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 오빠. 병무청이 뭐야?
은우가 거실에 쪼그리고 앉아 종이 위에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우리 은우 뭐 하고 있어?”
건우가 은우 옆에 같이 쪼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같은 눈높이로 이야기하기.
‘은우와 대화할 땐 위에서 내려다보지 말고 같이 눈높이를 맞추는 게 좋아.’
정신과 의사인 조유미가 건우에게 해준 조언이다.
“그림 그리고 있어.”
“무슨 그림 그리는데?”
“오빠들 그림!”
“오! 그럼 나도 있겠네?”
“당연하지. 큰오빠를 제일 크게 그렸어. 잘했지?”
은우의 말처럼 종이에는 사람으로 보이는 형체가 셋 있었다. 그중에 가운데 사람이 제일 컸는데, 그게 건우인 듯했다.
7살인데 이 정도면 그림에는 영 소질이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건우는 그런 속마음과 다르게 대답했다.
“우리 은우 그림 잘 그리네. 오른쪽에 두 번째로 큰 사람이 동우?”
“아니. 그건 막내오빠야.”
“아하. 그럼 왼쪽이 동우야?”
“아니. 그건 나야.”
“그럼 동우는?”
“작은오빠는 구석에 있잖아.”
은우의 말처럼 종이 왼쪽 하단에 자그맣게 뭔가 그려져 있었다. 졸라맨을 닮은 듯 동그라미에 몸통과 팔다리 다섯 개의 선이 그려진 뭔가가.
막내의 소심한 복수에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기꺼이 은우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줬다.
“하하하. 동우랑 딱 어울린다.”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럼. 우리 은우 정말 그림 잘 그리네. 아이고 예뻐.”
“헤헤헤. 그런데 오빠. 나 궁금한 게 있어? 병무청이 뭐야?”
“응? 병무청? 갑자기 병무청은 왜?”
건우는 은우의 질문에 갑자기 몸이 굳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까 어떤 아저씨가 오빠한테 전해달라고 이걸 줬어. 여기 봉투 위에 ‘병무청’이라고 적혀 있잖아.”
은우는 식탁으로 쪼르르 달려가 위에 놓인 봉투를 건우에게 전했다.
“뭐? 이 봉투가 병무청에서 온 거라고?”
깜짝 놀란 건우는 은우가 전해준 봉투를 재빨리 뜯었다.
[입영통지서]
봉투 안에 들어 있는 종이에 적힌 다섯 글자.
혹시나 했는데 진짜 ‘입영통지서’였다.
최건우라는 이름과 입영부대, 입영일시도 정확히 기재되어 있었다.
입영통지서를 보고 나서야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버드 의대를 그만두고 학원가로 뛰어들겠다고 마음먹었던 그 순간, 예상치 못하게 날아온 영장 때문에 우왕좌왕했던 그때의 기억이.
어떻게 고작 7살 아이에게 이렇게 중요한 통지서를 맡길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건 나중에 따져도 된다.
‘젠장! 아무리 경황이 없었어도 어떻게 이걸 잊을 수 있지?’
행여나 동생들을 돌보지 못하고 군대에 끌려가야 하는 건 아닌지 불안에 떨었던 그 시절.
그때의 기억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보라도 된 것처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 그런데 영장이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지? 내 기억대로라면 내년 초에나 영장이 날아와야 하는데.’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기억은 잘못되지 않았다. 분명 2015년 2월에 영장을 받았었다.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다른 변수가 생긴 것일까?
차라리 변수가 생긴 것이라면 다행이다. 만약 기억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렇다면 더는 지난 삶의 기억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건우가 애써 세워둔 미래 계획도 모두 수정해야 한다.
‘변수가 있다면 그게 뭘까?’
건우는 은우에게 계속 그림을 그리라고 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20살로 돌아온 이후 오늘까지 자신이 했던 행동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봤다.
이전 삶과 달라진 건 많았다. 열에 아홉은 예전과 다르게 행동했다.
그렇지만 달라진 행동과 입영통지서 사이에 연관성은 보이지 않았다.
‘영장이 날아오는 이유? 군대 갈 나이가 됐으니까. 아니야. 그런 이유라면 영장이 날아오는 날짜가 달라지지 않았을 거야. 날짜가 달라졌다는 건 입대 연기 사유가 없어졌다는 건데… 아! 맞다. 학교 휴학!’
지난 삶에서 건우는 의대 휴학계를 늦게 냈었다. 경황이 없었고, 하버드 의대에 대한 미련도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지금의 건우는 의대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혹시 미련이 생길까 봐 휴학계도 빨리 냈다.
