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그때 운동으로 다져진 듯 덩치 좋은 한 사내가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어이쿠. 정 실장님 오셨습니까?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우린 별로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조내일보에 난 재미난 기사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거든요.”
수다를 떨며 팽 원장과 성 원장이 기다리던 사람이 바로 대치동 세계교육 박유하 이사 밑에서 일하고 있는 정도식 실장이었다.
정도식 실장 덕분에 안면을 튼 두 사람은 그 후 여러 차례 만남을 가졌었다.
“기사요?”
“아! 아직 모르고 계셨군요. 이것 좀 보시죠.”
정 실장이 의아해하자, 성 원장은 보고 있던 신문을 건네며 기사가 난 부분을 알려줬다.
“이젠 대입학원도 무당이 대세? 오! 조내일보네요. 거참. 최건우 이 작자는 어쩌다 조내일보와 척을 지게 되었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처럼 까불더니 언젠간 저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허허허”
“이렇게 되면 일이 더 쉽게 풀릴 수도 있겠군요. 정말 우리가 앞으로 진행할 학원 연합에 봄비 같은 소식입니다.”
“그렇지요? 기사를 보셨으면 알겠지만, 그 인터뷰는 여기 계신 팽 원장님이 하셨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팽 원장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도식 실장이 꾸벅 인사를 하자 팽 원장은 민망한 듯 손사래를 쳤다. 그렇지만 그의 눈빛은 뿌듯함이 가득했다.
“수고라니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어차피 지금부터 우리는 공동운명체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 그렇고. 정말 최건우 선생을 무너뜨릴 만한 좋은 건수가 있는 건 사실입니까? 이런 기사가 떴다고 해도, 그 망할 자식에게 큰 타격은 줄 것 같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름값이 워낙 높아졌어야죠.”
“물론입니다, 성 원장님. 저희 박 이사님이 아직 시기가 아니라며, 기다리라고 하셔서 상황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염려 마시고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성 원장은 아직은 확신이 없는 듯 조금은 불안한 마음을 드러냈으나, 정도식 실장은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자신감을 표현했다.
“그렇게 장담을 하신다면야…. 그런데 무슨 일인지 정말 미리 알 수는 없습니까?”
“그냥 저만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일단은 조금 비밀스럽게 진행하고 있는 부분이라 조심스럽습니다. 상대가 알면 대비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은밀함이 중요합니다.”
“은밀함이라…. 그렇군요.”
팽 원장이야 당장 망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처지이었지만, 성 원장의 학원은 그럭저럭 괜찮게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확실하지도 않은 학원 연합에 가입해서 괜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입장이 다르다 보니 이따금 이렇게 못 미더운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런데 성 원장님.”
“네.”
“혹시 동작구의 바른학원 김 원장님이라고 아십니까?”
“아!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죠?”
“얼마 전에 최건우 그 작자와 만났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지금 최건우와 김 원장이 만났단 말입니까?”
“네. 확실합니다. 우리도 요즘 최건우 선생에 대한 약점을 얻기 위해 열심히 레이더망을 가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며칠 전에 알게 된 정보입니다.”
“흥! 그 자식이 결국 내 목을 죄겠다는 소리군. 괘씸한 놈. 정 실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 실장님 아니었으면 멋모르고 있다가 된통 당할 뻔했습니다. 강사를 빼간 것도 모자라 우리와 가까이 있는 학원 원장과 작당 모의를 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성 원장 또한 그리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게 된 것이다.“하하하. 별말씀을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공동운명체 아닙니까. 공동운명체요.”
“그럼 당장 회의 시작하도록 하죠. 다른 학원은 얼마나 참석한다고 합니까?”
지금까지 가장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던 성 원장은 정 실장이 전해주는 소식에 큰 위기감을 느끼고 완전히 적극적인 자세로 돌아서서 회의에 참여했다.
***
“PPL이요?”
“네. 이번에 MBS에서 하는 청소년 시트콤 드라마에 PPL을 넣을까 싶어서요.”
손다정이 건우를 찾아와 뜬금없이 PPL 이야기를 꺼냈다.
김완태 팀장과 며칠 동안 여러 가지 마케팅 방안에 대해서 논의하던 도중 우연히 이야기가 나왔던 PPL에 관해 관심을 가졌다.
청소년 드라마와 거기서 등장하는 참고서 이북. 어떻게 잘 버무리기만 하면 기대 이상으로 좋은 그림이 나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참고서 이북은 건우의 인터넷 강의에 힘입어 상당한 판매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우려가 많았다. 비록 종이책 참고서에 비교하면 저렴한 가격이기는 해도, 프린트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다는 건 상당히 부담되는 정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스마트폰으로 간단하게 구매할 수 있다는 쉬운 접근성과 스마트폰이나 태블릿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열어볼 수 있다는 편의성은, 처음 참고서 이북 서비스를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나왔던 우려들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지금까지 누적 판매량이 30만 부에 달했다. 권당 5,000원의 가격에 판매되었으니 매출액만 15억 원이다.
