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39화 (39/256)

제39화

광우와 문자 대화를 끝낸 건우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한시라도 빨리 동생들에게도 이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동우야, 정우야, 은우야. 나 왔어. 다들 나와 봐. 어서!”

“형.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왜 그렇게 목소리가 상기되었어?”

“그래.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이겠지. 다들 이리 앉아봐.”

동우, 정우, 은우 세 명이 모두 모이자 건우는 차분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응? 형. 왜 그렇게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는 거야? 부담스러워.”

“얘들아.”

“응. 형. 왜 갑자기 울어? 무슨 안 좋은 일 있는 거야?”

“아니야. 그냥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 잠깐만 닦을게.”

건우 평생의 한이 풀렸다. 부모님도 이제야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울컥했다.

어떻게든 참고 싶었는데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세 동을 보자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정말 안 좋은 일 아니지?”

“범인이 잡혔어.”

“뭐라고? 갑자기 무슨 범인?”

동생들은 아직 영문도 모르는 눈치였다.

“부모님 뺑소니범.”

“뭐!”

“진짜야?”

건우가 전하는 소식에 모두들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은우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는 눈치지만.

“응. 진짜야. 조금 전에 경찰에게 연락도 받았고, 인터넷으로 기사도 확인했어.”

“혀엉! 진짜지? 정말이지? 흑흑.”

최근 책을 많이 읽으면서 눈물이 많아진 동우의 눈에는 벌써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럼. 진짜지. 설마 형이 그런 걸로 장난치겠어? 다들 이리 와봐. 한번 안아보자.”

동우의 눈물이 정우와 은우에게도 전염되었는지 모두들 훌쩍이기 시작했다.

건우가 울먹이는 동생들을 품에 안자 참았던 슬픔이 복받쳐 올라오는지 4남매가 모인 거실은 순식간에 울음바다로 변했다.

***

그리스도교의 성인 발렌티노의 축일에서 시작된 밸런타인데이.

한국에서 이날은 다른 나라와 다르게 조금 더 특별한 날이다. 여성이 사랑하는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며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시작이 상술이든 아니든!

희정은 최근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키가 크고, 약간 마른 몸매에 지적인 외모를 한 멋진 남자였다.

그녀는 그의 모든 것에 빠져들었다.

이지적이면서도 서글서글한 눈매, 낮은 듯하지만 맑은 목소리, 이야기할 때 가끔씩 울렁이는 목울대. 꿈에서 꿈꾸던 그런 남자가 드디어 나타났다.

그 남자 또한 희정에게 관심이 많아 보였다. 그녀를 볼 때면 항상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도 있다. 가끔은 그녀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주기도 한다. 그럴 때면 희정은 자신의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그런 떨림을 느낀다.

오늘도 남자에게서는 매혹적인 향기가 났다. 그 향기를 맡을 때마다 희정은 남자의 품에 코를 박고 마음껏 그의 내음을 느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면 남자가 곤란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애써 자신의 충동을 눌렀다.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히 안다. 그가 점점 더 희정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

예전보다 더 많이 미소 짓고, 예전보다 더 자주 눈이 마주친다. 단지 남자가 좀 수줍음을 많이 탄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어서 빨리 희정을 불러 사랑한다고 고백했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망설이기만 하는지 오늘도 그녀에게 웃음만 살짝 지어주고 그냥 지나갔다.

인내심이 점점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의 고백을 기다려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희정이 먼저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요즘 세상에 고백을 꼭 남자가 먼저 하라는 법은 없다. 용기 있는 여자가 멋진 남자를 얻는 법이다.

이번 밸런타인데이에 그녀가 정성스레 직접 만든 초콜릿과 함께 남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리라. 그럼 남자도 마지못해서 자신의 고백을 받아들이겠지?

시간은 참 더디게 지나갔지만, 자신의 고백을 들으며 행복해할 남자를 생각하니 그 기다림조차 행복했다.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그와 함께 거리를 걷는 기분. 어두운 밤, 가로등의 작은 불빛에만 의지해 나누게 될 키스.

그게 끝이 아닐 것 같다. 그 남자는 희정보다 더 어른이니까. 이 이상의 관계를 원할지도 모른다. 상상만 해도 부끄러웠다.

한두 번은 튕기겠지만, 결국은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 줄 생각이다. 그건 그녀도 원하는 일이니까.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희정은 자신이 만든 초콜릿을 들고 한강 에듀케이션 7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똑똑똑.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고,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네. 들어오세요.”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반겼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멋있게 옷을 입었다.

어쩌면 그도 희정이 고백할 거라는 것을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이미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을지도.

