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27화 (27/256)

제27화

- 아침 6시 건우의 집 근처.

“헉. 헉. 헉.”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건우와 동생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근처 우면산을 오르고 있었다.

건우의 동생들은 확실히 예전과 비교하면 살이 빠졌다. 그러나 여전히 통통한 체형이었다.

“형. 이제 좀 천천히 가자. 힘들어.”

“안 돼. 겨우 300고지 산이 뭐가 힘들다고 엄살이야.”

“산만 오른 게 아니잖아. 올라오기 전에 주변 공원도 다섯 바퀴나 뛰었다고.”

“그래도 뛰어. 막내도 군소리 없이 뛰잖아.”

“헤헤헤. 작은오빠, 완전 저질 체력이야. 유딩보다 못 뛰는 최유딩.”

“야, 꼬맹이. 넌 중간중간 형한테 업혀왔잖아. 그래놓고 지금 누굴 놀려?”

막내 은우가 약을 살살 올리자, 둘째 동우가 벌컥 짜증을 냈다. 힘들어 죽겠는데 깐죽거리는 막내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야, 최동우. 그럼 7살짜리가 너희랑 똑같이 공원 돌고 산까지 올라야겠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자꾸 저 꼬맹이가 까불거리잖아. 어휴.”

“잔소리하지 말고 빨리 올라가자.”

“형. 제발 좀 쉬었다 가자. 나 정말 힘들어.”

“엄살 피우지 마. 난 은우도 업고 올라왔어. 그리고 정우도 묵묵히 올라가잖아. 둘째가 되어서 최소한 동생들한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지.”

건우의 말처럼 셋째 정우는 힘겨운 표정을 지으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그래도 절대 쉬어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정우의 모습에 동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놈도 정말 독하네. 젠장! 이게 정말 무슨 망신이야. 그래. 뛴다고. 뛰면 될 것 아니야.”

그렇게 4남매는 오늘도 우면산 꼭대기까지 무사히 등산을 마치고 내려왔다.

“어라. 형. 저기 저 건물. 형이 강의하는 한강 에듀케이션 학원 아니야?”

“왜, 학원에 무슨 일 있어? 어라? 뭐지, 저게?”

은우를 등에 업고 두 남동생을 재촉하던 건우는 고개를 돌려 학원 쪽을 바라보았다.

동우의 말처럼 이상했다. 멀리서도 보일 만큼 긴 줄이 학원 주변을 몇 바퀴씩 감싼 게 눈에 들어왔다.

희한하다면 희한하고 장관이라고 하면 장관일 요상한 광경이었다.

“형도 무슨 일인지 몰라? 뭔데 저렇게 사람이 많이 몰려있어?”

“진짜 엄청나게 몰렸네. 아무래도 학원 수강 신청 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든 모양이야. 오늘이 수강 신청하는 날이거든.”

“헐. 말도 안 돼. 무슨 학원 수강 신청을 하는데, 저렇게 사람들이 몰려. 그게 말이 돼?”

“하하하. 그럼. 말이 되지. 이게 다 이 형님의 위대한 능력 때문이란다.”

“뻥 치시네. 솔직히 말해봐. 학원에서 다른 행사라도 하는 거 아니야? 학생들이 안 오니까 미끼로 아이돌을 초대한다든가.”

건우의 말에 동우가 코웃음을 쳤다.

눈대중으로만 봐도 몇천 명은 되어 보였다. 저 많은 사람이 고작 학원 수강 신청을 위해 몰린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어허. 솔직한 거야. 내가 언제 너희 앞에 두고 뻥 치는 거 봤어?”

“진짜? 뻥 아니지? 진짜로 학원 수강 신청 때문에 저렇게 몰린 거야? 대박. 이건 완전 해외토픽에도 나올 사건이다. 아이폰 처음 출시하면 그거 받으려고 줄을 선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학원 수강 신청하려고 저렇게 몰린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나도 처음이긴 하다만, 내가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의미 아니겠어?”