건우와 바나나 측은 7:3으로 수익을 나누기로 했다. 때문에 결제 비용 등을 제외하면 약 10억 원 정도의 수익이 발생한 셈이다.
그것보다 더 대단한 건 인터넷 강의를 시작하고 고작 2달 정도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건우의 유명세는 점점 커지고 있었고, 조만간 중학생용 인터넷 강의와 참고서 이북도 출시될 예정이기 때문에 앞으로 그가 벌어들일 수익은 얼마나 될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청소년 시트콤 드라마요? 시트콤이면 시트콤이고 청소년 드라마면 청소년 드라마지, 그 괴상망측한 요상한 이름은 뭔가요?”
“호호호. 원장님도 좀 이상하죠?”
“네. 무척 이상하네요.”
“지금까지의 시트콤은 대학생이나 직장인이 주인공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MBS에서 방영할 시트콤은 청소년이 주인공이에요. 그러니 청소년 시트콤 드라마라고 할 수 있죠.”
“하여간 별의별 이름을 다 가져다 붙이는군요. 그래서 그 드라마에 무슨 PPL을 넣겠다는 겁니까?”
“당연히 참고서 이북이죠.”
“지금도 충분히 잘 팔리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무려 30만 부다. 6과목이고 학년별 그리고 학기별로 나뉜다고 해도 상당히 많이 팔린 건 분명했다.
“그래도 아직 종이책 참고서에 비하면 그 비율은 형편없이 낮은 편이라고 생각해요. 학생들은 그래도 괜찮은데, 학부모들이 문제에요.”
“학부모들이요?”
“네. 학부모들은 참고서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요. 참고서는 당연히 종이책으로 봐야 한다는 그런 선입견 말이죠.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강의를 듣는 것까지는 이해하지만, 필기까지 해야 하는 참고서의 경우는 당연히 종이책이 좋다고 생각해요.”
“음…. 그럴 수도 있겠군요. 스마트폰으로 필기하고 문제 같은 건 연습장 기능을 가진 앱을 실행시켜 풀어도 되는데, 학부모 입장에서는 그런 모습이 낯설 수도 있겠군요.”
“바로 그거에요. 참고서 이북을 사용하는 모습이 낯설다면, 드라마를 통해서 참고서 이북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죠. 그뿐만 아니라 학교에 갈 때도 무거운 책가방이 아닌 태블릿을 들고 가볍고 등하교하는 모습을 연출할 수도 있고요. 모르긴 몰라도 상당히 폭발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도 있을걸요.”
“듣고 보니 그것도 괜찮은 접근 방법이네요. 잘하면 아이들의 교육환경 자체가 바뀔 수도 있겠군요.”
미래를 경험한 건우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다. 건우가 굳이 사람들의 우려를 뒤로 하고 참고서 이북을 출시한 이유가 바로 미래 학생들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래라고는 하지만, 지금의 기술력으로도 참고서 이북 정도는 충분히 구현할 수 있었다. 단지 참고서를 이북으로 만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건우는 그 생각만 살짝 전환해준 것이다.
그냥 이렇게 내버려둬도 늦어도 앞으로 5년 후면, 참고서 이북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었다.
원래라면 큰돈을 벌기보다, 그냥 그때까지 참고서 이북의 선두주자로서 지위만 공고히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손다정이 건우도 생각하지 못한 마케팅 방안을 가져온 것이다.
“저희가 노리는 것도 바로 그거에요. 잘하면 그냥 선두주자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라 시장을 선도해나가는 혁신적인 학원으로 자리매김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군요. 그렇게 하려면 그냥 단순한 사용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좀 더 디테일하게 활용방법을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것은 노골적인 광고라고 못하게 하지 않나요?”
“호호호. 원장님도 참.”
“네? 왜 그렇게 웃어요?”
“보통은 정말 예측하기도 어려울 만큼 대단한 천재로 보이다가도, 지금 같은 경우처럼 너무나 당연한 방법도 생각 못 하는 것이 신기해서요.”
“뭔가 좋은 방법이 있나 보죠?”
“아뇨.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꼼수를 부리는 거죠.”
“꼼수요?”
“네. 지금 동지그룹에 계신 마동수 이사님이 쓰신 책이 있거든요. 꼼수 마케팅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유명 아나운서 윤시연의 남편이자, 평사원에서 시작해서 초고속으로 대기업 이사까지 승진한 마동수. 얼마 전에는 대학생들이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은 사람을 묻는 설문에서 1위로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꼼수 마케팅이라는 책은 바로 그가 쓴 마케팅 관련 책이다. 출시 초기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했고, 지금도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서적이다.
“제목은 들어봤는데, 읽진 않았어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사실 저는 꼼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 꼼수를 부리는 사람보다는 성실한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가 됐으면 하거든요.”