저렇게 멋진 그와, 그의 자동차를 타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식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희정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래. 희정이구나. 그래 무슨 일이야?”

“저기. 선생님 그리니까. 저기….”

막상 고백을 하려니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그의 사무실 왼편 창가로 눈이 갔다.

뭔가 알록달록한 물건들이 작은 동산처럼 수북이 쌓여있었다. 말 그대로 동산처럼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전부 초콜릿이었다. 그냥 왼편 창가에만 있는 게 아니라, 왼쪽 벽면 전체가 초콜릿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세상의 초콜릿들이 전부 이곳에 모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중에는 자신이 만든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멋진 초콜릿도 있었다.

순간 그녀가 가지고 있던 환상이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주눅이 들었다. 설레던 마음은 모두 사라졌다. 발걸음을 돌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아. 희정이도 초콜릿을 가져온 거야? 이거 정말 고맙긴 한데, 너도 보다시피 공간이 여의치가 않네. 미안하지만 그쪽 창가에 좀 놔줄 수 있어?”

목소리는 친절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 이야기하는 그의 반응에 혹시나 가지고 있던 일말의 희망마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와 함께 호텔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기는커녕, 그에게 희정은 지나가는 사람 1, 2, 3과 같은 별 의미 없는 학생일 뿐이었다.

무표정한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왈칵 쏟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추태까지는 부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을 겨우겨우 참아가며, 그의 말대로 창가에 자신이 만든 초콜릿을 올려놓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눈물을 닦고 있는데, 밖에서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들어보니 그녀와 같은 수업을 듣고 있는 재수생 언니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최건우 선생님이 내 마음을 받아주실까?”

“힘들지 않을까? 너도 봤잖아. 초콜릿 선물이 거의 산이다. 산. 내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초콜릿은 오늘이 처음이었어. 아마 한강 에듀케이션에 다니는 여학생들은 전부 다녀간 것 같아. 그럼 경쟁률이 얼마인지 알아?”

“에이. 전부는 아니다. 넌 초콜릿 안 드렸잖아.”

“드리고 싶었지. 그런데 나야 남자친구가 옆에서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잖아.”

“하기야. 네 남친이 좀 집요하긴 하지. 어쨌든! 여기 다니는 여학생들 전부가 다녀가도 나는 분명히 기억할 거야. 내가 정말 기억에 남는 선물을 넣었거든.”

“대체 뭘 넣었길래 그렇게 자신만만해?”

두 여학생이 나누는 대화가 점점 작아지자 화장실 안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희정은 문 쪽으로 바짝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기어코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들렸고,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희정은 더 큰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사실은… 있지… 속옷을 벗어서 넣었지롱. 호호호”

“뭐, 속옷? 헐. 대박! 미쳤구나, 미쳤어. 그럼 뭐야! 설마 너 지금…?”

“호호호. 그렇게 놀란 토끼 눈으로 보지 마. 이거 생각보다 시원하고 좋아. 얘.”

“어머머. 얘가, 얘가. 미쳤어. 미쳤어.”

“미치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런데 최건우 선생님이 좋아하실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확실히 인상적인 선물일 것 같긴 해. 그래도 통할진 잘 모르겠어.”

“아니 왜? 내가 준 선물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남자라면 당연히 혹할걸?”

“그건 30~40대 아저씨한테나 통할 수법이지. 그런 아저씨들이야 우리 같은 영계가 덤비면 얼씨구나 하겠지만 최건우 선생님은 글쎄….”

자신만만한 선물녀와 달리 친구의 표정은 회의적이었다.

“최건우 선생님도 남자야!”

“그렇긴 한데 우리 또래잖아.”

“그게 왜 문제인데?”

“어유. 이것아! 아직 어린 여자에 집착할 나이가 아니라는 거지. 그리고 얼굴 되겠다, 돈 잘 벌겠다, 세련되고 섹시한 언니들이 가만히 놔두겠어? 우리는 학원 다닌다고 제대로 꾸미지도 못하고 있잖아.”

“그런가? 그럼 어쩌지? 그냥 육탄공세를 확!”

“어이구. 기집애. 아주 달아올랐구나. 달아올랐어. 쯧쯧.”

“그래 달아올랐다. 그래서 매일 밤마다 최건우 선생님 꿈만 꾼다. 선생님 어서 나를 가져요. 매일 이러면서 허벅지만 꼬집고 있어.”

“뭐야? 미친년. 발정났네, 발정났어. 호호호.”

***

“정말 엄청나네요.”

“뭐가 말이에요?”

