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그런데 동생들은 괜찮아요? 이 정도 논란이면 학교에서 꽤 마음고생이 심할 것 같은데.”
이젠 정말 3연타다. 건우라면 모를까 아직 미성년자인 동생들에겐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어른 이상으로 잔인할 때가 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일심단결해서 나쁜 놈으로 몰고 가는 상황인데, 과연 같은 학교 학생들이 가만히 있을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적 사회라면, 왕따 문제 따윈 생기지조차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 며칠 동안 학교를 쉬라고 했어요. 지금은 아는 분에게 부탁해서 지방에 내려가 있어요. 기자들이 자꾸 찾아와서 귀찮게 하더라고요. 기자니까 그럴 순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 우리 막내까지 찾아가는 건 너무 하지 않나요? 왜 사람들이 기레기 기레기 하는지 다시 한 번 느꼈어요.”
“은우까지 찾아간다고요? 세상에! 아무리 취재가 좋아도 상식이라는 게 있는데. 차라리 지방에 내려간 게 다행이네요. 그런데 학력 위조 문제는요? 언론에서 계속 떠들면 동생분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그건 문제가 안 됩니다. 제가 졸업식을 할 때 하버드 대학 한인 동창회에서 저를 위한 깜짝 선물로 가족들을 초청해줬었습니다. 덕분에 이 주 정도 보스턴에서 머물면서 생물학과 졸업식과 의대 입학식을 모두 지켜봤어요. 산증인이죠. 그러니 신문 기사 따위에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그냥 졸업식을 지켜본 게 아니다.
자기들의 큰형이자 오빠가 졸업식에서 최고의 상을 받고, 멋지게 졸업연설까지 한 것을 모두 지켜봤다.
그런 동생들이기 때문에 그 어떤 거짓 기사가 나와도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고요. 동생들이 아직 어려서 솔직히 걱정을 좀 했거든요.”
“음. 문제가 하나 있긴 하죠.”
“네? 그게 뭔데요?”
“우리 셋째 녀석의 꿈이 또 바뀌었다는 거죠.”
“또요? 의사였다가, 요리사였다가 얼마 전부터는 경찰이 되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그랬죠. 그런데 이번엔 기자가 되고 싶답니다. 제가 기자들에게 하도 이리저리 휘둘리니까, 그따위 찌라시 기자가 아니라 진정한 저널리즘이 있는 훌륭한 기자가 되고 싶다고 하네요.”
“호호호. 정우 학생은 정말 보면 볼수록 귀여운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될 게 있나요? 아직 중2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것저것 꿈꿔보는 것도 괜찮겠죠.”
“그냥 그렇기만 하다면 당연히 문제가 안 되죠.”
“그러면요?”
“이 녀석이 다른 꿈도 포기 안 하고 있어요. 뭐, 의사라는 꿈이야 지금은 열심히 공부하는 방법밖에 없으니 괜찮아요. 문제는 요리사 한다며 요리 배우고, 경찰 한다며 권투랑 합기도 배우고 있죠. 요즘은 검도도 하고 싶어 해요. 그런데 이번엔 기자 한다며, 별의별 책을 다 빌려오더라고요. 기자를 하려면 일단 아는 게 많아야 한다나? 어휴….”
꿈을 향해 열심히 사는 건 좋은 데 이건 과해도 너무 과했다.
“세상에. 그럼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네요.”
“정말 그게 끝이면 제가 말도 안 해요. 지금은 카메라 산다고 돈도 모으고 있어요.”
“카메라는 왜요?”
“진정한 저널리스트는 종군기자라면서, 종군기자를 하려면 사진도 잘 찍어야 한다고 그러네요. 그래서 사진도 배울 예정이랍니다.”
“어머. 종군기자요? 그건 좀 위험한데. 정말 걱정되겠네요.”
“그러니까요. 어휴. 예전에는 분명 안 그랬는데, 얘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네? 예전에요?”
여기서 예전이란 건우의 회귀 전을 말하지만, 손다정은 눈곱만큼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뇨. 그러니까 몇 달 전에는 안 그랬는데, 갑자기 변했다는 이야기죠.”
