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34화 (34/256)

제34화

시간이 지나 건우와 손다정이 준비해왔던 초초장학회(C.C.S.)의 발족식이 열리는 날이 다가왔다.

건우는 손다정이 준비한 장학금 후보자 명단에서 총 다섯 명의 학생들을 뽑았다.

세 명은 소년소녀가장, 한 명은 동생과 함께 보육원에서 지내고 있는 고아.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부모님이 계시지만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형편이 매우 어려운 학생이었다.

모두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성적은 항상 최상위권을 유지하는 우수한 학생들이었다.

모범생들이었기 때문에 후원해주는 단체가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만약 장학회를 만든 이유가 완전히 순수한 지원에 있었다면, 후원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뽑았을 것이다. 그러나 건우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기업들이 운영하는 장학회가 있다. 대한민국 수위를 다투는 기업답게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정말 많이 후원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지원을 받아 자란 아이 중에는 장성한 후 해당 기업을 위해 유무형의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흔히 S장학생, H장학생 출신이라고 부른다. 학연, 지연처럼 새로운 인연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그 회사가 그것을 의도하고 학생들을 도왔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기업 논리로만 놓고 봐도 상당히 괜찮은 투자였다고 할 수 있다.

장학제도 운영으로 기업 이미지가 높아지고, 세금 혜택을 받고, 충성스러운 인재들까지 얻는 1타 3피의 효과가 생기니 말이다.

그런 대기업이 운영하는 장학회와 건우의 초초장학회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난다. 하지만 건우는 그 이상 가는 장학회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건우가 가진 자신감의 가장 큰 근거는 바로 스킨십이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장학회의 후원을 받는 학생들이 그 기업의 오너를 만나는 일이 얼마나 될까?

거의 없거나, 장학금 수여 행사를 할 때 먼발치에서 얼굴만 한 번 보는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그런데 초초장학회는 그렇지 않다. 고등학생 시절뿐만 아니라 대학에 가서도 여전히 근로 장학생으로 일할 수 있고, 대학교 3학년부터는 중학생을 대상으로 강의할 기회도 제공할 예정이었다.

이런 장학회의 시스템 상 건우와 학생들은 거의 매일 만날 수밖에 없었다. 한때는 공부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한때는 강의에 대한 조언자로.

가끔은 고생한다고 밥도 사주고 대학생이 되면 술도 한잔 할 수 있게 된다.

가끔은 장학생 아이들만 모아 따로 강남의 부자 아이들이 그렇게 받고 싶어 하는 특별 강의도 할 생각이었다.

최소 몇 년 동안 자신들의 지원해주는 장학회의 실질적 책임자인 건우와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스킨십을 나눈다면, 과연 아이들은 건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 학생들은 광신도 못지않게 열렬하게 건우를 추종하게 될 것이다.

설사 광신도까지는 아니라도 건우에 대한 호감이나 존경심 정도는 자연스럽게 생길 가능성이 높다.

건우는 10년 20년의 미래를 내다보며 장학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장학회의 첫 번째 혜택을 받을 학생들을 뽑는데, 굉장히 심혈을 기울였다.

후보자를 뽑아 일일이 상담했고, 또래 아이들 앞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학생은 직접 가서 설득하기도 했다.

그렇게 공을 들이다 보니 아이들에 대한 애정도 생겼고, 반드시 뽑아야겠다고 마음먹을 만큼 탐나는 학생도 있었다.

정말 성실하고 똑똑했으며, 자신이 보기에는 반드시 성공할 학생.

그런 학생을 다른 곳에서 지원받는다는 이유로 탈락시키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분명히 초초 장학회를 빛낼 아이였다.

처음에는 3명만 뽑아 조촐하게 시작하려던 장학회를 5명으로 늘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매달 150만 원의 생활지원비와 대학졸업 때까지 학비 전액 보조. 로스쿨이나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면 그때까지 드는 비용도 지원해준다.

상당히 파격적인 지원 조건이었다.

한 사람을 지원하는데 등록금까지 포함하면, 1년에 3,000만 원 정도의 돈이 든다. 5명이면 1억 5,000만 원이다. 고3부터 지원한다고 해도 대학졸업까지 4년이니 최소 5년을 지원해야 한다.

그럼 한 기수를 지원하는데 드는 비용만 7억 5,000만 원이다.

거기다 로스쿨이나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면 지원 비용은 더욱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계속 기수가 추가된다면, 1년 동안 장학금 운영에만 대략 10억 가까운 돈이 들어간다는 계산이 나온다.

