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29화 (29/256)

제29화

“네. 다음은 한 주간 대한민국에 있었던 특이한 사건, 사고들을 모아서 알려드리는 시간입니다.”

“대한민국 사교육의 메카로 알려진 대치동. 이곳의 한 학원에 수강신청을 하려고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 화제입니다. 엄청난 한파에도 불구하고 새벽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사람들이 줄을 만들면서, 건물 주변을 무려 다섯 바퀴나 둘러싸는 엄청난 인의 장벽을 만들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안전사고의 위험은 없는지 이진호 기자가 자세한 소식 전하겠습니다.”

“네. 저는 지금 강남구 대치동의 한 학원 앞에 나와 있습니다. 화면으로 보시는 것처럼 건물 주위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줄은 점점 더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새벽 3시경 처음으로 한 바퀴의 거대한 띠를 형성했습니다. 해가 뜨고 기온이 점점 높아지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사람들이 몰려들더니 종국에는 다섯 바퀴가 넘는 엄청난 인의 장벽을 만들었습니다.”

“15여 년 전 노량진 학원가의 최전성기 시절에도 유명 학원에서는 이런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었다고 한 관계자는 전했습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공교육 정상화 실효성이 약해지고 사교육이 다시 득세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전조현상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상 YTM 뉴스 이진호였습니다.”

케이블 뉴스에서 얼마 전 있었던 한강 에듀케이션 사태에 대해 상세히 보도했다.

“우와. 큰오빠 대단해. 저렇게 많은 사람이 전부 큰오빠 때문에 모였던 거야?”

“야! 꼬맹이. 또 과장한다. 저게 어떻게 형 혼자 때문에 모였겠어? 말이 좀 되는 소리를 해라. 저기 학원 강사진도 나름 우수하니까 저런 엄청난 인파가 몰려든 거지.”

“피. 작은오빠야말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렇게 유명한 학원이면 왜 예전에는 안 그랬어? 우리 동네 떡볶이집도 주인아줌마가 바뀌면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 할머니가 주인아줌마가 바뀌어서 그렇대. 그러니까 저렇게 사람이 몰린 건 전부 큰오빠 덕분이지. 그것도 모르냐.”

“음. 작은형. 형은 자꾸 은우 말에는 시비부터 걸려고 하니 논리에서 자꾸 밀리는 거잖아. 생각을 좀 해. 어쨌든 이번 말싸움도 막내 승.”

“윽….”

“예!!! 내가 이겼다. 헤헤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처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이브.

건우의 동생들은 그가 다니는 학원 소식이 뉴스에 나오자 자기 일인 마냥 즐거워했다.

집안은 얼마 전 큰 불행을 겪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온통 형형색색의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부모님을 기리며 경건하게 보낼까 아니면 시끌벅적하게 보낼까 고민을 했었다. 그러다가 막내 은우가 크리스마스를 무척이나 기다리는 눈치기에 건우는 동우와 의논해서 이런 떠들썩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로 했다.

“아, 근데 형!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 좋은데, 꼭 이런 것까지 입어야 해? 그리고 형은 나름 멋진 산타클로스 복장인데, 난 이게 뭐야. 웬 요정 복장이냐고.”

“작은 형. 내가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제발 예전에 조용하고 시크했던 형으로 돌아와 줘. 형은 그래도 사람이지. 난 루돌프라고, 게다가 이 빨간 사슴코는 정말. 휴.”

“작은오빠, 막내오빠. 둘 다 잘 어울려. 귀여워. 우리 동네 언니들이 보면 귀여워서 까무러칠걸? 히히히.”

“어이, 꼬맹이 넌 좀 조용하지? 이건 전부 네 아이디어라며? 그리고 넌 왜 예쁜 드레스야? 머리에는 티아라까지 끼고. 그게 크리스마스랑 어울려? 응?”

“흥.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백설공주 컨셉이다. 뭐!”

“맙소사 그래서 난 난쟁이 요정 복장이었던 거야?”

“그럼 난 왜 루돌프 복장인거야? 백설공주 컨셉이면, 큰형은 왕자, 나는 난쟁이 요정 2로 분장하는 게 더 낫지 않아?”

“음. 그건 백설공주가 사는 마을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찾아와서 그래. 그러니까 루돌프도 필요한 거야. 자! 사진 찍을 거니까 다들 치즈!”

“흠흠. 그래도 빨간 코는 정말 아닌 것 같다. 은우야.”

알록달록 사슴 인형 옷에 고무줄로 연결된 빨간 공을 코에 단 정우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엄살은! 차라리 루돌프가 낫지. 난쟁이 요정은 정말 너무한 것 아니야? 이 녹색 타이즈 좀 어떻게 해봐. 큰형. 제발. 응? 이 녹색 쫄쫄이 타이즈만이라도 벗으면 안 될까? 응? 대신 한 달 동안 화장실 청소라도 할 게. 플리즈.”

“시끄러.”

몇 달 동안 키가 쑥쑥 많이 자라 180cm에 가까워진 둘째 동우가 녹색 쫄쫄이 타이즈를 입고 고깔모자를 쓴 채 건우에게 사정하는 모습은 정말 해괴(?)하기 짝이 없었다.

“아. 진짜! 그럼 정우도 같이 난쟁이 요정 복장을 입히던가. 이게 뭐야. 혼자 쪽팔리게.”

“걱정하지 마. 이따 외가 가면, 현수와 현준이도 난쟁이 요정 복장을 하고 있을 테니까.”

“으엑. 푸하하하. 큰 형 정말이야? 현수 형하고 현준이도 난쟁이 복장이야?”

