우의 과거 이력이 대중들에게 더 큰 울림을 줬다.
2부가 끝났을 때 건우가 하버드 의대에 입학한 사실까지 모두 증명됐다. 너무나도 확고한 증거가 많아서 누구 하나 부정할 수 없었다.
MBS측 입장에서는 다소 성급한 결정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 더 질질 끌었다간 방송국 이미지가 오히려 나빠질 수 있다는 판단에 빠르게 객관적 사실을 보여줬다.
그렇지만 양 피디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할 때 진짜 재미있는 건 그 이후였다.
대중들은 이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건우의 이력을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 지금부터는 편안한 마음으로, 즐긴다는 심정으로 건우의 천재성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3부에서는 수석 졸업자에게 주어지는 수마 쿰 라우데(summa cum laude)상과 최우수 졸업논문상인 토마스 훕스 상을 받고 졸업 연설을 하는 영상이 등장했다.
늠름한 건우도 멋졌지만, 막내인 은우가 태극기를 망토처럼 두르고 졸업식을 지켜보는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더 큰 반향을 줬다.
같은 한국인이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당당히 졸업 연설을 하던 모습.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등장하는 태극기.
양 피디의 의도된 연출이었지만 효과 하나만큼은 탁월했다.
심지어 태극기를 두르고 있었던 은우는 ‘태극기 소녀’라고 불리며 한동안 국민들의 큰 관심을 받기까지 했었다.
방송이 나간 후 건우에 대한 비난은 급격히 줄었다. 물론 여전히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중들은 이제 건우가 아닌 그런 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하기 시작했다.
***
방송 나가기 며칠 전.
“후….”
양 피디는 눈앞의 영상을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 한숨이세요?”
작가의 물음에 양 피디가 그를 흘낏 쳐다봤다.
“김 작가. 넌 저 영상 보면서 아무런 느낌도 없어?”
“느낌요? 무슨 말인지 알아야 느끼든 말든 하죠.”
“젠장! 그게 바로 문제야. 이걸 어쩔까?”
“어쩔 수 있나요? 아깝긴 해도 이걸 내보냈다간 시청자들 전부 채널 돌릴 걸요?”
시사나 다큐 쪽이면 모를까, 예능에서 이런 진지한 영상은 치명적인 독이다.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이상하게 이걸 그냥 버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온단 말이지.”
“음…. 그럼 이렇게 한 번 해보는 건 어떨까요?”
“뭘?”
“솔직히 피디님이나 저나 저게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잖아요.”
“그렇지.”
“그러니까 일단 전문가를 모셔 와서 저 대화를 분석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 망할 영상이 그냥 고리타분하기만 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최건우 선생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이야기인지 알아보는 거죠.”
“알아본 다음엔? 아무리 천재성이 돋보이는 영상이라고 해도 방송에 내보낼 순 없잖아. 자막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시청자들은 무슨 말인지 모를걸?”
양 피디의 지적에도 김 작가는 흔들리지 않았다.
“방송에 쓸 수 없으면 안 쓰면 그만이죠. 이미 영상은 충분하잖아요. 그러니 이 동영상은 우리 회사 홈페이지나 유튜브에 올리는 겁니다. 물론 천재성이 드러난다는 전제하에.”
“자막만 넣어서 볼 사람만 봐라?”
“혹시 압니까? 세계에 있는 생물학도들이 저 영상에 열광할지. 판타스틱! 어메이징! 이런 댓글들이 달리면 우린 그걸 예능에 소개하면 되죠. 세계적 석학들의 코멘트까지 포함해서요. 시청자들은 어려운 동영상에는 관심이 없어도 다른 나라의 반응 이런 건 굉장히 좋아합니다.”
“오케이. 그럼 김 작가가 책임지고 전문가를 초빙해봐.”
“알겠습니다. 피디님.”
***
Rrrr
“네. 최건우입니다.”
“저예요. 조유미.”
방송이 나가고 급박한 상황이 일단락될 즈음 건우의 정신과 의사인 조유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 유미 씨. 제가 그동안 경황이 없어서 상담 예약도 못 했어요. 잘 지내셨죠?”
