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33화 (33/256)

제33화

“한 달에 오천만 원을 준다고 하더라. 그리고 모의고사 수능 백분위가 1% 오를 때마다 보너스 이천만 원.”

“헉! 오천만 원? 대박. 그런 제안을 할 정도면 공부를 어지간히 못 하는 애라는 이야긴데. 조금만 신경 써서 가르쳐서 5%만 올려도 일억이네, 일억. 세상에 일억이라니. 형 그거 내가 하면 안 될까? 내가 가르쳐도 5%는 올려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야! 그렇다고 때릴 것까지야. 아이고, 아파라.”

건우는 다른 누구보다 동우의 변화가 참 의외였다.

예전 삶에서는 항상 무뚝뚝했던 동생이었다. 한때는 막내와 투닥거리기도 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너무 냉랭하게 동생들을 대해서 거리감이 느껴지기까지 했었다.

그랬던 동우가 예전보다 더 밝게 변했다. 가끔은 과하게 오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스스로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안쓰럽다가도, 가족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라 생각하니 대견해 보였다.

가끔 과해도 너무 과해서 오늘같이 너무 오버할 때는, 지금처럼 머리를 한 대 쥐어박기도 한다.

아프다고 엄살떠는 동우와 그 모습을 보며 초딩이라고 놀리는 은우를 보며 건우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게 아니잖아.”

“그럼? 일 년 동안 과외하면 수억을 벌 수 있다고 자랑하는 거야?”

“쯧. 하여간 단순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런 엄청난 제안이 들어올 만큼 형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거야.”

“뭐야. 그 말이 그 말이구먼. 결국, 형이 대단하다는 거잖아.”

“그 말이 아니라. 형의 개인 교습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뜻이야. 그럼 계산을 해볼까? 너희가 사무실에서 내가 해주는 개인 교습을 받는다면, 너희는 얼마를 낼 수 있어?”

“에이. 형제끼리 무슨.”

“그렇지? 그래 형제끼리 무슨 돈이야. 그러니 용돈은, 아니다. 그냥 근로 장학금이라고 하자. 일주일에 근로 장학금은 동우는 칠만 원, 정우는 오만 원. 오케이?”

뭔가 분명 이상한 것 같은데 동우는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형.”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민을 하던 정우가 건우를 불렀다.

“그래 정우. 왜 질문 있어?”

“그런 건 다 좋은데 나의 취미생활은 인정해줬으면 좋겠어.”

“취미생활? 요리 말하는 거지?”

“응. 매일 학원에 붙어 있으면 요리할 시간이 없잖아.”

“녀석. 요리가 그렇게 재미있어?”

“뭐, 일단은 그래. 이 취미가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정우는 중학생이라서 시간을 조정하려고 했어. 일주일에 세 번만 일해. 월, 수, 금. 그럼 괜찮지?”

“응. 괜찮아.”

“오빠. 나는?”

그때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은우가 강렬한 열망(?)이 담긴 눈동자로 건우를 쳐다봤다.

두 오빠도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자신만 소외될 수 없다는 듯 기대감이 잔뜩 담긴 눈망울이었다.

“우리 은우? 우리 은우는 아직 어리니까, 오빠 구두 닦는 일을 하자. 이틀에 한 번 구두 닦고 일주일에 삼만 원 어때?”

“싫어. 그런 거 말고.”

“응? 왜? 오빠 구두 닦기 싫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나만 집에 혼자 있어?”

“아니지 왜 은우가 혼자 있어. 할머니가 은우랑 놀아주실 텐데. 저녁에는 고모도 들릴 거고. 할머니가 바쁘시면 외할머니도 가끔 오실 거야. 좋지 않아?”

은우는 할머니나 외할머니 그리고 고모와 함께 있는 시간이 물론 즐겁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가족이었다.

오빠 셋은 건우의 사무실에서 함께 지내는데 자신만 외톨이가 되어 혼자 집에 남는 것은 싫었다.

“싫어. 나도 오빠들처럼 큰오빠 사무실에서 있을 거야.”

“응? 오빠 사무실에? 거긴 TV도 없고, 무지무지 심심할 텐데. 그냥 집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은우는 너무 어렸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TV보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음악방송을 보며 흥얼거리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TV를 핑계로 설득하려고 했는데, 건우의 의도는 은우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래도 오빠들이랑 같이 있을 거야. 큰오빠 나만 따돌리는 거야?”

그냥 집에 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건우의 말에,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고집을 피웠다.

남동생이라면 모를까, 은우는 여동생이었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신지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결국, 마음이 약해진 건우는 은우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그래. 알았어. 은우. 대신 정우가 오는 월, 수, 금요일만 학원으로 나오는 거야.”

“응. 좋아. 그럼 난 학원에서 뭐해?”

확실히 여자는 여자였다. 그것도 여우기질이 다분히 있는 여자였다.

건우의 허락이 떨어지자 언제 눈물이 그렁그렁 그렸느냐는 듯 활짝 웃으며, 학원에서 할 일까지 당당히 요구했다.

