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이 가라사대-15화 (15/256)

제15화

“생각 이상으로 세게 부르시네요. 강사 이력도 없는 사람에게 10억이라니.”

“저는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건우 선생님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요. 계약금뿐만이 아닙니다. 세부적인 조항들도 섭섭하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참고서와 인터넷 강의 제작에도 참여하실 거죠?”

당연한 이야기였다. 건우가 굳이 6과목을 가르치겠다고 나선 이유가 바로 참고서와 인터넷 강의 때문이다.

오프라인 강의에 시간적 공간적 제한이 있다면, 참고서와 인터넷 강의 시장은 무궁무진하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이건 좀 정확하게 말씀을 해주셔야 합니다. 어제와 같은 혁신적인 교습 이론들 말인데요. 과목당 2~3개는 더 있다고 하셨는데 사실인 거죠?”

“네. 영어를 제외한다면, 아마 학년마다 2~3개 정도는 있을 겁니다.”

“네? 설마 고등학교 1, 2, 3 학년 교과과정을 통틀어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죠?”

“맞습니다. 수학은 좀 더 이해하기 쉽고 풀기 편한 풀이 방식 위주겠지만, 과학 쪽은 기존과는 다른 설명방법도 꽤 있습니다.”

20년 전 정석 수학책이 지금도 베스트셀러이듯 수학은 큰 변화가 없다.

그러나 과학은 20년 전 교과서와 지금 교과서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런 변화는 20년 후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변화된 내용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는 건우는, 그 기억을 기반으로 센세이셔널한 과학 참고서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계획만 세운 게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이다. 예전 삶에서 참고서를 몇 번 만들어 본 경험 덕분인지 막히는 부분도 거의 없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엄청나네요. 참고서 인세 30%, 인터넷 강의는 수익의 60% 드리겠습니다. 어제 강의하는 모습이나 말씀하는 내용을 보면 학원 쪽 일에 대해 상당한 공부를 하고 오신 것 같더군요. 맞으시죠?”

“네. 대부분 인터넷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이지만요.”

“그렇다면 제가 제안한 조건이 어떤 건지 잘 아시겠네요. 인세 30%면 작가 중에도 최고의 작가들만 받는 비율입니다. 그리고 인터넷 강의의 경우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죠. 지금 학원가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메가노트라는 학원의 경우 인터넷 강사에게 수익의 23% 정도를 지급해요.”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30%도 아니고 60%라니, 생각지도 못한 조건입니다. 단단히 각오하고 나오셨나 봐요?”

‘대단하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의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럼요. 저희 입장에서 최건우 선생님은 반드시 잡아야 하는 인재니까요. 단지 하나만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뭔가요?”

“참고서의 경우 두 달 정도만 한강 에듀케이션에 독점권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세요.”

“왜냐하면… 네?”

손다정은 건우가 한 번쯤은 거절할 것으로 생각했다. 설득을 위해 추가적인 다른 조건들도 준비해왔다.

그런데 너무 쉽게 허락하는 그의 대답에 당황했다.

독점권을 준다면 건우 입장에서는 손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까칠하게 행동할 마음은 없었다.

미래의 지식이 주는 여유로움.

어차피 1년이 지나면 100억 이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 굳이 크게 손해도 나지 않을 상황을 두고 얼굴 붉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시라고요. 1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하면 결국 판매액은 비슷비슷할 건데, 문제 될 것 없습니다.”

독점을 주나 안 주나, 필요한 사람들은 다 살 거라는 자신감이었다.

“아, 감사해요. 그리고 또. 음….”

“뭐. 저를 학원 홍보 수단으로 사용하겠다는 말씀이겠죠? 그것도 그렇게 하세요.”

“그것도 예상하셨나 봐요?”

“그럼요. 제 실력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계셨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다른 실력 있는 강사들을 놔두고 왜 저를 선택했겠어요?”

“그거야 최건우 선생님이 가지신 잠재력을….”

“그럴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제 하버드 의대 경력이 필요하셨던 거잖아요. 하버드 의대 재학 중인, 아니 이젠 휴학 중이구나. 하버드 의대를 휴학 중인 천재 강사. 대충 이런 식으로 마케팅하려고 하셨던 것 아닌가요?”

“맞아요. 그렇게 해도 괜찮으세요?”

과거의 건우는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이 싸웠다. 하버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었고, 강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격지심도 있었다.

결국은 다정의 설득에 넘어갔었지만, 자신의 자랑스러운 경력이 고작 학원 홍보에나 이용된다는 현실을 괴로워했었다.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면서 그 부분에 대해 깊은 반성을 했다.

고귀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공부가 부족한 아이들을 도와주는 일에 자격지심을 가졌던 자신이 참 한심했다.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새로 사는 인생이고 또다시 학원 강사를 직업으로 택했는데, 쓸데없는 열등감 따위로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괜찮죠. 그런다고 문제 될 것 있나요?”