건우가 처음에 3명으로만 시작하려 했던 것도 생각 이상의 엄청난 비용이 가장 큰 이유였다.

말이 10억 원이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그 돈을 쓰는 건 웬만큼 부자가 아니고서는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초초장학회 발족식이 열리는 날.

“형. 축하해. 그리고 고마워.”

동우를 비롯한 3남매는 왠지 조금은 긴장되어 보이는 건우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축하인사와 함께 고마움을 전했다. 이 장학회는 건우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들에게도 매우 의미가 있었다.

“하하하. 무슨 꽃다발까지 이렇게 가져왔어? 아무튼, 고맙다. 너희 자리도 마련해뒀으니까 저기 가서 앉으면 돼.”

“그리고 이거.”

동생들을 자리로 안내하려고 하는데, 동우가 건우에게 흰색 봉투를 건넸다.

“응. 이건 뭐야?”

“쑥스럽지만 이것도 좀 보태줘.”

봉투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돈이 들어있었다. 30만 원 정도의 돈이었다.

“이 돈은 뭐야?”

“우리가 시범적으로 미리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면서 돈을 받았잖아. 그런데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면 되고, 정우는 형이 사다 놓은 음식재료로 요리하면 되고, 은우는 그냥 아이스크림을 줄이겠대. 아무튼,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이야.”

“진짜 너희가 모은 돈이라고?”

“명색이 부모님 이름을 딴 장학회인데, 우리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지금은 이렇게 용돈을 모았기 때문에 큰돈이 아니지만, 나중에 우리도 돈을 벌게 되면 꼭 초초장학회에 도움이 되고 싶어.”

순간 건우의 말문이 탁 막혀버리고 머릿속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사실 용돈을 주면서도 너무 많이 주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했었는데, 전부 기우였다.

동생들은 자신이 생각한 이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예전 삶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동이었다.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감과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야. 너, 너희. 아우. 이 녀석들 이리 와봐. 한번 안아보자.”

좋은 날 눈물을 흘리면 안 될 것 같아 겨우 울음을 참고, 고맙다고 기특하다고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냥 가슴이 뭉클해서 말보다는 동생들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4남매는 한참이나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서 있었고 곧 식을 시작한다는 손다정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서로의 품에서 벗어났다.

많은 사람이 오지는 않았다. 김상문 원장, 학원의 임원급 이상 강사진, 건우의 친, 외가 어른들과 가족 그리고 장학금 대상자인 학생들과 그들의 가족.

진심으로 축하해줄 사람들만 모였다. 조촐하다면 조촐하고 성대하다면 성대할 수 있는 그런 모임이었다.

사실 건우는 이런 행사를 꼭 해야 하는지 의문을 표했다. 그런 그를 손다정이 설득했다.

이런 행사에 참석해 누군가 한 명이라도 감동을 받는다면 그게 남는 거라고도 이야기했다.

손다정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장애를 가지고 있어 자식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했던 학생의 부모는 식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장학금 수여식이 시작되었다. 장학금 전달식과 같은 요식행위도 빠짐없이 했고, 이제 건우의 축사만 남겨둔 상태였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최건우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여기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좀 쑥스럽네요. 축사라는 하지만, 꼭 고등학교 때 교장 선생님이 조회시간에 하시던 지겨운 훈시처럼 들릴까 봐 걱정도 됩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빨리 끝낼 테니까.”

건우의 가벼운 농담에 식장에는 웃음기가 돌았다.

“딱 하나만 부탁하겠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라? 아닙니다. 착하게 살아라? 그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편견을 가지지 마세요’ 이 말을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아시겠지만, 저와 제 형제들도 고아입니다. 몇 달 전 불행한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습니다. 그때 저는 심한 절망감을 느꼈고, 세상에 대해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냥 세상이 정말 미웠습니다. 불공평해 보였습니다. 신이 있다면 찾아가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족 때문에 동생 때문에 그런 분노를 억누르고 살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렇게 세상에 편견을 가지고 원망만 하며 살아가면 결국 자기만 상처받게 됩니다.”

“저는 참 운이 좋았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건 불행이 분명하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 불행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운을 여기 있는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는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고 살았다면, 이제는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도 가져보세요.”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새로운 세상이 보일 겁니다.”

“아! 이런. 1분 안에 끝내려고 했는데, 1분이 넘어버렸네요. 그래도 마지막 당부는 해야 할 것 같으니 지루하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혹시 여기서 일하면서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세요. 저기 옆에 테이블을 보면 여러분 또래의 남학생 보이죠? 저 녀석이 우리 집 둘째입니다. 올해 고2가 됩니다.”

