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32화 (32/256)

제32화

- 건우의 집.

“집합. 집합. 큰오빠가 모두 집합하래. 집합. 집합.”

건우는 막내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동우와 정우도 좀 오라고 해줄래?’라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은우는 마치 엄청난 임무를 부여받은 것처럼 신이 나서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야. 꼬맹이 좀 조용히 이야기해도 다 들리거든.”

“집합. 집합. 최 초딩은 당장 거실로 모여라. 큰오빠가 집합하래.”

“어이구. 저걸 그냥.”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은우를 보고 동우가 한마디 했지만, 역시 동우의 말은 은우에게 쇠귀에 경 읽기도 되지 못했다.

“막내오빠. 막내오빠.”

동우가 거실로 향하는 모습을 본 은우는, 아직 나오지 않는 정우도 부르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물론 동우를 부를 때와는 달리 조금은 상냥한 목소리로…. 혀가 조금 짧아진 것 같고, 애교도 조금 섞인 것 같고.

은우의 엄청난 노고(?)에 힘입어 4남매는 빠르게 거실로 모였다.

“다들 모였지? 그럼 앉아서 들어. 오늘 이렇게 모이라고 한 건 ‘형이 가라사대’ 세 번째 조항을 발표하기 위해서다.”

“와아아아아.”

아직 두 번째 조항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는데 새로운 조항의 발표라니.

멋모르고 즐거워하는 은우와는 달리 동우와 정우의 얼굴은 급격하게 구겨졌다.

이번엔 어떤 고생이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 걱정이 되는 눈치다.

건우가 내세운 두 번째 조항은, 간단하게 말해 살을 빼자는 이야기였다.

그때부터 매일 아침 5km 이상을 뛰는 고통스러운 나날이 시작되었다. 좋아하는 야식도 금지당했다.

오죽 고통스러웠으면 건우바라기 정우의 얼굴마저 구겨졌을까?

“형. 세 번째 조항을 발표하는 건 좋은데, 이번에는 좀 살살 하자. 정말 힘들어.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는 더더욱. 이건 정말 아동 학대야. 학대!”

“어허. 동우 너 기관지가 약해서 겨울이면 고생했잖아. 그런데 요즘은 기침 안 하지? 추운 겨울에 밖에서 운동하는데도 괜찮잖아. 안 그래?”

“그러고 보니 그렇긴 하네.”

“그게 다 운동 효과야. 운동도 하지, 아침마다 산에 올라서 맑은 공기도 마시지. 몸이 건강해지니 기침도 안 하고 얼마나 좋아. 그러니까 학대니 뭐니 하는 헛소리는 집어치워. 아니면 진짜 학대가 뭔지 보여줄까? 원한다면 해줄 수 있는데.”

건우가 굉장히 사악한 표정을 지으며 동우를 위협했다.

“쳇. 알았어. 아! 무섭다. 대체 무슨 조항일지.”

“그렇게 원한다면야 바로 알려주도록 하지. 형이 가라사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

“그게 끝이야?”

“그래. 이게 바로 세 번째 조항이야.”

“그건 뭐야?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 우린 지금도 일한다고. 순번제로 돌아가긴 하지만, 아침도 하잖아. 청소도 하고 빨래도 개고. 그런데 또 무슨 일을 하라고?”

“밥이야 우리가 먹을 걸 만드는 건데 그게 무슨 일이야? 청소? 사람이면 자기가 어지른 건 자기가 치워야지. 그리고 빨래? 네 빨래를 네가 개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야?”

“아니 뭐. 그런 뜻은 아니야.”

투덜이답게 불평했지만, 건우의 논리적인 말에 동우는 금방 꼬랑지를 내렸다.

“내가 너희에게 용돈을 주고 있지? 동우는 고등학생이라 일주일에 5만 원, 정우는 3만 원. 은우는 2만 원. 그동안은 아무 대가도 없이 줬는데, 지금부터 그런 불로소득 같은 용돈은 없어.”

“형!!”

“오빠!”

“시끄러워 이 녀석들아.”

“형. 지금 우리 형편이 매우 어려워?”

“아니지. 살 집도 있고, 형 직장도 생겼고. 당장 걱정할 일은 없어.”