건우의 말에 동우는 토하는 표정을 지으며 재수 없음을 표현했지만, 정우와 은우는 그런 건우가 자랑스러워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나이 차이가 있는 만큼, 동우가 생각하는 건우와 두 사람이 생각하는 건우는 느낌이 달랐다.

“아오! 진짜. 형. 요즘 들어 자꾸 잘난 척이 느는 것 같아. 양심상 스스로 재수 없다는 생각 안 들어?”

“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어. 잘난 척이 아니라. 잘난 거라니까.”

건우의 과장된 행동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예전에는 동생들을 정말 사랑하긴 했지만, 딱딱한 말투에 일만 열심히 했던 건우였다.

형이지만 아버지에 가까운 존재. 스스로 원한 모습이지만 결과적으론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이번 삶에서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고치려고 했다. 동생들과 살갑게 친근하게 지내고 싶었다.

동우가 잘난 척한다며 구박하긴 해도, 그의 노력 덕분인지 과거에 비한다면 확실히 동생들과의 사이가 친밀해졌다.

“그럼요. 그렇겠죠. 하버드를 수석으로 졸업한 최건우 씨인데 어련하시겠어요. 그런데 형. 학원이 지금 저 지경인데 안 가봐도 돼?”

“됐어. 내가 저길 왜 가. 알아서 대처하겠지.”

산에서 내려온 시간이 7시니 건우가 지금 바로 손다정에게만 연락했어도 최소 2시간은 빨리 수습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든 말든 그는 천하태평이었다.

“그게 끝이야? 걱정되고 그러지 않아?”

“무슨 걱정을 해. 사람들이 저렇게 몰렸으면 좋은 거지. 그리고 오늘은 너희 학교로 태워주고, 막둥이랑 데이트 약속 있어. 그치 은우야?”

“응. 오빠. 헤헤. 작은오빠. 나는 이따 큰오빠랑 백화점 가지롱. 오빠가 예쁜 옷 사준다고 했어. 부럽지?”

“뭐? 옷? 형! 나는? 나도 옷!”

“안 돼. 너희 둘은 살 더 빼고. 살 다 빼면 그때 사줄 테니까, 잠자코 학교나 가세요. 지금은 새 옷 사주기가 아깝다.”

“우와! 진짜 치사하다.”

“억울하면 독하게 마음먹고 살 빼!”

건우와 동생들은 정겹게 투닥거리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엄청나게 긴 줄이 학원을 둘러싼 모습을 뒤로 한 채.

***

돈 없고, 빽 없고, 아는 친구도 없는데 결국 순번에서도 밀린 학부모들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선택은 철면피 깔고 대놓고 들이미는 방법밖에 없었다.

자식 문제만 아니었다면, 체념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자식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렇게 인성 좋다고 칭찬받는 사람도 자식과 관련된 일이 되면 180도로 돌변해서 상식쯤은 저 멀리 던져버리고 뻔뻔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하물며 체감온도가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진 살이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도, 오직 자식의 수강신청을 위해 잠까지 포기하며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이다.

추위와 졸음에 이젠 배고픔까지 더해져 오직 독기 하나로 버티는 중이었다.

상식이고 나발이고 그런 건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수강신청 마감? 그딴 건 개의치 않았다. 없으면 만들게 하면 된다.

각 강의실에 보조의자를 집어넣든, 당장 벽을 부수고 강의실을 넓히든 어떻게든 방법을 찾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내 자식이 한강 에듀케이션에 등록할 수 있으니까.

커다란 덩치에 검은 양복을 입은 경비업체 직원들의 험악한 얼굴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왜? 자식과 관련된 일이니까.

살벌한 표정으로 위협하듯 해산을 종용하는 그들의 모습에 독기가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내 자식을 위한 일인데 감히 너 따위가 나를 위협해?’