“그러니 저를 학원 강사가 아니라 친형이나 친오빠처럼 생각하고 찾아오세요. 그래도 껄끄러우면 저 녀석을 통해서 말씀하셔도 됩니다. 언제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럼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우리 행복 합시다.”

재능도 있고 근성도 있다. 그냥 내버려둬도 어떻게든 성공할 아이들이다.

단지 걱정되는 게 하나 있다면, 학생들이 예전의 자신이 겪었던 과오를 똑같이 밟으면 어떡하나였다.

건우는 세상을 참 많이도 원망했었다. 세상을 원망하다 보니 세상사에는 관심이 없고 항상 가족을 위해 돈 버는 일에만 열중했다.

삶 속에 자신은 없고, 가족을 우선하는 모습. 그게 얼마나 스스로를 피폐하게 만드는지 건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들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아이들이라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그래서 이 아이들을 장학생으로 뽑았는지도 몰랐다.

바꿔주고 싶었다. 예전의 건우와는 달리 무조건 희생만 하지 않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밝은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지금 당장 바뀌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곁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언젠가 그렇게 변할 거라고 믿었다.

***

어두컴컴한 밤하늘. 비마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도 켜지지 않아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어두운 그 길을 걷고 있었다. 뭔가 힘든 일을 겪은 듯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꼭 잡은 두 손만큼은 놓지 않고 나란히 길을 걸었다.

Rrrr

한참을 길을 걷는데, 남자의 휴대전화로 전화가 걸려왔다. 남자는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뭔가 반가운 소식인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전화를 끊고 잠깐 대화를 나눈 남녀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길이 끝날 때쯤 건널목이 나왔고,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자 급한 듯 빠르게 도로를 건넜다.

부우웅.

그때 맞은편에서 자동차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맹렬한 속도였다.

두 사람이 차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남자는 한 걸음 나아가 여자의 몸을 감쌌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쾅!!!

강렬한 충돌음이 들렸고, 남녀의 몸은 하늘로 높이 솟구쳤다가 땅으로 떨어졌다. 잠깐 멈춰섰던 자동차는 내려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이 누워있는 도로는 핏물과 빗물이 섞여 붉게 변했다.

남자는 절명한 듯 움직임이 없었고, 여자는 힘겹게 눈을 떠서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눈동자는 서서히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는 물기가 피와 섞여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힘겹게 의식을 유지하던 여자도 얼마 가지 못하고, 짧은 경련과 함께 고개를 떨궜다.

“악! 안 돼! 안 돼에에에! 헉헉. 아…! 꿈이었구나.”

건우는 비명을 내지르며 잠에서 깼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젖어있었고, 너무나도 생생한 꿈 때문인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흐음….”

그가 지른 비명에 옆에서 자고 있던 은우가 뒤척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충격에서 많이 벗어났지만, 아직도 건우 품이 아니면 잠을 잘 못 자는 막내였다.

“괜찮아. 괜찮아. 어서. 더 자.”

막내의 등을 토닥이며 달랜 건우는, 은우가 다시 깊은 잠이 들자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빠져나왔다.

“아버지, 엄마. 정말 꿈처럼 그렇게 돌아가신 건 아니죠?”

분명히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꿈이었다. 너무나도 처참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꿈이라고는 하지만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모습은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특히 마지막에 어머니가 흘리던 그 애통한 눈물은 건우의 심장에 그대로 아로새겨졌다.

그 고통이 느껴져 심장이 욱신욱신했다.

어떻게 부모님을 죽음으로 몰았던 뺑소니 사건을 잊고 있었을까!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예전에도 그랬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한동안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학원 일도 익숙하지 않았고, 집안일도 젬병이었다.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문득 부모님 생각이 떠올라 경찰서를 찾아갔을 때는 이미 사고가 난 지 반년이 지났을 때였다.

피해자의 아들조차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건인데, 경찰들이 관심을 가질 리는 없었다.

사건은 이미 방치되어 있었고, 지금부터 재조사해봐야 범인을 잡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핀잔만 들었었다.

결국, 사건은 완전히 미궁으로 빠졌고 사건조사는 그렇게 유야무야 넘어가 버렸다.

만약 오늘 꿈을 꾸지 않았다면 똑같은 실수를 또다시 반복할 뻔했다.

아니, 이미 반복하고 있었다. 반년이나 4개월이나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은 똑같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그때처럼 사건도 해결 못 하는 무능력한 경찰에게 오히려 핀잔만 듣고 무기력하게 돌아서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범인을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래도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해서라도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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