“아니요. 아닙니다. 문제라뇨. 너무 쉽게 허락하셔서 조금 당황했을 뿐이에요. 밤을 새워가며 최 선생님을 설득한 준비를 해왔거든요.”

“함께 살자고 하는 일 아닙니까? 최대한 홍보 많이 하세요. 학생들 많이 몰리면 저도 좋고 학원도 좋은 일이니까요. 혹시 아쉽다면 밤새워 준비한 내용을 들어드릴 수는 있습니다.”

“호호호.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시죠. 아까 계약금으로 10억 준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 돈 필요 없습니다.”

“네? 계약금이 필요 없으시다고요? 대체 왜요?”

손다정의 목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높아졌다. 10억을 마다하다니, 제정신인가 싶었다.

혹시나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됐다.

“돈을 더 달라는 것도 아니고 안 받겠다는데 그것도 문제가 되나요?”

“하지만 계약금은 저희에게도 중요한 일인걸요. 최건우 선생님이 갑자기 다른 곳으로 간다든가 하는 일이 생기면….”

“거기에 대한 각서가 필요하다면 써드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제가 어제 영장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입영통지서 받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10억이다. 어설픈 핑계로 괜한 오해를 받느니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설마… 그 영장이 범죄를 저질러서 받으신 건 아닐 테고. 혹시 군대 영장인가요?”

“그 혹시가 맞습니다.”

손다정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군대는 한 번도 생각 못 해본 문제였다.

“그럼 어떡해요? 학원 강사는 군대 다녀와서 할 생각인 건가요? 그래서 계약금을 안 받겠다고 하신 거예요?”

평정심을 잃은 손다정의 입에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쳇말로 멘붕 상태에 빠졌다.

“저기. 손 과장님.”

“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군대는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아….”

부모님이 돌아가신 일을 담담하게 말하는 건우의 모습에, 손다정은 겨우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제야 건우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걸 떠올렸다.

한강 에듀케이션이나 손다정 입장에선 다행인데, 다행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러니까 군대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좀 많이 당황한 모습을 보여드렸죠? 죄송해요. 그런데 왜 계약금은 거절하신 거죠? 군대 문제와 계약금이 상관이 있는 건가요?”

“아시겠지만 이제 제가 집에서 가장입니다. 그런 이유로 군대가 면제되는 건데, 보유 재산이 많으면 면제 사유가 안 된다고 합니다.”

“음… 10억은 당연히 면제가 안 되겠네요.”

“네. 계약금을 받으면 저는 군대에 가야 하고, 군대에 가면 계약 위반으로 계약금을 돌려줘야 하는 굉장히 이상한 상황이 된 거죠.”

“그럼 어떻게 하죠?”

꽤 답답한 상황이 분명한데 건우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그 덕분에 겨우 안심되었다. 방법이 없다면 저런 표정일 리 없다.

“대신 다른 걸 해주세요. 지금 제일 필요한 게 집입니다. 집을 구해주세요. 방은 4개. 학원과 가까워야 하고.”

“네? 방이 4개요? 학원 근처의 방 4개짜리 집이면, 강남에 있는 40평 아파트는 되어야 하는데. 그건 좀 과한 요구 아닐까요?”

화는 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돌려 말했다. 군대 이야기도 쇼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대치동의 40평대 아파트면 적어도 20억 가까운 돈이 든다. 손다정은 나름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더 무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건우가 실망스러웠다.

“아! 뭔가 오해하셨구나. 사달라는 게 아닙니다. 학원 명의로 전세를 구하든 월세로 빌리든, 계약 기간 동안 저와 제 동생들이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해달라는 의미였습니다. 오해는 풀리셨나요?”

“호호호. 그런 뜻이었군요. 죄송해요. 그런 의도인 줄 모르고.”

“괜찮습니다. 자초지종부터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렸네요.”

“숙소를 렌탈해드리는 건 어렵지 않아요. 이번 주 안으로 준비해놓을게요.”

“감사합니다.”

“어려운 일 아니에요. 그리고 한 가지 상의할 게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최대한 선생님의 이름을 알리고 싶어요. 당연히 광고가 주(主)가 되겠지만, 혹시 생각해두신 방법이 있나 해서요. 왠지 최 선생님이라면 괜찮은 방법이 있을 것 같거든요.”

“네. 있습니다.”

손다정의 물음에 건우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어떤 방법을 생각하고 계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학원 강사가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수업을 해야죠. 지금 고3을 상대로요.”

“고3을 상대로요? 하지만 다른 선생님들은 지금 수업하는 것이 안 좋을 거라고 하시던데요. 강의 내용이 알려지면 대놓고 따라 하는 학원도 생길 테니, 새로운 교습법은 내년에 공개하는 게 어떨까요?”