“듣기로 학원에서 꽤 인정받았다며? 그럼 돈도 잘 벌 거잖아. 잘 나가는 학원 강사는 학교 선생님들보다 훨씬 많이 번다고 하던데.”

“그것도 사실이야.”

“그런데 왜 용돈을 없애? 우리에게 주는 돈이 아까워?”

“그럴 리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겠지? 나 혼자 잘 먹고 잘살 거였으면 할머니에게 너희 맡기고 미국으로 갔지 않겠어? 그런 말은 좀 실망인데.”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모를까, 감정적으로 대들 땐 가차 없이 꾸짖는다. 건우가 예전과 달라진 점 중 하나다.

“미안. 방금 말은 실수야. 취소. 그럼 왜 그래? 아무리 학생이라지만, 우리도 돈은 필요하다고. 형도 불과 얼마 전까지 학생이었잖아. 그런데 우리 마음을 몰라?”

“알지. 왜 모르겠어. 친구들과 군것질할 때도 돈은 필요해. 자존심 상하게 매번 얻어먹을 수도 없고, 그렇게 매번 얻어먹었다가는 따돌림당할 수도 있고.”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이러는 거야?”

“큰형. 이건 정말 아니라고 봐. 솔직히 난 형에게 부탁해서 용돈 좀 올려달라고 부탁하려 했단 말이야. 요즘 요리하는데 재료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솔직히 형도 내가 만든 요리 맛있게 먹잖아.”

“큰오빠. 여자들은 남자는 모르는 그런 곳에 들어가는 돈이 있다고 할머니가 그랬어. 그런 것도 생각해주지 않고, 무조건 용돈을 없앤다니! 나도 이번만큼은 결사반대야.”

건우의 폭탄 발언에 은우까지 포함한 3남매가 오랜만에 일치단결하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돈을 없앤다는 건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돈이 없어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듣기로 건우는 학원에서 인정받아 돈도 잘 번다고 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돈을 아까워할 사람도 아닌데 왜 갑자기 용돈을 없애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 성급하게 따지지 말고 끝까지 이야기 듣고 찬성을 하든 반대하든 하도록 해. 어쩌면 너희에게 좋은 일일 수도 있으니까.”

“그래. 알았어. 용돈을 없앤다는 말에 좀 흥분했나 봐. 일단 얘기부터 해줘.”

“형은 조만간 C.C.S. 라는 작은 단체를 만들 거야.”

“C.C.S.? 그게 뭔데?”

“Choi’s Choice Scholarship의 약자이기도 하고, Choi&Cho Scholarship의 약자이기도 해.”

“스칼라쉽? 장학회를 만들겠다는 거야? 일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걸 다 만들어?”

“처음부터 거창하게 일을 벌이겠다는 뜻은 아니야. 미리미리 준비하는 셈 치고 작게 시작해야지.”

미래를 위해 세워둔 계획 중에는 게 장학회 운영도 들어가 있었다.

건우가 생각한 장학제도는 대기업 방식과 비슷하다. 순수한 지원이라기보다는 미래를 위한 투자.

단, 대기업처럼 돈이 넘쳐나는 건 아니라서 직접적인 금전 혜택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았다.

“아! 그놈의 초이즈 초이스는 하여간. 저번에는 초초교육이더니 이번엔 초이즈 초이스 장학회야? 그럼 줄여서 초초장이잖아. 무슨 초고추장도 아니고, 장학회 이름을 초초장이면 사람들이 정말 웃겠다.”

“작은형.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린 웃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린 웃으면 안 된다니?”

“큰형. 초이(Choi) 앤 조(Cho)는 혹시 우리 부모님이야?”

정우는 차분한 성격답게 건우가 말한 두 번째 의미를 금방 알아차렸다.

“그래 맞아. 아버지 성의 최와 어머니 성의 조를 따서 장학회 이름을 지었어. 그렇게라도 부모님을 기리고 싶었거든.”