건우는 은우의 그런 영악함에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그냥 모른 척했다.

“흠. 어쩌지. 우리 은우는 아직 어려서 강의실 청소는 시키면 안 되는데. 그래! 그럼 은우는 오빠 사무실 청소 담당. 사무실에 가보면 오빠가 쓰는 책상과 여러 명이 한꺼번에 공부할 수 있게 만든 큰 책상이 있거든. 올 때마다 걸레로 거길 깨끗하게 닦는 거야.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어. 내가 얼마나 걸레질을 잘하는데. 헤헤. 큰오빠 고마워.”

따지고 보면 청소까지 시키는 악덕 오빠인데도 은우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건우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 모습을 본 동우가 ‘어휴, 저 여우’라고 중얼거리며 주먹을 들었다가 놨지만, 그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새겨져 있었다.

“형. 그런데 요리 재료비가 좀 많이 들어가거든. 일주일에 오만 원이면 적지 않은 돈이라는 건 아닌데, 그래도 요리 재료비는 따로 주면 안 될까? 어차피 요리한 음식들은 전부 우리 가족이 먹는 거잖아. 그러니 재료도 좋은 걸 써야 하고. 응?”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느낀 정우가 평소라면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냈다.

“형. 나도. 요즘 책을 많이 사서 읽는데, 책값이 너무 비싸. 아무리 얇은 책도 최소 만 원 가까이 한다고.”

이에 질세라 옆에 있던 동우도 자신이 필요한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건우는 잠깐 고민했다. 동생들에게 주는 용돈은 또래 친구들에 비해 적은 금액이 아니다.

고등학생 용돈이 일주일에 오만 원. 한 달이면 4주가 조금 넘으니까, 이십만 원이 넘는 용돈을 한 달에 받는 셈이다. 절대 적지 않은 돈이다.

게다가 일을 하기로 한 다음 주부터는 매주 칠만 원의 돈을 주기로 했다. 한 달이면 삼십만 원.

알뜰하게 사는 성인의 한 달 용돈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많을 수도 있는 금액이다.

하지만 건우가 한 달에 벌어들이는 수입은 최소 억이다. 참고서가 나오고 인터넷 강의가 시작되면, 수입은 억 단위를 훌쩍 뛰어넘을 게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남들과 똑같은 기준을 들이대며 무조건 절약만 강요하는 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퍼주기도 곤란했다.

돈은 넉넉하게 줄 수 있지만, 그전에 돈에 대한 소중함은 알게 하고 싶었다. 동생들에게 일을 시키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동우와 정우는 건우가 만든 기준선을 묘하게 치고 들어왔다.

예전의 그였다면 바로 그러자고 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건우는, 예전의 그와는 달랐다.

“그건 좀 곤란할 것 같다.”

건우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기대에 찼던 두 동생의 얼굴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 모습에 솔직히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예전의 삶에서처럼 경제관념이 부족한 동생들로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진정한 사랑은 매를 드는 것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정우야.”

“응. 형.”

“난 네가 무엇이 되고 싶어 하던 무조건 지지할 거야. 그게 의사든 요리사든.”

“고마워, 형.”

“그리고 네가 요리에 관심을 가지는 모습도 보기 좋아. 행복해 보이니까. 그런데 말이야.”

잠깐 말을 끊은 건우가 따뜻한 눈으로 정우를 바라봤다. 건우를 바라보는 정우의 눈에는 신뢰가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며 건우가 편안하게 말을 이었다.

“넌 수학을 공부할 때 어떻게 공부하니?”

“수학? 글쎄. 그냥 열심히?”

“내 말은 수학을 공부할 때 원리를 중심으로 공부해? 아니면 그냥 공식을 달달달 외워?”

“당연히 원리를 중심으로 공부하지. 원리만 이해하면 공식은 저절로 외워지는걸.”

“그렇지? 그런데 왜 요리는 그렇게 원리 중심으로 공부하려고 하지 않아?”

“그게 무슨 뜻이야?”

“왜 자꾸 좋은 재료로만 음식을 만들려 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재료를 가지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야 그게 진짜 훌륭한 요리사라고 생각해. 그래서 말인데, 화려한 스테이크보다는 구수한 된장찌개나 매콤한 김치찌개를 공부하는 게 우선이 아닐까? 그런 재료는 집에 있어.”

“아!”

정우는 짧은 감탄만 한 번 내뱉고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건우와 정우 사이에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그런 눈빛의 대화가 오갔다.

그런 기본적인 사실을 알려줘서 고맙다는 뻔한 인사도, 용돈을 많이 주기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라는 구질구질한 변명도 둘 사이에는 필요 없었다.

“그리고 동우.”

“어. 그래 형. 이야기해.”

“요즘 책 많이 읽고 있어?”

“그럼. 정말 재미있어. 공부 때문에 자제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틀에 한 권은 읽는 편이야.”

“그래. 작가가 꿈이라고 했으니까, 열심히 책을 읽는 게 중요하지.”