건우의 사무실로 들어선 손다정은 선물이 수북이 쌓여있는 창가를 가리키며 감탄했다.

“그건 몰라서 하는 말이죠. 저기 왼쪽 창가가 보이지 않아요?”

“보이죠. 선물이 많이 있네요.”

“그냥 많은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많은 선물이죠. 과장 좀 해서 저런 걸 보통 산처럼 쌓인 선물이라고도 하죠.”

“정말로 과장이 좀 심하긴 하네요. 그래서요?”

“어휴. 머리도 좋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여자에 대해서 모를까?”

“이외수 작가는 여자는 여자도 모른다는 책을 썼죠. 그리고 유명한 로마의 철학자 베르길리우스는 이런 말을 했어요. 여자는 변하기 쉽고, 늘상 변덕스러운 존재다. 세르반테스는 또 이런 말을 했어요. 여자의 ‘예스’와 ‘노’는 같은 것이다. 거기에 선을 긋는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여자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여자이다. 이 말은 짐 비숍이 한 말입니다. 응? 왜 그렇게 봐요?”

건우가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에 손다정이 피식 웃었다.

“남자 천재는 여자도 글로 배우나 싶어서요.”

“뭐라고요?”

겉은 20대라도 속은 40대나 마찬가지인데 여자를 글로 배우다니. 괜히 발끈하는 건우였다.

“호호호. 그렇게 발끈할 것 없어요. 굳이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어차피 남자와 여자의 심리는 교차할 수 없는 평행선 같은 거니까. 그런데 최 선생님.”

“네.”

“그렇게 많은 명언이 있지만, 그와 아주 반대되는 멋진 명언도 있죠.”

“그게 뭔데요?”

“오스카 와일드가 쓴 캔더빌의 유령이라는 단편집에서 비밀 없는 스핑크스라는 소설이 있거든요. 책에서 제럴드가 이런 말을 해요. ‘난 도무지 여자를 이해할 수 없어’라고요. 그러자 글 속 화자가 이렇게 대답해요. ‘이런! 제럴드. 여자는 사랑해야지 이해하려고 하면 안 돼’라고요. 어때요? 멋진 말 같지 않아요?”

“하하하. 와. 정말 멋진 말이네요. 한번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그런데 손 과장님.”

건우는 손다정의 말에 시원하게 웃었다. 그리고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불렀다.

“네?”

“그래서 저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아…아니 어쩌라는 말이 아니라….”

“설마 오늘 제게 선물을 전 여학생들의 마음을 모두 받아주라는 말입니까?”

“헉! 당연히 아니죠. 세상에!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희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도 그렇게는 못할걸요?”

“저도 끔찍해요. 저기 있는 저 많은 초콜릿을 어떻게 처리할지.”

“어휴. 어쨌든, 제가 하려는 말은요. 앞으로 최 선생님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는 거예요. 스캔들 안 나게.”

“그러니까 왜요?”

“여학생들이 얼마나 극성인지 아직 못 겪어 보셨죠?”

예전 삶에서도 건우는 상당히 인기 있는 강사였고, 여학생들도 많이 좋아했었다.

그래서 극성까지는 몰라도, 지극정성인 학생들은 몇 번 경험했었다.

물론 지금처럼 폭발적이지는 않았다. 사람의 외모가 바뀐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건우도 의문이었다.

대체 뭐가 달라졌길래 이런 걸까?

천재적인 머리의 건우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손다정의 말처럼 여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애들이 얼마나 극성인지는 알죠.”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네? 바로 그거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빠순이와 다를 바 없다고요. 지금 최 선생님을 좋아하는 여학생들은 잠재적 빠순이들이라고요. 아직 학기 초라서 그렇지 점점 더 집착하는 애들이 늘어갈 걸요.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관찰하는 애들도 생길 거예요. 그러다 심해지면 밤낮으로 최 선생님 주변을 맴도는 아이들도 등장하겠죠.”

“에이. 그런 터무니없는…. 그건 너무 과장이 심하다.”

“과장인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알겠죠. 중요한 건 이미 짝사랑은 시작됐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디서나 조심해야 한다는 거예요.”

“농담을 너무 무섭게 하지 마세요.”

농담으로 치부하고 싶었지만 손다정의 얼굴은 꽤 진지했다.

건우는 앞뒤 안 가리고 자신을 따라다닐 학생들을 생각하자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하지만 그게 무서워 학원 강사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손다정의 말처럼 그저 조심 또 조심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여학생의 거짓말 하나로 인생의 나락까지 떨어져봤던 건우로선 더더욱 그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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