“그러시겠죠. 원장님처럼 엄청난 천재는 굳이 잔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냥 척 봐도 아는데, 무슨 꼼수가 필요하겠어요?”
“아니, 꼭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호호호. 그냥 농담이에요. 어쨌든, 그분이 쓰신 책을 보면 생각을 전환해라. 정답은 의외로 쉬운 곳에 있다는 말이 있어요.”
“그래서요?”
“궁금하시죠?”
건우가 자못 궁금한 표정을 짓자 손다정은 약 올리듯 잠시 뜸을 들였다.
“네. 궁금해요. 그러니까 장난치지 말고 그냥 말씀하시죠?”
“음. 사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노골적으로 PPL을 하는 거죠.”
“네? 그냥 노골적으로 PPL을 한다고요? 그럼 경고 같은 제재를 받을 텐데요?”
“뭐가 걱정이에요. 그런 위험 부담에 따른 비용까지 우리가 지급하면 되는 거죠.”
“아니 그게 무슨….”
이건, 어떻게 보면 대놓고 불법을 저지르자는 이야기나 다를 바 없다.
“뭐가 어때서요? 우리가 그렇게 제안하면 제작사 측에서는 옳다구나 하고 받아들일걸요?”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런 내용까지 ‘꼼수 마케팅’이라는 책에서 나옵니까?”
“그렇게 노골적으로 편법을 저질러라고는 안 하죠. 그분 책을 열심히 읽으면 그냥 은근슬쩍 알게 돼요. 저절로 꼼수가 보인다고 해야 하나? 호호호.”
“이런. 정말 희한한 책이 다 있네요. 저도 시간 내서 한번 읽어보고 싶을 정도예요. 어떻게 보면 제가 가장 필요한 것이 융통성일지도 모르니까요.”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건우는 정말 그 책이 궁금해졌다. 예전에 유미도 건우는 나이에 비해 너무 융통성이 부족하다고 말 한 적이 있었다.
그동안은 융통성이 부족해도 실력과 정석으로 이겨내면 된다고 믿었는데, 세상은 확실히 그리 호락호락 한 곳이 아니었다.
“맞아요. 가끔 보면 정말 40대 아저씨처럼 고리타분하다니까요.”
“윽. 뭐라고요? 제가 오늘 별소리를 다 듣네요. 아무튼, 청소년 시트콤 드라마인지 뭔지 PPL은 나쁘지 않은 의견 같으니 그대로 실행에 옮기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저는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한국 최고의 청소년 시트콤 드라마 ‘학교 가기 싫어’는 장르가 애매모호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드라마라는 평론가들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20%를 넘는 엄청난 흥행성적을 내고 있었다.
요즘 같이 스마트 문화가 발달한 시대에서 시청률 20%라는 것은 과거의 40% 드라마 이상의 폭발력과 파급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 인기 덕분에 초이스 에듀의 참고서 이북 PPL은 드라마의 인기 이상으로 사람들의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되었다.
초이스 에듀는 드라마 시작에 맞춰 중학생용 인터넷 강의와 참고서 이북을 동시 출시했다.
일부러 맞춘 타이밍이었다. 드라마가 시작하고 나서의 인터넷 강의 조회수는 500만 건을 넘었고, 참고서 이북은 100만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누적이 아니라 드라마가 시작되고 고작 한 달 만에 이룩한 결과였다.
인터넷 강의 매출 150억 원. 참고서 이북 매출 50억. 그리고 OEM 방식으로 생산을 시작한 저가 태블릿의 판매 수치도 수직상승했다.
그에 비해 PPL 회당 비용은 4,000만 원. 매일 방영하는 시트콤의 특성상 지금까지 23회 방영. 총비용 9억 2천만 원.
시트콤의 경우 보통 PPL 비용이 천만 원 안팎인 것을 고려하면 확실히 엄청난 비용이긴 했다.
그러나 노골적인 참고서 이북 사용법과 초이스 에듀의 라벨이 붙은 저가 태블릿까지 함께 등장시키기로 계약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리 비싼 비용을 쓰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처음에는 10회 정도만 등장시키고 그만두려고 했었다. 그런데 드라마가 생각 이상의 엄청난 인기를 끌자 서로 간의 합의를 거쳐 계약 기간을 연장했다.
드라마에서는 참고서 이북 관련한 학원 에피소드가 재미난 소재였고, 초이스 에듀는 당연히 매출과 직결된다.
그 결과가 지금처럼 수백억의 매출 효과로 나타난 것이다.
드라마의 맹활약은 건우와 초이스 에듀의 인지도 상승도 큰 기여를 했다. 다음 달부터 초이스 에듀의 분점이 동시 개원할 예정이기 때문에 인지도 상승은 여러모로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런 인기몰이는 아이들 사이에서 한동안 ‘나 초듀(초이스 에듀)한다.’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대단한 관심을 이끌어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