“그럼요. 건우 씨도 이제 조금은 잘 지내게 된 것 같던데요?”
“꽤 떠들썩했었죠? 완전히 회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급한 불은 끈 것 같습니다.”
“저도 어떻게 되나 무척 조바심을 내며 지켜봤어요. 그래도 급한 불은 껐다고 하니 다행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정신과 상담 문제가 불거져서 마음에 걸렸거든요.”
“어쩌겠습니까? 유미 씨가 일부러 제보한 것도 아닐 텐데.”
“아무리 보안에 신경 쓴다고 해도, 대놓고 미행하고 그러면 막을 방법이 없네요. 이번 일을 계기로 아직 우리나라가 정신과 상담에 대해 얼마나 편협하게 생각하는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지 뭐에요.”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바뀌겠죠.”
이건 어째 분위기가 바뀐 듯했다. 조유미가 건우를 위로하는 게 아니라 건우가 조유미를 다독이는 분위기로.
“그래도 이대로는 찜찜해서 안 되겠어요.”
“네?”
“찜찜해서 그래요. 이제 좀 분위가가 차분하게 가라앉았으니 제가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게요.”
“어떻게요?”
“최건우 씨는 나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온 게 아니다. 사실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다. 분야는 달라도 천재 소리를 듣던 사람들이라 서로 통하는 게 많았다. 그리고 우린 일반인과는 달리 조금 특이한 종족이기 때문에, 병원에서 정신과 관련 서적을 펴 놓고 대화하며 데이트를 한다. 어때요?”
“끙. 지금 장난하려고 전화하셨습니까?”
오랜만의 조유미 장난에 건우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여자 이젠 이런 장난은 안 칠 줄 알았는데 갑자기 훅 들어왔다.
“호호호. 아직 기분이 처진 것 같아서 그냥 농담 한 번 해봤어요. 실은 아는 기자를 불러서 인터뷰할 생각이에요.”
“어떤 인터뷰요?”
“사실 건우 씨가 제게 정신과 상담만 받은 게 아니잖아요. 동생들에 관한 양육 상담도 받았어요. 물론 정식으로 상담 내용에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요.”
“그렇죠.”
“그러니까 저는 인터뷰를 통해서 최건우 씨는 나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2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갑자기 닥친 낯선 양육문제에 대해 상담하러 왔다고 밝힐 거예요.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양육은 어려워했다고 고백하면 대중들이 공감해줄 걸요.”
조유미의 말에 건우도 관심이 생겼다. 확실히 괜찮은 방법이다.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고는 해도, 여전히 찜찜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유미가 직접 인터뷰를 해서 적절한 해명을 한다면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찜찜한 부분까지 모두 해소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아동 심리학에 대한 박사 학위도 있다고 했죠?”
“그럼요. 아동 심리 상담사 자격증도 있고, 가족심리 상담사 자격도 있어요. 이 정도 이력이면 자격은 충분해요. 끝까지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인간도 있겠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번 인터뷰를 보면서 생각을 바꾸겠죠.”
“인터뷰한다는 기자는 괜찮은 사람이고요?”
“그럼요. 믿을만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충분히 큰 신문사의 기자이기도 하고요. 여론이 건우 씨에게 호의적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그 기자분도 인터뷰에 대해 상당히 적극적이에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괜찮은 방법 같네요. 이런 수고스러운 일까지 하게 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진작에 제가 나섰어야 했는데, 상황이 안 좋을 때 나섰다가는 병원까지 이슈가 될까봐 그러지 못했어요. 병원이 쟁점이 되면 다른 환자분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도 있거든요. 그분들 중에는 그런 과도한 관심이 독약처럼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환자도 있었어요. 미안해요. 진짜 위급할 때 도움을 못 줘서.”
“아닙니다. 거긴 정신과 병원이잖아요. 환자 보호가 우선이죠. 지금이라도 이렇게 나서 주신다고 하니 제가 오히려 감사하죠.”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