***
콰앙!!
세계교육의 박유하 이사가 화가 난 듯 신경질적으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그 소리가 조용하기만 하던 사무실의 정적을 깨웠다.
“이게 대체 뭡니까?”
“왜 그러십니까, 이사님?”
박유하 이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정도식 실장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 기사들 말이에요. 왜 갑자기 학력위조 논란이 튀어나온 거죠?”
“글쎄요. 그건 저도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좋은 소식 아닙니까? 병역문제, 정신과 문제에다가 학력위조까지 겹쳤으니, 완전히 매장당할 일만 남은 것 같은데요.”
“휴…. 학력위조가 사실이라면 그렇겠죠.”
“네? 그럼 사실이 아니라는 겁니까?”
“제가 그런 것도 하나 제대로 조사 안 했겠습니까? 하버드 의대 다녔던 것 맞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버드 메디컬 스쿨이죠. 학부는 생물학과를 졸업했어요. 그것도 3년 만에요. 수석졸업에 최우수 논문상까지 받았는데, 그걸 왜 홍보용으로 사용하지 않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죠.”
“그렇지만 이런 문제가 논쟁거리가 된다고 해서 나쁠 것 없지 않습니까? 결국, 예전 모 가수처럼 사실이 모두 밝혀지더라도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있을 겁니다.”
정도식 실장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거야 연예인이니까 그런 겁니다. 연예인들은 대중들의 인기가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학원 강사는 인기보다 실력입니다. 실력만 있으면 인기는 저절로 올라가게 됩니다. 만약 최건우 그 인간이 실력이 없는 녀석이었으면, 제가 이렇게까지 하지도 않았죠.”
“그럼….”
“지금 기사들 보세요. 우리가 이슈로 만들어놨던 병역문제나 정신과 이야기는 이미 쏙 들어가 버렸잖아요. 온천지가 그놈의 학력위조 문제만 다루고 있죠. 진짜 학력위조라면 범죄니까 언론이나 대중들도 마음 놓고 욕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때 학력위조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놀라운 성적으로 하버드를 졸업한 경력까지 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어떻게 될 것 같나요?”
“설마… 모든 일이 흐지부지 되는 건가요?”
“그렇죠. 지금까지 우리가 한 노력이 전부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습니다. 대체 누가 이런 멍청한 짓을 벌였는지. 이거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최건우 그 친구 잘하면 이번 위기는 쉽게 넘길 수도 있겠군요. 운이 좋은 친구네요.”
나름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박유하 이사도 이번 일이 건우의 머릿속에 나왔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럼 곤란하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당장 무슨 방법이요? 사람들이 더 이상 병력이나 정신과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데요. 아! 물론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있겠죠. 아마 앞으로도 꾸준히 악플을 다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뭐요? 그런 찌질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논란은 지나가 버렸는데요. 이미 언론에서 앞장서서 괜찮다고 면죄부를 줬지 않습니까?”
“그럼 이번 일은 뜻대로 안 될 수도….”
“그렇겠죠. 인기가 더 이상 오르지 않도록 막은 정도로 만족하려니 아쉽지만, 지금 당장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어처구니없는 돌발변수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휴….”
두 사람은 갑자기 생겨난 돌발변수가 안타까워했지만, 그 변수를 유리한 방향으로 돌릴 방법이 없었다.
당분간은 건우의 승승장구를 지켜보는 수밖에….
***
“여기예요. 양 선배.”
두리번거리며 카페에 들어선 양 피디는 창가 구석에서 자신을 부르는 여자를 발견하고 웃음을 지으며 그것으로 향했다.
“오. 손다정. 너 이 녀석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양 피디와 손다정은 대학 연극 동아리 선후배 사이다.
양 피디는 연출 쪽이었고, 손다정은 연기를 했었다.
대학 졸업후 양 피디는 MBS에 피디로 입사했고, 손다정은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전공을 살려 컨설턴트로 나갔다.
