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36화 (36/256)

제36화

그 어둡고 컴컴한 곳에서,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그렇게 무참히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들자 미칠 듯이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돌아가셨으리라는 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추측하는 것과 그 모습을 영화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그런데 그냥 공중전화로 걸려온 전화라 경찰에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꿈을 믿는다 아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조사해볼 가치는 있겠다 싶은 겁니다.”

“그럼, 그럼 정말로 제 꿈이….”

“아아. 그냥 가능성만 말씀드린 겁니다.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시간이 상당히 지난 사건이라 뭔가 작은 건수라도 찾아서 파보려는 것뿐이니까요.”

“저… 그럼 사고 현장에 스키드 마크나 그런 건 남아있지 않았나요?”

“없었습니다. 비가 왔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긴 하지만….”

차분하게 설명하던 광우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건우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면 그냥 고의로 밀어버렸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건우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

“팀장님.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그래도 사람이 거의 즉사할 정도로 강하게 부딪혔으니 자동차도 멀쩡할 리는 없었겠죠? 그럼 사고로 인한 잔해가 남아있었을 텐데, 자동차 기종이나 그런 건 밝혀지지 않았나요?”

“남은 잔해로 보면 쏘나타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아시지만 우리나라에서 쏘나타는 거의 국민차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이 팔려서 그것만으로 범인을 잡긴 어렵습니다.”

“쥐색 2009년 쏘나타 트랜스폼. 자동차 번호 1X다 XXXX.”

“네?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을…?”

지금까지 여유롭게 상담을 하던 광우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방금 들었던 건우의 말은 그냥 간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미친놈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한 번만 조사해봐 주세요. 꿈에서 본 것이라 증언으로 채택하기는 어렵겠죠. 하지만 당장 쓸 만한 단서도 없는 상황인데 속는 셈 치고 조사만이라도 해주세요.”

“휴… 최 선생님.”

“네. 팀장님.”

“이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말씀하신 내용은 범인만 아는 사실입니다.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건우도 광우가 한 말의 의미를 잘 알았다.

“전혀 문제 될 것 없습니다. 저는 사건 당일 미국에 있었고, 사망 추정 시간에는 하버드 기숙사에서 개학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으니까요. 증인이 필요하면 100명도 더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한 번 미친 척해봅시다. 쥐색 2009년 쏘나타 트랜스폼. 자동차 번호 1X다 XXXX라고 하셨죠. 확실합니까?”

광우는 너무나도 진지한 건우의 모습에 체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건우가 말해준 자동차의 사양과 번호를 기록했다.

“네. 정확합니다.”

“그래도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어디까지나 꿈이니까요.”

“물론입니다. 저도 큰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혹시나’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네. 말씀하세요.”

“이건 절대 최건우 선생님 꿈에서 본 정보가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다들 미쳤다고 하겠죠.”

“아니요. 단순히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냥 익명의 제보 전화가 왔고, 그래서 제가 수사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래야 증거 채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의 없으시죠.”

“네. 이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뜬금없는 부탁을 해서.”

건우는 광우의 속마음이 어떨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누가 봐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미친놈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만약 꿈속 내용을 근거로 사건을 조사한다면.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서울지청 광역수사대 팀장이.

이 사실이 알려지면 광우는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럴 바에는 익명의 제보 전화가 왔다는 식으로 둘러대며 사건을 조사하는 게 현명한 판단이다.

“하핫. 그러게 말입니다. 이게 정말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사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다시 연락드리죠.”

“알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부터는 전화로 연락 주십시오. 부모님 사건과 관련된 일이라면 거기가 지옥이라도 반드시 찾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혹시라도 정말 꿈에서 본 정보가 사실인 경우. 그래도 그 사실은 저와 최 선생님 둘 만의 비밀로 남겨둬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광우는 노파심에 몇 번이나 더 강조했다.

“당연합니다. 괜히 이야기해봐야 믿어 줄 사람도 없고, 언론의 이슈거리가 될 생각도 없습니다. 최 팀장님. 전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만든 뺑소니범만 잡으면 됩니다. 반드시 그놈을 잡아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마음이 정말 진심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완벽하게 자신의 알리바이를 댔지만, 알려준 정보가 사실이라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건우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장만복 회장의 부탁을 생각해서도, 그리고 경찰로서 자신의 직감으로 봐도 그는 범인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직감마저 속이는 진짜 무서운 흉악범도 겪어본 광우였기 때문에 확신은 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추후에라도 저에 대해서 조사하고 싶은 사항이 있다면 얼마든지 협조하겠습니다. 의심은 신뢰를 가지기 위한 과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심나면 언제든지 조사하세요. 사실 제가 말씀드린 사항에 대해 조사만 해주신다면, 저에 대해 어떤 의혹을 가지셔도 상관없습니다. 진실은 결국 밝혀질 거니깐요.”

“그래요. 일단은 믿어보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광우는 그렇게 믿어보겠다는 말만 남기고 한강 에듀케이션을 빠져나갔다.