“응. 참고로 고모는 백설공주 왕비 복장이야. 이따 다 같이 모였을 때 고모 보고 절대 웃지 마. 안 그래도 왜 자기는 사악한 왕비냐 하면서 울먹이더라.”

“크크크. 대박이다. 현수는 몸무게가 80kg이 넘는데, 녀석 허벅지에 맞는 쫄쫄이 타이즈도 있었어? 으아. 상상만 해도 웃기다.”

동우는 상상만 해도 즐거운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었고, 정우도 웃긴 건 마찬가지였는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네 남매가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서 즐거운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잠시 후 건우는 트리 뒤에 숨겨뒀던 선물 상자 세 개를 꺼냈다.

“자. 그럼 선물 증정 시간입니다. 각자 준비해온 선물을 나눠주도록 합시다.”

네 사람은 각자 준비해온 선물을 다른 가족들에게 나눠주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기가 받은 선물의 포장을 뜯었다.

“우와! 맙소사! 이건 말콤 셰프의 레시피를 모아놓은 원서잖아. 이거 구하기 무지 힘들다고 하던데. 큰 형 정말 고마워.”

“고맙긴. 혹시나 싶어 미국에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에게 부탁했는데, 다행히 시간 맞춰 구해줬어. 영어로 된 책이긴 해도, 요리 관련 용어들이니까 어렵진 않겠지?”

“그럼. 전문 용어들만 숙지하고 있으면 정말 쉽다고. 그리고 내가 영어는 좀 하잖아. 하하하.”

“어이. 셋째. 너 요즘 너무 요리에 심취하는 거 아니야? 그러다 나중에 요리사 되겠다.”

“아냐. 난 의사가 될 거야?”

“응? 의사. 그 이야기는 오늘 처음 들어보는데. 너 원래 외교관이 되고 싶다고 했잖아. 근데 왜 의사로 꿈이 바뀐 거야?”

“큰형 때문에.”

건우는 생각지도 못한 정우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예전 삶에서는 어느 날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었다.

그냥 좋은 직업을 가지고 싶어 하네. 다행이다. 이런 생각을 했을 뿐, 정우가 왜 의사가 되려고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나? 왜? 왜 나 때문인데?”

“형이 우리 때문에 의사를 포기했잖아.”

“뭐?”

“형은 어릴 때부터 꿈의 의사였잖아.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낫게 해주고 싶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우리 때문에 포기하고, 학원 강사 하는 거잖아. 그래서 나라도 의사가 돼서 큰형 꿈을 대신 이뤄주려고. 이상해?”

몰랐다. 건우는 정우가 저런 생각으로 의사의 꿈을 키웠을 줄은 정말 몰랐다.

‘대체 나는 동생들에 대해서 아는 게 있기는 했을까? 어떻게 매번 이렇게 몰랐던 사실들이 자꾸 튀어나오는 걸까? 한심하다. 한심해. 최건우.’

건우는 정우의 말이 뭉클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무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예전과 달리 동생들과 격 없이 지내기로 마음먹은 게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정우가 이런 자리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동우보다 의젓해 보이는 정우지만, 그는 이제 고작 중학교 1학년인 어린아이였을 뿐이었다.

“정우야.”

“응. 큰형.”

“나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필요는 없어. 난 지금 행복하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는 내 생각은 학원 강사를 하면서도 할 수 있어. 좀 더 자리 잡고 인정받으면, 가난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며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을 도울 거야. 굳이 의사가 아니라도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괜히 나 때문에 일부러 의사가 되려는 거라면 안 그래도 돼.”

건우는 실제로 가난한 학생들을 지원하는 방안에 관해 관심이 있었다.

물론, 동생 앞에서 말한 것처럼 100% 순수한 호의는 아닐 수도 있지만.

“그렇지만 형.”

“아직 넌 어리잖아. 좀 더 생각을 해보자.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뭔지. 가끔 형이랑 여행도 다니고 책도 읽으면서 세상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알게 될 거야.”

“야! 최정우. 넌 큰형이 그렇게 좋아?”

갑작스러운 동우의 질문에 정우는 얼굴만 붉혔다.

“와! 저 얼굴 붉어지는 거 봐라. 넌 진짜 배신자다. 형이 공부한다고 미국으로 떠난 4년간 심심할 때마다 놀아 준 게 나다. 너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확 변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동우의 표정은 전혀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흐뭇해하고 행복해하는 표정에 가까웠다.

“그건 아니다. 작은오빠.”

“뭐? 네가 뭘 안다고 꼬맹이.”

“나도 알 건 안다고. 작은오빠가 막내오빠랑 놀아준 게 아니라, 막내오빠가 작은오빠랑 놀아준 거다, 뭐!”

“어허. 꼬맹이. 너 자꾸 오빠한테 기어오를래?”

“자꾸 꼬맹이, 꼬맹이 하지 마. 최 초딩.”

“어휴. 저걸 확. 에잇. 선물이나 뜯어봐야지. 책이네. 어디 보자. 제목이… 다중지능계발 365? 이게 무슨 책이지? 만 5~6세 어린이 두뇌 계발 지침서? 이게 왜 내 선물이야. 이거 누가 준비했어? 은우 거랑 바뀐 것 같은데?”

“작은오빠 거 맞아.”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알… 혹시, 너?”

“응. 내가 오빠를 위해서 준비했어. 최 초딩이잖아. 머리가 너무 나쁜 것 같아서 특별히 서점가서 사왔어. 고맙지?”

“야아아아아! 꼬맹이, 너 정말 죽을래.”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여전히 아웅다웅하는 동우와 은우. 덕분에 건우네 가족은 정신없이 웃으며 떠들썩한 연말을 보낼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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