그때 손다정에게 연기자로 나가라고 제일 많이 권유했던 사람이 양 피디였다. 예쁜 외모에 연기력도 나쁘지 않아서, 탑 까진 몰라도 꽤 괜찮은 배우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양 피디는 그게 항상 아쉬웠지만 서로 바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긴 지가 5년이 넘었다.
“오랜만이죠. 선배.”
“그러게. 이게 얼마 만이야? 5년 정도 됐나?”
“아마 그 정도 됐을 거예요. 홍 선배 결혼식 때 본 게 마지막이니까.”
“와. 홍이 결혼할 때가 마지막이었어? 진짜 오래됐네. 그런데 넌 어떻게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야?”
“뭐가요?”
“여전히 예쁘다고.”
“호호호. 아직 결혼 안 해서 그렇죠. 저도 결혼하고 애 낳으면 남들이랑 똑같을 걸요.”
5년 만인데도 대화가 술술 잘 됐다. 대학 시절 동아리방에서 밤새워 수다를 떨었던 선후배 사이라서 어색함이 없었다.
“너도 참. 내가 연기자 권유했을 때 못 이긴 척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서로 사는 이야기를 하느라 벌써 1시간이 지났다. 양 피디는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는 손다정을 보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에이. 선배는 또 그 이야기에요? 홍 선배 결혼식에서도 그러더니만, 이젠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어요?”
“아쉬워서 그러잖아. 아쉬워서. 영희 봐라. 동아리에서는 너한테 밀려서 조연만 하던 애였는데, 지금은 배우로 꽤 잘 나가잖아. 네가 계속 했으면 영희 보다는 잘 나갔을 거 아니야.”
“저는 영희처럼 절실하게 못 했을 거예요. 그리고 선배. 나, 이래 봬도 되게 잘 나가거든요. 억대 계약금 받고 스카우트도 됐어요. 왜 이러세요. 10년 후면 제가 선배보다 잘 나갈지도 모를 걸요? 호호호.”
누군가에게는 잘난 척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양 피디 앞이니까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그는 진심으로 손다정의 앞날을 걱정해준 사람이니까.
“하하하. 그래? 다정이 네가 그렇게 잘 나간다니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연락한 거야. 분위기를 보니 안부나 묻자고 날 보자고 한 건 아닌 것 같고.”
“부탁이 있어서요.”
아무 생각 없이 새로 주문한 주스를 마시던 양 피디가 멈칫했다. 실망해서가 아니라 의외라서 그렇다.
손다정은 절대 자신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양 피디 본인이 잘 알았다.
“부탁이라…. 네 성격에 부탁하러 왔을 리는 없고. 제안… 같은 거야?”
“어머! 저는 선배한테 부탁하면 안 되나요?”
“천하의 손다정이? 목에 칼이 들어와 봐라. 나한테 부탁을 하나.”
“이거 어쩌죠. 전 진짜 선배에게 부탁하러 왔는데. 실망한 거 아니죠?”
그렇게 말하는 손다정의 얼굴은 하나도 안 미안한 모습이었다.
“그래? 일단 뭔지 이야기해봐. 네 부탁이면 웬만하면 들어줄 테니까.”
“고마워요. 선배. 일단 이것부터 봐 주시겠어요.”
“이게 뭔데?”
“제가 모시는 분의 이력이라고나 할까?”
손다정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건 두툼한 서류봉투였다. 양 피디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봉투에서 서류를 꺼냈다.
영어가 가득한 서류. 대부분 서류 제일 위에는 ‘HARVARD’ 어쩌고 하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다정이 네가 모시는 분의 이력? 잘은 모르겠지만 내 짧은 영어 실력으로 봤을 때, 이건 졸업 증명서, 성적 증명서, 합격증, 그리고 이건 무슨 상장처럼 보이네. 최…우수 논문? 또 최우등 졸업? 뭐 이런 건가?”
지상파 피디가 영어 실력이 짧은 리는 없다. 회화는 몰라도 독해는 수준급.
그런 양 피디도 손다정이 갑자기 왜 이런 서류를 자신에게 내밀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제대로 보셨어요.”