“새로운 이론을 가르치는 거라면 문제가 되겠죠. 하지만 그런 수업이 아니라, 일명 족집게 특강을 할 생각이에요.”

“족집게 특강이라면… 수능 문제를 예측하신다는 말씀인가요? 그건 안 됩니다. 아무리 최 선생님이라도 족집게 특강은 위험해요.”

“아닙니다. 그렇게 따지면 6과목을 가르치는 건 무리가 아니고요?”

“그건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수능이 끝나고 입소문이 나면 한강 에듀케이션에 등록하려고 학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겁니다.”

다정은 너무나도 자신하는 건우의 모습을 보면서 걱정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에 족집게는 실력이 아닌 요행에 가깝다. 맞추면 좋고 틀리면 그만이라는 식의.

그런 불확실함에 한강 에듀케이션의 미래를 걸 순 없었다. 그냥 둬도 언젠가 건우는 성공한다. 그러니 굳이 긁어 부스럼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손다정은 어떻게든 건우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건우는 요지부동이었다.

설득은 계속됐다. 그러나 족집게 수업을 못 하게 하면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건우의 강경한 자세에 결국 손다정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을 선언했다.

그 밖에도 건우는 계약금을 받지 않는 대신 몇 가지 다른 조건을 내세웠다.

첫 번째, 계약 기간은 2015년 수능 시험이 끝날 때까지로 정했다.

건우는 빠른 시간 안에 스스로 학원을 운영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학원을 키우고 출판사를 인수한 다음, 학원을 기업화해서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였다.

예전 동생의 처가 사람들이 학원 강사라며 자신을 우습게 봤던 그런 일은 절대로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 인센티브를 요구했다. 까칠하게 살기 싫다는 것이지, 호구처럼 살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자신의 정당한 몫을 포기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지금 군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받을 돈을 뒤로 미뤘을 뿐이다. 그리고 액수가 정해진 계약금보다는 성과에 따른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인센티브가 더 매력적이었다.

참고서나 인터넷 강의는 한강 에듀케이션에서 최대한 편의를 봐줬기 때문에 더 이상 터치할 사항이 없었다.

그러나 오프라인 강의는 다르다. 건우는 인센티브 기준을 올 10월까지 등록한 학생 수로 정했다. 그리고 건우가 참여하면서 늘어난 학생 수는 무조건 성과로 잡고 학생 한 명당 만 원의 인센티브를 받기로 했다.

건우의 수업을 듣는 학생뿐만 아니라 한강 에듀케이션에 등록하는 모든 학생을 포함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등록생 수는 기존 강사의 공이지만, 그 이상의 학생들은 모두 건우의 이력이나 실력을 보고 등록하는 것이라는 전제에 합의했기 때문에 다정은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다.

학생 백 명이 늘어나면 백만 원의 인센티브를 받고, 천 명이 늘어나면 천만 원의 인센티브를 받는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큰 금액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천 명의 학생이 6과목을 듣는다면 6천만 원이 된다.

게다가 그 학생들은 한 달만 듣고 끝나는 게 아니다. 유명세를 타면 탈수록 학생들은 늘어날 것이고, 누적되어서 증가하는 수강생은 예측하기도 쉽지 않다.

다른 강사의 수업을 듣는 학생도 포함시키면 최종적으로 건우가 받을 수 있는 인센티브는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다.

“자, 그럼 계약은 마무리되었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최건우 선생님.”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손다정 과장님.”

“그런데 정말 그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고 특강을 하실 거예요?

“그럼요. 왜요, 걱정되세요?”

건우는 수능 특강반을 모집하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그런 조건을 내세웠다.

‘수능 대비 3주 완성 특강반 모집. 수능 적중률이 50% 이하면 1000% 환불.’

어떤 학원들은 자기들의 수능 적중률이 100%라고 자랑한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문제를 잘 출제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독창적일 수는 없다.

게다가 수능 문제는 교과서를 벗어날 수 없으니, 1년 동안 해당 과목을 가르치면 적중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예를 들어 하루에 20문항씩 300일 동안 문제풀이를 해주면, 6,000문항이다. 거기다 집에서 풀어보라며 10문항씩 숙제를 내준다.

물론 학생이 풀든 말든 그건 상관없다. 어쨌든 학원에서 관여한 문제는 무려 9,000여 문항.

이 정도 양이면 수능에서 나올 문제 패턴의 대부분을 다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00장짜리 책을 주며 ‘여기서 50문제가 나와.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라고 해놓고, 우리의 수능 적중률은 100%라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건우는 3주 완성이라고 했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룰 수 있는 문제의 양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다르게 말하면 3주 동안 고등학교 3년 과정을 전부 가르쳐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

건우는 그런 불가능에 도전하려고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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