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햇빛 한 점 들어올 수 없는 지하의 넓은 사무실. 책장, 탁자, 책상, 의자 심지어 컴퓨터와 사무실에 있는 모든 가구와 사무용품까지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검은색 슈트를 입은 남자가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잘생긴 남자였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이 주변과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그의 붉은 입술은 흑백 톤의 사무실 덕분인지 핏빛처럼 새빨갛게 보였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사님.”
“어서 오세요. 정 실장님. 요즘 학원가 전체가 시끌벅적하다지요?”
“네. 어린 미꾸라지 한 마리가 하버드라는 간판 하나로 온통 진흙탕을 만들고 있습니다.”
“미꾸라지가 일으키는 흙탕물이라고 하기엔 너무 큰 것 같은데요.”
건우의 행보는 태풍과 다를 바 없지만 두 사람은 그런 분위기를 평가절하했다.
“그렇긴 한데. 그냥 잠깐 반짝하는 걸로 이사님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뉴스에까지 떠들어 대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자꾸 그러니까 그 미꾸라지 때문에 우리가 타격을 입은 건 아닌지 주변에서 은근히 물어보더란 말입니다. 마치 타격을 받길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꾸 신경이 거슬리는데 그 미꾸라지 치워버릴 수 없습니까?”
“당장은 어렵습니다. 모든 관심이 그쪽으로 쏠려 있어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직접적으로는 어렵다… 그렇군요. 그럼 간접적으로라도 하세요.”
“간…접적으로요.”
“왜요? 어려우십니까?”
“아닙니다. 곧 방법을 찾아 보고드리겠습니다.”
***
“저기 손 과장님.”
두 번째 회의를 마치고 회의실을 빠져나가려는데 손다정을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김기태 선생이었다. 무슨 일인지 그의 얼굴엔 상당히 고심한 흔적이 있었다.
“네? 말씀하세요. 김기태 선생님.”
“이걸 이야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무슨 일이신데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게 말입니다. 학원 내에서 이상한 소문이 하나 돌아요. 처음엔 그냥 뜬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내용이 굉장히 구체적이거든요. 소문이 커지기 전에 확실하게 확인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이상한 소문이요? 어떤 소문을 말씀하시는지….”
“최건우 선생이 조만간 군대에 입대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군대를요?”
“손 과장님도 놀라셨죠? 저도 처음 그 소문을 들었을 땐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에 회의실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손다정이 놀란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군대 이야기는 이미 건우에게 들은 게 있어서 걱정되지 않았다.
문제는 소문 그 자체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야긴데 어떻게 학원에 소문으로 돌고 있을까? 그게 손다정이 가진 의문이었다.
“그냥 뜬소문 아니고요?”
“그랬으면 저도 이렇게 손 과장님을 찾아오지 않았겠죠.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소문 내용이 굉장히 구체적이에요. 최건우 선생 나이가 겨우 20살 아닙니까?”
“그런데요?”
“딱 군대 갈 나이죠. 보통 학교에 재학 중이면 연기가 되는데, 최건우 선생은 학교를 휴학해서 연기가 안 됩니다. 그러다 보니 군대 가기 전에 잠깐 돈이나 벌려고 한강 에듀케이션에 들어왔다. 몇 달 있다가 군대 가니까 다른 학원을 알아보는 게 좋을 거다. 대충 이런 소문들입니다.”
“김 선생님. 혹시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으셨어요?”
“흠… 손 과장님 표정을 보니, 사실인가 보군요.”
김기태 선생은 굳어있는 손다정의 얼굴을 보고 소문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요. 그게… 휴… 사실이기도 하고 또 사실이 아니기도 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최 선생님이 군대 갈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것보다 김 선생님. 제가 판단하기에는 지금 이게 그냥 단순한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의도적이지 않고서는 소문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날 수 없거든요. 누구에게 들었는지 곰곰이 생각 좀 해보시겠어요?”
학원에서 건우의 군 문제를 아는 사람은 손다정과 건우를 제외하면, 장만복 회장과 김상문 원장이 유일하다.
소문이 돌 이유도 돌아서도 안 된다. 소문이 돌았다면 건우와 손다정의 대화를 누군가 엿들었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평소라면 별일 아니라며 넘어갈 수도 있다. ‘카더라 통신’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지금 한강 에듀케이션은 건우를 중심으로 상당한 규모의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안이 뚫렸다는 건 앞으로의 프로젝트 진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손다정은 매우 심각한 표정과 낮고 강한 어조로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소문의 진원지에 대해 알려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행정실 김단현 씨에게 들었습니다.”