“휘유! 하버드대 최우등 졸업이라…. 네가 모시는 분이 누군지 모르지만 이력은 대단하네. 그런데 다정아. 난 네가 왜 이걸 나에게 보여주는지 잘 모르겠다. 난 그냥 평범한 예능 피디인데.”
“평범하진 않죠. 그래도 잘 나가는 피디잖아요.”
“그것도 한때지. 이젠 좋은 날도 끝났어. 신규 프로그램 만들어야 하는데 머리가 굳었는지 아이디어가 안 떠올라.”
“그럼 신규 프로그램 하시기 전에 재미있는 거 하나 안 해보실래요?”
“재미있는 거?”
순간 양 피디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래. 손다정이 그냥 부탁하러 올 리가 있다. 뭔가 확실한 게 있으니 자신을 찾아왔으리라.
그게 뭔지 전혀 감은 안 오는데, ‘손다정’이라는 이름 석 자에 왠지 모르게 기대가 됐다.
“거기 서류에 이름 보이시죠?”
“이름? 앨런 쇼어 초이? 이렇게 부르는 거 맞나?”
“네. 그 이름 보면 뭐 생각나는 거 없으세요?”
“앨런 쇼어 초이라. 글쎄. 앨런 쇼어 초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긴 한데. 앨런…? 설마 앨런 초이? 너 지금 앨런 초이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양 피디의 눈이 번쩍 떠졌다.
“호호호. 왜 아니겠어요? 앨런 쇼어 초이. 한국명 최건우. 제가 일하는 초이스 에듀 대표님이에요.”
“그…그럼 최건우 그 작자…. 아니지. 미안. 최건우 대표 이력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까 제가 자신 있게 서류를 보여드리는 거 아니겠어요?”
“허! 맙소사. 세상이 온통 최건우 죽일 놈을 만들고 있는데, 그게 전부 거짓말일 줄이야.”
“그러게요.”
양 피디의 얼굴은 황당함 그 자체였지만 손다정은 담담했다.
“음…. 다정아. 잠깐만 생각 좀 정리해볼게. 네가 이렇게 서류까지 준비해온 걸 보니 최건우 대표가 굉장히 억울한 건 알겠어. 그런데 이걸 왜 내게 이야기해주는 거야? 시사 피디로면 모를까? 혹시 시사 쪽 피디와 연결해달라는 건가?”
“아니요. 그랬으면 다른 사람을 찾아갔겠죠. 전 이걸 선배가 다뤄줬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선배 정말 감이 죽은 거예요? 엄살이 아니라?”
“그러니까 이야길 좀 해주라. 나도 내가 답답하다.”
“어라. 이러면 곤란한데. 난 선배 실력을 믿고 찾아온 건데. 감이 죽었으면 어쩌지….”
손다정의 장난에 양 피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다정아. 제발 뭔지 말해주면 안 될까? 내가 말이지. 아이디어는 몰라도 연출 능력은 우리 방송국에서 탑이야. 아이디어만 제대로 줘봐. 확실하게 연출해 줄게.”
“호호호. 선배 숨넘어가겠다. 장난 그만할게요. 간단해요. 우리 대표님이랑 하버드 한 번 다녀오세요.”
“뭐? 너희 대표랑 하버드를 다녀오라고? 그건… 아! 너 지금 그러니까. 최건우 대표가 하버드에서 학력 위조가 아닌 걸 밝히는 과정을, 우리가 따라가서 카메라로 담으라는 거지?”
“네. 이게 제 부탁인데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안 되면 다른 방송국에 찾아가고요.”
“아니. 아니야. 다정아. 제발 이거 나한테 줘. 내가 너희 대표를 세상에 둘도 없는 멋진 남자로 만들어 줄게.”
예능 피디로 십 년이다. 이젠 똥인지 된장인지 보기만 해도 보기만 해도 알 능력이 된다.
이건 무조건 된다. 대박도 보통 대박 아이템이 아니다.
시사와 예능. 포지션이 애매하긴 한데 그게 무슨 상관일까.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지.
양 피디는 이걸 어떻게 연출해야 극적일지 벌써부터 그걸 짜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