“그런데 말이야.”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이제 형이 ‘그런데 말이야’라고 이야기할 차례잖아.”

동우는 조금은 진지한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는지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받았다.

“하하하. 녀석. 그래. 그런데 말이야. 너 학교 도서관에는 가본 적 있어?”

“학교 도서관? 아니. 없는데.”

“거기 가면 생각보다 책이 많다. 세계문학전집, 한국문학전집 같은 딱딱한 책만 있는 게 아니라 생각보다 재미있고, 감동적인 책도 많이 있을 거야.”

“그래? 그건 나도 몰랐네. 한번 가봐야겠다.”

“그리고 국립중앙도서관이 우리 집 바로 근처에 있어. 거긴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책이 있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명색이 국립중앙도서관인데. 형 말을 들어보니 책 읽을 곳은 많구나. 나는 왜 그동안 그런 생각을 못 했지?”

“도서관을 공부하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그럴 수도 있어. 어쨌든, 도서관을 이용하다가 정말 소장하고 싶은 책이 생기면 그럴 때 책을 사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야. 네 나이에는 깊이보다는 선입견 없이 다양한 종류의 책을 읽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고마워. 흐흐흐. 생각만 해도 벌써 행복하다. 지금부턴 돈 걱정 없이 보고 싶은 책은 언제든 볼 수 있는 거잖아.”

책을 살 돈은 따로 달라는 부탁은 거절당했지만, 동우의 표정은 환했다.

건우는 과거의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 삶에서는, 동생들이 부탁하면 무조건 들어줬다. 부모님도 안 계신데 괜히 기죽이기가 싫었다.

그런데 그건 어쩌면 건우의 상상이 만들어 낸 오해였는지도 몰랐다. 지금의 동생들은 전혀 실망하거나 기죽은 모습이 아니었다.

알아듣게만 이야기하면 충분히 납득하고 이해하는 아이들이었다. 대화가 통하는 착한 동생들.

건우는 혹시나 싶어 자신의 품에 안겨 앉아 있는 은우를 보며 말했다.

“우리 은우는 뭐 필요한 거 없어?”

조용히 오빠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은우는 건우의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있을 것 같은데. 은우야 솔직하게 이야기해봐. 응?”

“음.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만 있으면 돼?”

“응. 아이스크림.”

“그럼 좋아! 동우와 정우 부탁은 못 들어줘도, 우리 은우가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은 사줘야지. 지금 당장 사러 가자.”

“형. 나도.”

“넌, 안 되는데. 살찌는데.”

“아, 형! 정말 사람 차별할 거야?”

“하하하. 알았어. 미안해. 그럼 다 같이 나가자. 오랜만에 배스킨라빈스나 갈까? 대신 내일 아침은 10km 뛰기다. 콜?”

“뭐? 10km 씩이나?”

“싫음 말고.”

“에잇 나도 모르겠다.”

“콜”

***

참고서 초안까지 전부 만들어 제출해버린 후, 건우의 일상은 그야말로 평화로웠다. 미래의 지식 덕분에 수업 준비는 수월했고, 동생들과의 사이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래도 한 가지 근심거리를 고르라면 정우였다.

건우가 셋째에게 구수한 된장찌개나 매콤함 김치찌개를 만들어보라고 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다.

집에 많이 있는 음식재료, 이를테면 계란, 감자, 무, 양파, 김, 멸치, 다시마, 파, 당근과 같이 건우가 항상 사다 놓고 즐겨 사용하는 기본 재료를 사용해서 음식을 만들어 보라는 뜻이었다.

예전 삶에서 아침은 항상 직접 만들었던 건우였고, 기본재료로 만드는 요리는 누구보다 잘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굳이 비싼 재료 없이 집에 있는 기본재료로도 얼마든지 훌륭한 요리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정우는 건우의 말을 잘못 해석했다.

된장 하나만 가지고 별의별 짓을 다 했다. 된장에 국수를 삶기도 하고, 국수와 된장을 볶기도 하고, 건우도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된장 피자를 만들어 내놓기도 했다.

심지어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해물을 기본 베이스로 한 해물 된장찌개, 사골육수를 기본으로 만든 사골 된장찌개, 김치찌개인지 된장찌개인지 정체가 불분명했던 김치 된장찌개, 된장 계란찜, 된장 라면, 된장 파전, 된장 볶음밥 등등 된장을 이용해 별의별 음식을 다 만들었다.

‘이런 된장!’

참다못한 건우가 이렇게 속으로 외쳤다.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자 건우는 ‘이 자식이 지금 음식 재료비를 따로 안 줬다고 반항하는 건가?’라는 생각까지 했었고, 동우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 ‘끄응’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되엔장’이라는 소리가 나온다며 하소연했다.

하지만 가족들의 사정이 어떻든 정우의 표정은 너무나도 진지해서 차마 그만 하라고 말리지는 못했다.

그저 앞으론 정우에게 무슨 말을 할 땐 항상 조심해야겠다는 뒤늦은 후회만 가득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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