***

Hi Everyone!

만나서 반가워.

나는 이쪽 방면 최고의 전문가이자 아티스트인 백 선생이야.

남들은 사기꾼이다 뭐다 하며 나를 욕하고는 하지만, 그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야.

나는 시중의 그런 허접스러운 사기꾼들과는 급부터가 다른 사람이거든.

사기는 단순히 테크닉이 아니라 심리전이며 타이밍 싸움이야. 굉장히 어렵고 고독한 싸움이지.

그런 어려운 분야에서, 청진기만 대면 그 타이밍이 언제인지 진단할 수 있는 사람이 나라는 사람이지. 그래서 내가 아티스트인 거야.

하수 사기꾼은 사람들의 돈을 빼앗고, 중수는 돈을 훔치고, 고수는 돈을 받는다는 말이 있어.

못 들어 봤다고? 그럼 당신은 평범한 사람이겠군. 사실 우리 세계의 명언 중 하나야.

그럼 나는 어디에 속하느냐고?

노노노! 나를 그런 평범한 범주에 넣지 마. 나는 그런 경지를 훌쩍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수준에 다다랐지.

내게 당한 사람들은 잃은 돈보다 가족이나 친구 이상으로 신뢰했던 나에 대한 배신감으로 더 큰 절망감을 느껴.

그게 얼마나 짜릿한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거야. 흐흐흐.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어.

그럼 답답한 마음에 내가 가서 알려주고 싶어져. ‘이 멍청아! 넌 지금 나한테 사기당한 거야!’라고.

대충 감이 와? 나의 경지는 이 정도야.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두고 트릭계의 아티스트라고 부르지.

트릭. Trick.

이 단어가 가장 많이 쓰이는, 첫 번째 의미라고 할 수 있는 뜻은 바로 ‘속임수’야.

솔직히 왜 마술 같은 쓰잘데기 없는 눈속임 따위를 트릭이라고 지칭하는지 모르겠어.

진정한 트릭, 진정한 속임수는 바로 사기야. 사기만이 트릭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어.

사람의 눈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훔쳐 그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트릭의 진정한 마지막 결정판.

그리고 그 결정판의 꼭대기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이 바로 나 아티스트 백 선생이다 이 말씀.

그런데 몇 달 전에 그런 나의 자부심이 무너지는 일이 생겼어.

그게 다 내 밑에 있는 휘발유라는 녀석 때문이야. 바보 같은 자식.

수백억짜리 작업이 있어 한창 수술 중이었는데, 휘발유 이 자식이 괜한 욕심을 부렸어.

수술 중이던 건물에 붙어 있는 집이 하나 있었거든. 그걸 보러 사람이 온 거야. 그냥 이미 계약했다고 돌려보내면 되는 일을 멍청한 녀석이 그 사람들을 내 앞으로 데려온 거지.

눈앞에 수백억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인데, 고작 1~2억짜리 수술이 눈에 들어오겠어? 그냥 돌려보내려고 했지. 그런데 부부로 보이는 두 연놈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이는 아니겠어?

두 사람은 재수 옴 붙은 거지. 난 누가 내 앞에서 행복해 보이는 표정 짓는 걸 아주 싫어해. 스크래치를 내고 싶거든. 갈기갈기 찢고 싶다고 해야 하나.

내가 이상해? 너희라고 다를 것 같아?

왜? 너무너무 귀여운 꼬마아이를 보면 깨물거나 꼬집어주고 싶고 그러지? 그거랑 똑같은 거야.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도 있지? 축하는 해주지 않고, 오히려 약 오르는 게 우리들이라고.

그게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사악한 근성이거든.

그러니까 나를 욕할 게 없다고. 난 당신들보다 그런 감정이 좀 더 발전했을 뿐이니까.

이런! 말이 다른 곳으로 샜네. 아무튼, 별로 힘도 들이지 않았어. 내가 이야기했지. 사기는 테크닉이 아니라 심리전이며 타이밍이라고.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만 알면 게임 끝이거든. 딱 보도 그 집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어. 그럼 끝이야. ‘Game over! The end!’라고!

사람은 원하는 게 생기는 순간 시야가 좁아지고 판단이 흐려지거든. 옆에서 뻐꾸기만 몇 번 날려주면 그다음부터는 그냥 쭉 고속도로야. 알아서 넘어오는 거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감히 내 앞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연놈들도 그렇게 알아서 넘어온 거야. 난 그들의 욕심에 살짝 부추긴 게 전부야.

그런데 말이야. 빌어먹게도 일이 꼬이려면 또 그렇게 꼬이기도 하더군.

내가 아무리 트릭계의 아티스트라고 해도 신은 아니잖아. 모든 것을 예측할 수는 없다고! 그냥 장난삼아 스크래치라도 내고 싶어 수술했던 그 건수가 갑자기 우리 발목을 잡기 시작할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진짜 어이가 없었지. 수백억 건수를 수술해서 기분 좋게 있는데, 그때 그 연놈들이 눈치도 없이 집요하게 나를 찾으러 다니는 거야.