“아오! 형! 그런 건 좀 바로바로 말해주면 어디 덧나? 난 그것도 모르고 초초 어쩌고 하며 놀렸잖아. 엄마, 아빠한테 미안하게 시리.”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된 동우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왜 그걸 날 탓해? 이야길 하려고 했는데 네가 먼저 나서서 초를 쳤잖아. 그러기에 경청하는 버릇 좀 들이라고 했지? 다른 사람 말도 제대로 못 듣는 녀석이 무슨 작가를 하겠다고.”

“작가는 내 이야기를 독자에게 하는 건데?”

“얼씨구.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절대 좋은 작가 못 된다. 작가가 되려면 독자와 소통을 잘해야 해. 상대의 이야기도 제대로 듣지 않으면서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주절주절 내뱉는다고 독자들이 읽어줄 것 같아?”

“알았어. 조심할게.”

건우의 잔소리에 동우의 어깨가 축 내려앉았다.

“그럼 다시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갈게. 부모님 성을 따서 장학회 이름을 지은 거라서 너희 동의도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난 좋아!”

“나도!”

부모님의 성을 딴 장학회라니 자기는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세 사람의 눈엔 오늘따라 건우가 유난히 듬직해 보였다.

“그런데 큰형.”

“왜 그래? 정우야.”

“장학회와 우리 용돈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거야?”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고. 장학회 후원 대상은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학생들이야.”

“우리와 비슷한 처지라고 하면?”

“소년소녀가장, 그리고 고아들을 대상으로 할 거야.”

“어떻게 도와줄 건데? 학비를 지원해 주는 방식이야?”

“그건 아니야. 내가 부자도 아니고 무작정 돈으로 해결할 순 없어.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 중에 성실하게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선발해서 도울 거야.”

“좋은 생각이네. 어쨌든, 우리 부모님의 성을 딴 장학회이기도 한데 좀 더 의미 있는 도움을 주는 게 좋겠지.”

건우의 생각에 동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너희의 도움이 필요해.”

“어떤 도움인데. 장학회 운영에 도움이 된다면 난 적극적으로 돕고 싶어.”

“은우는 어리니까, 일단 제외하고. 동우와 정우는 C.C.S. 음 동우 말처럼 초초장학회라고 하자. 아무튼, 초초장학회의 초대 장학생이 되는 거야.”

“우리가? 우린 형 덕분에 형편이 어려운 건 아니잖아.”

“그렇지. 그래서 장학금을 주지는 않고 용돈을 주려는 거야. 근로 장학생을 뽑을 생각이거든.”

“근로 장학생?”

“응. 학원 일을 도와주는 학생. 예를 들어 쉬는 시간에 칠판을 지우고, 책걸상을 정리하고, 책상 속에 들어있는 쓰레기를 치우는 정도의 일이겠지. 그 정도는 어렵지 않잖아.”

“윽! 좋은 일이긴 한데, 좀 쪽팔리겠다.”

“맞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또래 아이들 앞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이는 거니까. 어쩌면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광고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그래서 너희 도움이 필요한 거야.”

“아! 이제야 무슨 말인지 알겠다. 장학회 설립한 당사자의 동생들이 일하니 거부감을 가지는 아이들이 줄어들 수도 있겠네. 한편으론 근로 장학생을 은근히 무시하는 수강생이 나오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고? 형이 정말 머리가 좋긴 하구나.”

건우의 설명을 듣던 동우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감탄을 했다.

“동우 네 설명이 정확해.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도 자존심 상해하는 아이들이 있을 수도 있고, 근로 장학생을 무시하는 아이들이 생길 수도 있어. 그건 어쩔 수 없어. 그게 싫어서 장학금을 안 받겠다고 하면 그건 그 아이 선택이니까. 하지만 그런 안 좋은 인식을 가진 학생들의 숫자를 줄이려는 노력은 필요하잖아. 도와줄 수 있어?”

“음… 용돈은 많이 줄 거야?”

“하하하. 그럼. 넉넉하게 줘야지.”

지금 당장은 미약하게 시작하지만, 건우는 이 초초장학회를 상당한 규모의 단체로 키울 계획을 마련해뒀다.