“김단현 씨요? 약간 키가 크고 머리가 단발인?”
“네. 평소에 저랑 좀 친분이 있어서 이것저것 이야기하는데, 지나가는 말로 그 이야기를 꺼내더라고요. 지나가는 말로 듣기에는 사안이 너무 큰 일이라, 저도 좀 고민을 했습니다.”
“잘하셨어요. 다른 분들은 이 이야길 처음 듣는다는 표정인 걸 보니 다행히 소문이 크게 나지는 않은 모양이네요. 어차피 알게 될 거라서 말씀드립니다. 군대 문제가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그럼 정말 군대에 가는 겁니까?”
조금 전에 분명 안 간다고 했건만, 성질 급한 강사 한 명이 다급히 물었다. 한강 에듀케이션에서 건우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아서다.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최건우 선생님은 얼마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집안에 유일한 가장이 되었습니다. 세 동생은 미성년자이므로 군대는 가지 않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안심하시고, 더는 이상한 소문이 돌지 않도록 유념해주십시오. 그럼 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여기 있는 강사들에 의해 소문이 퍼질 수도 있다. 그래서 손다정은 건우의 군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설명했다.
설명이 말이 끝나자 대부분 강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손다정은 재빨리 회의실을 빠져나가 행정실로 향했다.
소문의 진원지인 김단현이라는 여자를 잡기 위해.
“김단현 씨가 누구죠?”
분노가 느껴지는 단호한 목소리가 행정실에 울려 퍼졌다. 모두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사무실 파티션 너머로 손다정이 보였다. 생각하기에 따라 남의 사무실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녀의 행동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반 직원들은 물론이거니와 이곳 책임자인 행정실장도 자라목으로 변해 손다정의 눈치만 봤다.
한강 에듀케이션 직원은 아니지만 가끔은 김상문 원장조차 눈치를 보는 사람에게 부당함을 따질 용기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 김단현 씨 없어요? 분명 행정실 김단현 씨라고 했는데.”
“저기… 제가 김단현인데요.”
손다정이 조금 전보다 더 날카로운 목소리로 묻자 그제야 오른쪽 구석에서 슬그머니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자가 있었다.
“그쪽이 김단현 씨예요?”
“네. 제…가 김단현인데 무…무슨 일이시죠?”
“최건우 선생님 알아요?”
“최건우 선생님이야 당연히 알죠.”
“아니요. 그런 거 말고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건 아닌데요. 대화도 나눠본 적이 없는 걸요.”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최건우 선생님이 군대에 가야 한다고 말한 거죠? 그거 굉장히 사적인 이야긴데 어떻게 안 거예요?”
“아…! 그…그게 있죠. 그러니까….”
“말 돌릴 생각하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해요. 앞뒤 안 맞으면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니까 지어낼 생각도 하지 마세요.”
“겨…경찰이요? 아니요. 흑… 그게요.”
서슬 푸른 살벌한 말투였다. 날이 잔뜩 서서 가까이 가기만 해도 살이 베일 것 같았다.
협박 아닌 협박에 김단현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손다정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손다정은 눈도 껌뻑하지 않았다. 고작 눈물 따위에 흔들릴 정도였으면 컨설턴트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손다정은 김단현의 눈물이 가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운다고 끝이 아니다. 직접 나서서 소문을 냈다는 건 강압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해서 주체적으로 행동했다는 의미다.
미성년자도 아니고 성인이면 자신의 행동에 분명 책임을 져야 한다. 절대 봐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일벌백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울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해요.”
“흑흑. 그러니까요. 얼마 전에 일이 끝나고 퇴근하려는데 처음 보는 남자가 제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몰래 엿들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김단현이라는 여자가 다른 누군가에게 매수된 것은 분명했다.
그것도 고작 200만 원이라는 적은 돈에.
그녀의 말에 의하면 웬 낯선 남자가 접근해 돈 100만 원을 건넸다고 한다. 건우가 조만간 군대에 가야 한다는 소문을 학원 안에 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만족할만한 소문이 퍼지면 추가로 100만 원을 더 준다고 했고, 가만 앉아 200만 원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별 의심 없이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다.
다행히 낯선 남자가 접근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아서 건우의 군 문제에 대한 유언비어를 들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김기태와 손다정의 현명한 판단 덕분에 소문은 제대로 연기조차도 내보지 못하고 조기에 진압되었다.
손다정은 우선 김단현이라는 직원을 퇴사 조치했다.
고작 200만 원. 실제로 받은 돈은 100만 원.