‘네가 뭔데? 고작 이런 곳에서 경비나 서는 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나는 내 자식들을 너희처럼 키우지 않을 거야. 그러니 비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신과 같은 처지인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왠지 모를 자신감 같은 감정도 생겨났다. 군중심리가 발동된 것이다.

거칠 게 없어졌다. 이제 이들에게는 자신들을 막는 모든 것들이 적으로 보였다. 숫자로 밀어붙이면 겁날 게 없었다.

***

한편 건우는 은우와 함께 백화점에 있었다. 방학을 하려면 아직 일주일 정도 기간이 더 남은 동우와 정우를 학교로 태워다 주고 카페에 들러 은우의 수다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개장시간에 맞춰 백화점에 도착한 다음, 은우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둘씩 고르기 시작했다.

“아! 오빠. 싫어.”

“은우야. 왜 그래? 뭐가 싫어. 오빠잖아.”

“그래도 싫어. 싫단 말이야. 창피해.”

“뭐가 창피해? 어디 보자, 이건 곰돌이 속옷이네? 은우야. 어때, 예쁘지?”

“아, 진짜! 하나도 안 예뻐. 큰오빠 완전 실망이야. 오빠랑 말 안 해.”

사실 건우가 은우를 데리고 백화점에 온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속옷 때문이었다.

며칠 전 빨래를 개는데 막내 속옷에 구멍이 나 있었다. 엄마가 없으니 그런 걸 신경을 써주는 사람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동생에게 정말 미안해졌다.

그래서 동생에게 옷을 사준다는 핑계로 속옷도 같이 사려고 했는데, 갑작스레 난관에 부닥쳤다.

평소에는 집안에서 속옷 바람으로 잘도 돌아다니고, 잠잘 때는 건우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은우였다.

당연히 속옷 정도는 사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창피하다고 거절하더니 기어코 삐치고 말았다.

예전 삶까지 포함하면 10년 넘게 애지중지하며 키웠던 막내였지만, 이렇게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건우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할머니에게 전화해서 백화점까지 오시게 한 다음에야 겨우 기분을 풀었다.

언제 삐쳤느냐는 듯 히죽거리며 할머니와 함께 속옷을 고르는 막내의 모습을 보니, 역시 여자는 이해하기 힘든 동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막내도 확실히 여자는 여자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고작 일곱 살인데 말이다.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삐치기도 하고, 또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감정 기복을 보여서 건우의 속을 새까맣게 타게 만들지만, 그러면서 성인 여자로 서서히 성장해가는 것이 아닐까?

건우는 여전히 신나서 쇼핑을 하고 있는 막내를 보며 뜬금없이 흐뭇해졌다.

1시간 정도 더 쇼핑을 한 세 사람은 필요한 물건을 모두 사고 백화점 라운지에 있는 식당에 들렸다.

“건우야. 저기 TV 뉴스에 나오는 학원, 네가 다닌다는 거기 아니니? 한강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네? 뉴스에 나와요? 와! 정말이네요. 저기 맞아요. 한강 에듀케이션.”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건우와 할머니는 TV에서 나오는 한강 에듀케이션의 모습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갑자기 TV에 다 나오고. 대체 무슨 일이라니? 학원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아뇨.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수강 신청하려고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그런가 봐요.”

“그런데 뉴스에까지 나와?”

좋은 일로 뉴스에 나오는 경우가 많지 않으니 괜히 걱정됐다.

“신기한가 보죠. 학원 수강 신청하려고 저렇게 긴 줄을 서는 경우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설마 무슨 일이야 생기겠어요?”

“그렇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분위기 좀 심상치 않아 보이네. 저걸 좀 봐. 표정이 굉장히 험악해 보여.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사람들처럼.”

뉴스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에게 삿대질하며 화를 내는 군중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그러게요. 좀 그렇긴 하네요. 학원 신청 때문이라고 하기엔 반응이 과격한 것 같긴 한데….”