물론 그런 사람들이 처음은 아니야. 당연히 들킨 적도 없고. 그런데 나에게 사기당한 사람답지 않게 생각 이상으로 머리가 좋은 인간이었다는 게 문제였어.

왜 그런 사람 있잖아. 평소에는 정말 사람 착하고 어리숙해 보이는데, 알고 보면 정말 머리 좋은 인간. 두 사람이 그런 류였어.

사람이 순진해서 한 번은 속일 수 있어. 그런데 눈이 뒤집혀 그 좋은 머리를 이용하기 시작하는 순간 정말 집요하고 무서워지는 거지.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기 시작하니까 속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지더라고.

젠장! 내가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어. 만나는 사람마다 아이큐 검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사기꾼으로서 정말 자존심이 상했지만, 돈을 돌려줄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어. 괜히 그놈 때문에 잡혀서 수백억까지 토해낼 수는 없으니까.

그런 종류의 인간은 돈만 돌려주면 더 이상의 원한은 가지지 않는 부류거든. 착한 본성은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런데 내 밑에 있는 휘발유와 로보캅이 반대하는 거야. 물론 내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혹시라도 아니면 어떡할 거냐고 따지더군.

괜히 돈 돌려주려다가 꼬리가 잡히면 그게 더 골치 아프다는 거였지. 틀린 말은 아니었어.

그래서 내가 물었거든. 그럼 어떻게 할 거냐고. 무슨 좋은 방법이라고 있냐고.

그랬는데 아뿔싸 로보캅 자식이 씨익 웃는 거야.

이 자식은 머리는 나쁜데 싸움 실력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거든. 웬만한 무술 경관 네댓 명이 달라붙어도 로보캅 하나를 못 이겨. 그래서 수술할 때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항상 데리고 다니지. 그만큼 든든하거든.

이 녀석에게도 단점이 있는데, 머리 나쁜 거? 아. 그건 중요하지 않지. 생각 따위는 하지 못하게 하면 되니까. 넌 생각 따위 하지 마. 생각은 내가 한다. 이런 식이지.

그게 뭐냐면, 필요 이상으로 잔인해. 내가 좀 또라이 기질은 있어도 사람을 죽인 적은 없거든. 그런데 로보캅은 아니야.

마구잡이는 아닌데, 필요하다 싶으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살인을 저질러 버리지. 그런 눈빛을 보일 때는 나도 막을 수 없어. 바로 좋은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웃으며 짓던 그 눈빛. 그럼 나도 어쩌지 못해.

어쩌겠어. 이미 눈은 뒤집혔고 나도 어떻게 방법이 없는데. 그냥 뒤처리나 깔끔하게 하라고 했지.

그 연놈이 좀 안 되긴 했어. 괜히 내 앞에서 행복한 표정을 짓다가 저승길로 가는 특급열차에 승차하게 되었으니.

머리 나쁜 놈 둘이서 계획을 짜면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실행하기 쉬운 계획을 짜줬어. 뺑소니로 위장하기.

사람 죽인 적 없다고 했지 않냐고?

살인은 싫어하지만, 내 손에 피만 안 묻힌다면 사실 크게 상관없기도 해. 내가 직접 안 죽이면 살인은 아니잖아.

그렇게 계획을 짜는 동안 그 연놈들은 어느새 우리 턱밑까지 쫓아왔더군. 어쩌겠어. 세웠던 계획을 수정했지.

조금 떨어진 공중전화로 전화해서 돈을 돌려주겠다고 했어. 대신 경찰에 연락하면 그냥 잠적하겠다고 위협도 하고.

당연히 어떻게 믿느냐고 나오더군. 믿기 싫으면 오지 말라고 했어.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이쪽 방면에서 일하지 않은 이상 일반인이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

우리 같은 족속은 필요하다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거든. 순진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그걸 몰라. 변수에 포함할 생각도 못 하지.

그러니 겁도 없이 자기 죽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약속 장소 근처에 나타났겠지만.

그다음은 말 안 해도 알겠지? 모르겠다고? 모르긴 뭘 몰라. 영원히 안녕이지. 유식한 말로 아디오스~

그래도 몰라? 요단강을 건넜다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이리로 와. 내가 죽여줄 테니까.

모든 일은 깔끔하게 처리했어. 사고가 났던 지역 담당 형사도 하나 구워삶았지. 예전부터 알던 놈이라 일부러 그쪽 지역에서 사고를 냈어. 그래야 안전하잖아.

더 이상 걱정할 문제는 없었어. 사건은 이미 몇 달이 지났고, 피해자의 가족도 포기한 듯 보였어.

조금만 더 숨어 살면 우리에 대한 관심은 모두 없어질 것이고, 그럼 수백억의 돈을 가지고 흥청망청 신 나게 사는 거지.

여자도 후리고, 여자도 후리고, 여자도 후리고.

크크크. 생각만 해도 즐거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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