그런 돈에 흔들려 자신이 다니는 직장에 이상한 소문을 내려 한 사람을 계속 고용할 생각이 없었다.
한편 김기태 선생에게 300만 원의 보너스를 안겼다. 학원 사람들에게 일종의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돈을 받고 배임 행위를 하면 김단현처럼 되는 것이고, 학원 내에 문제를 가장 먼저 파악해서 알리면 김기태 선생처럼 된다는.
이번 일은 한강 에듀케이션 관계자들에게 큰 경각심을 일깨워주었다.
한 번도 이런 식의 노골적이고 치졸한 방법을 경험해보지 못한 그들에겐 꽤 큰 충격이었다.
지금까지는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겨루면 된다고 생각했다. 경쟁이란 서로 가지고 있는 장점을 겨루는 것이지, 있지도 않은 루머를 사실로 만들어 상대를 헐뜯는 게 아니라고 믿었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전투구의 현장이라고 하더니 진짜 개싸움을 마다치 않는 곳이었다.
모두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건 아니었다. 한강 에듀케이션이 그만큼 위협적으로 성장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데 있다. 건우의 이름이 유명해지고 한강 에듀케이션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런 식의 견제는 더욱 심해질 것이 분명했다.
지금은 그저 가벼운 견제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강 에듀케이션의 성장이 자신들의 밥그릇까지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때가 진짜 전쟁이 일어나는 때다.
이 모든 걸 대비해야 하는 손다정의 어깨만 무거워졌다.
***
병적으로 느껴질 만큼 온통 검은 사무실. 황량하기만 한 그곳에 지난번과 다른 변화가 생겼다.
책상 끝에 화병과 꽃이 놓인 것이다. 변화라면 변화라 할 수 있는데, 화병과 꽃이 모두 검은색이라서 이걸 변화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접니다. 이사님.”
들어오라는 말이 들리자 문이 열렸다. 큰 키에 100kg 정도 되어 보이는 거구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정 실장님. 일단 자리에 앉으세요.”
이사라고 불린 남자는 거구의 사내를 사무실 소파로 안내했다.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무슨 일인지 들어볼까요?”
“변동사항이 생겨 찾아왔습니다.”
“어떤 변동사항일까요?”
이사는 소파 깊숙이 앉아 팔꿈치를 손잡이에 대고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지난번에 지시하신 한강 에듀케이션 건. 실패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흠. 그래요? 언제 시작했었죠?”
“삼 일도 지나지 않아 발각되었습니다.”
“쯧. 그렇게 빨리요? 제가 지시는 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일단 한 번 찔러보려는 의도였으니까요. 그래도 너무 빠르군요. 세상 물정 모르는 교사 출신의 강사들이 세운 학원이라 제법 흔들릴 줄 알았는데. 정 실장님이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닙니까? 그럼 실망인데요.”
“면목 없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들킨 것도 들킨 것이지만 그쪽의 대처가 생각보다 굉장히 빠르고 적극적이었습니다. 의사결정이 굉장히 신속한 걸 보면, 절대 주먹구구식 운영은 아닙니다.”
“그래요? 어떤 면에서요?”
이사가 흥미를 보였다.
“문제가 생겼을 때 취한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희가 섭외한 사람을 단칼에 내쳤다는 점. 처음 보고한 강사에게 포상금 형식으로 300만 원을 지급했다는 점. 이 두 가지만 봐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닌 듯 보입니다.”
“호오. 교사들이 만든 학원치곤 제법이군요.”
“그렇지만 제 실수인 건 분명합니다. 그런 상황까지 파악하고 계획을 짰어야 했는데. 곧 다른 방안을 준비해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이미 타초경사의 우를 범했습니다. 잔뜩 경계하고 있을 텐데, 괜히 일을 벌일 필요는 없겠죠. 조용히 있을 시기입니다.”
“알겠습니다. 이사님.”
“그래도 한강 에듀케이션에 대해 제대로 된 조사는 해보세요. 이번 일이 정확하게 어쩌다 발견된 건지, 단호하게 대처한 사람이 원장인지 아니면 다른 조력자가 있는지. 그것만 조사하고 일단 두고 보세요. 적중률이 높았다고 해도 고작 한 번입니다. 우연이라면 모의고사에서 금방 바닥이 드러나겠죠.”
“그럼 한강 에듀케이션에 대해서는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정 실장님이 계속 수고해주세요.”
“네.”
거구의 사내가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이사는 손가락을 반복해서 두들기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강 에듀케이션이라… 새로운 놀잇거리가 생기는 건가? 후후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