두 사람이 TV를 보던 시간은 학원 수강 신청이 마감된 직후 기다리던 사람들이 서서히 동요하며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아직은 이성을 가지고 자제하고 있지만 분위기는 활화산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넌 안 가봐도 돼?”

“저요? 오라고 연락은 왔는데, 막내가 오늘부터 방학이라 못 간다고 했죠.”

“뭐야? 그러면 안 되지.”

“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렇게 혼자만 튀면 사람들이 안 좋게 봐요.”

“그래도 할머니. 전 가족이 더 소중한걸요.”

이제 겨우 스무 살인 건우가 가족을 살갑게 챙기는 모습을 본 그의 할머니는 애틋하면서도 착잡한 눈길로 건우를 바라보았다.

언제 저렇게 듬직해졌나 싶어 대견했지만, 아직은 혈기왕성하게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겁게 살 나이라는 생각을 하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우리 장손이 좀 듬직하긴 하지. 그런데 은우는 지금부터 할미가 보고 있을 테니까, 이제 넌 학원으로 가 보거라. 혹시 아니? 네가 필요할 일이 생길지.”

“그럴까요? 은우야. 오빠 가도 괜찮아.”

“그럼. 내가 무슨 어린앤가? 걱정하지 말고 가. 난 할머니랑 잘 놀고 있을게.”

사실 TV속 뉴스를 본 건우도 슬슬 걱정이 되긴 했다. 너무 뜻밖의 상황이라 혹시라도 사고는 나지 않을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단지 은우와의 약속이 더 중요했고, 그게 아니라도 막내 혼자 두고 학원을 갈 수는 없어 그냥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은 할머니가 곁에 있으니 일단 안심이다.

***

건우가 학원에 도착할 때쯤에는 분위기가 더욱 험악하게 변하고 있었다.

“어, 그래. 최 선생 왔어?”

“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막내를 혼자 두고 올 수가 없어서요.”

“아냐. 죄송할 게 뭐 있나? 이제 겨우 7살이라면서. 혼자 두기 어렵지. 그래서 누구한테 맡기고 온 거야?”

“할머니께서 돌봐주시기로 했습니다.”

“다행이네. 그나저나 최 선생이 이번 일은 책임져야겠어.”

“제가요?”

“너무 실력이 있어서 이런 일이 생겼잖아.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건 아닌지 아주 조마조마해 죽겠다고. 허허허.”

학원 입구에 도착하자 입구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김상문 원장이 건우를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며 경직된 학원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워낙 상황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김 원장의 말에 호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위기만 시시껄렁해졌다.

“그럼 제가 한 번 나가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응? 아냐. 농담이야. 농담. 지금 상황에서 어딜 나가겠다는 소리야?”

농담으로 한 이야기를 진담으로 받는 건우를 보며 김 원장이 화들짝 놀랐다.

한강 에듀케이션 입장에서 건우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마찬가지다.

그런 소중한 보물을 사나운 군중이 있는 저곳으로 보낼 순 없었다.

“설마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침 좋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혹시 확성기 있으십니까?”

“정말 방법이 있는 거야? 방법만 있다면 확성기 하나 못 구해다 줄까?”

절대 보낼 수 없다며 말리려고 했는데 자신감 넘치는 건우의 모습에 생각이 달라졌다.

지금껏 건우가 장담했던 일이 모두 이뤄졌으니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기대감이 생긴 것이다.

“이곳으로 오면서 떠올린 방법이 있습니다. 말만 잘하면 설득할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

“그게 뭔데? 다른 사람이 하면 안 되는 일인가?”

“여기서 저보다 저분들을 더 잘 설득할 수 있는 분이 있을까요?”

“하긴. 그도 그렇군. 잠시만 기다리게. 내 직원들에게 최대한 빨리 확성기부터 구해오라고 할 테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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