대학교 2학년까지는 계속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게 하고, 교습 자격이 생기는 3학년부터는 자신이 운영하게 될 학원의 중학생 대상 강사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적성에 맞으면 정식 학원 강사로 스카우트할 수도 있고, 아니라도 장학금의 의미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

그게 끝이 아니다. 특별히 공부에 소질이 있는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도움을 줘서, 로스쿨이나 의대 학비까지 지원해줄 계획이었다.

순수한 지원의 목적도 있지만, 그들이 건우의 도움을 받아 사회적으로 성공하게 되면 훗날 역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깔렸다.

최소 10년 이상이 걸리는 장기 계획이다. 하지만 건우가 직접 가르쳐 명문대에 들여보낸다면, 그리고 그들이 건우의 계획대로 성장해준다면 누구보다 더 끈끈하고 응집력 있는 모임이 될 것이 분명했다.

“오오오! 넉넉하게? 형이 웬일이래. 그래서 얼마나 줄 건데.”

용돈을 넉넉하게 준다는 말에 동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동우는 일주일에 칠만 원, 정우는 일주일에 오만 원. 어때? 그 정도면 많지?”

“그게 어떻게 넉넉해? 형, 정말 세상 물정 모른다. 2014년 최저임금이 5,210원인 시대야.”

“70,000원 나누기 5,210원은 13.4357이야. 즉 네가 약 13.5시간을 일해야 칠만 원을 번다는 이야기지. 일주일에 그렇게 많이 일할까? 쉬는 시간에 칠판지우고 책걸상 정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합치면, 하루에 한 시간도 안 될 텐데. 일주일간 매일 일한다고 해도 7시간밖에 더 돼?”

건우가 핵심을 찌르고 들어갔지만, 동우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후후. 뭐든지 잘 아는 형이 모르는 것도 있네. 순수하게 일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대기 시간도 일하는 시간에 포함되는 거야. 그러니까 쉬는 시간마다 청소하려고 대기하는 시간도 일당에 포함되어야지.”

“물론 일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으면 그렇지.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단다.”

“어째서?”

“너희는 학생이야. 학생의 본분은 뭐지?”

“다른 대답을 하고 싶지만, 형이 원하는 답은 아마 ‘공부’겠지?”

“그래. 공부 맞아. 그런데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대기만 하고 있도록 너희를 가만히 내버려둘 것 같아?”

“그…그럼?”

조금은 사악한 건우의 미소에 동우는 긴장을 하며 말까지 더듬었다.

“동우는 우리 학원에서 수업을 듣겠고, 정우 같은 경우는 대기 시간에는 내 사무실에서 공부하겠지? 나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형 사무실?”

“응. 학원 7층에 가면 이 형님의 개인 사무실이 있단다.”

“설마 우리를 거기 데려다 놓고 감시하에 공부시키려고 개인 사무실을 만든 건 아니지?”

“왜 아니겠어? 당연히 너희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일부러 널찍한 공간에 사무실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어. 내부에는 샤워실을 겸한 화장실까지 있어. 밖으로 나갈 필요조차 없지. 오직 공부만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할까?”

“형! 그건 가… 감금이나 마찬가지라고!”

“후후후. 감금이라니. 동우야, 너 그건 아니?”

건우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욱 사악해졌다. 동우는 온몸에 알 수 없는 소름이 오돌토돌 돋는 걸 느꼈다.

“그…걸 알다니, 뭘?”

“요즘 형에게 은밀한 제안이 들어오고 있단다.”

은밀한 제안이라는 말에 동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은밀한 제안? 어…어떤 은밀한 제안? 형은 못생긴 건 아닌데, 그렇다고 꽃미남처럼 그렇게 예쁘게 잘생긴 얼굴도 아니잖아. 그런 형에게 누가 은밀한 제안을 해?”

“하여간 음흉한 자식. 속에 음란마귀라도 들었나? 생각하는 게 뭐 그따위야.”

“음란마귀라니! 형이 말을 이상하게 했잖아. 은밀한 제안이라며?”

“그래 은밀한 제안. 요즘 나보고 고액과외를 할 생각이 없느냐며 은밀하게 제의가 들어오고 있거든.”

“고액과외? 대체 얼마나 준다는데 고액이야?”

고액과외라는 말에 동우뿐만 아니라 정우와 은우까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대화에 집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