마음 같아서는 자퇴서를 제출하고 싶었다. 그러나 강사 경력에 ‘하버드 의대 자퇴’보다는 ‘하버드 의대 휴학’이 나을 것 같아 자퇴는 나중으로 미뤘다.
그 선택 하나로 인해 미래의 결과가 달라진 것이다.
영장이 일찍 날아온 이유를 깨달은 건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미래의 기억은 잘못된 게 아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세워둔 미래 계획을 전부 수정해야 하나 했는데, 다행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결과만 이야기하면 지난 삶의 건우는 군대에 가지 않았다.
군에는 ‘생계유지 곤란사유 병역감면’이라는 제도가 있다.
본인이 아니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하여 가족의 부양비율, 재산액, 월 수입액이 법령에서 규정된 기준에 모두 해당이 되는 경우 병역감면처분을 받는 제도이다.
동생들 세 명은 모두 미성년자이며 학생이다. 건우를 제외하면 돈을 버는 사람이 없으니 이 문제도 결격 사유가 되지 못한다.
재산액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진 거라고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몰고 다니던 연식이 좀 된 소렌토가 전부였다.
추정 가격은 대략 1,000만 원.
그러나 과거에는 전세 자금 마련을 위해 1억의 계약금을 체결하는 바람에 수습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휴. 다행이다. 그렇지만 별것 아닌 선택 하나로 인해 미래가 달라질 수 있으니 앞으론 좀 더 심사숙고해야겠다.’
영장을 받았지만, 초조하거나 불안하진 않았다. 예전에는 몰라서 당황했던 뿐, 지금은 해결책까지 전부 알고 있다. 당황할 이유가 없다.
건우는 그런 난감한 상황을 슬기롭게 풀어내려는 것뿐이었다.
계약금을 받지 않는다고 자원봉사를 해줄 생각은 없다. 그 대신 건우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
건우는 색연필을 어설프게 쥐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은우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서울 북촌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한옥.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카랑카랑해 보이는 백발의 노인 앞에 공손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의심할 필요도 없는 실력자다. 손 과장 자네와 한강 에듀케이션 강사들 모두가 같은 의견이라는 말이지?”
“네, 회장님. 시범강의 결과 최건우 선생은 처음 우리 회사가 조사한 것보다 훨씬 대단한 남자였습니다. 그 정도 능력이면 머지않아 우리나라 학원계에 지각변동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그때가 언제가 되느냐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각변동 시기를 앞당기려면 계획보다 투자를 더 하라?”
원래 장만복 회장이 SAE 컨설팅에 약속한 투자금은 한강 에듀케이션을 살릴 능력이 되는 에이스 강사의 스카우트 비용이 전부였다.
그런데 건우의 능력이 생각보다 훨씬 뛰어났고, 그 잠재력을 확인한 손다정은 욕심이 생겼다.
“이런 말씀드리기 송구하지만, 지난번 한강 에듀케이션에 대한 투자는 전적으로 회장님 스스로 판단하신 일입니다.”
“크흠. 그래서 이번에는 자네와 자네 회사가 컨설팅해주는 일이니만큼 확실하다. 이 뜻인가?”
“네, 회장님. 지난번 투자 실패 때문에 구겨진 자존심을 완전히 회복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단순한 자존심 회복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회장님이 투자하셨던 그 어떤 투자처보다도 더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컨설턴트가 그렇게 성급하게 확신해도 되는가?”
“안 됩니다. 좋은 컨설턴트는 항상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알면서도 확신한다?”
“제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강의실. 오직 강사의 얼굴만 뚫어지라 쳐다보는 학생들. 그리고 학생들과 참관하던 강사들마저 단숨에 휘어잡아 버린 카리스마 넘치는 남자. 수업이 끝나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학생들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쳤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온몸에서 송골송골 식은땀이 흐르고 전율이 일었습니다.”
다정은 건우가 강의하는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한 듯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했다.
“손 과장이 보기에 최건우 그 친구는 어떤 사람인가?”
“네? 회장님.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자네 말을 요약하면 이거 아닌가? ‘최건우 선생을 믿고 투자해달라’ 그런데 내가 최건우 선생에 대해 아는 게 없어. 한번 만나보긴 해야겠지만 그전에 손 과장이 아는 것만 한번 읊어봐.”
“일단 머리가 굉장히 좋습니다. 20살에 하버드 의대에 들어갈 정도로요.”
“그런 건 나도 알지 않는가? 다른 걸 이야기해봐. 내가 혹할 만한.”
“머리 좋은 사람이 보통 인간미가 없다고 하는데 최건우 선생은 아닙니다.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 더 따뜻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입니다. 어린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꿈을 포기하고 학원 강사를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손다정은 지금까지 자신이 보고 느꼈던 건우의 모습을 최대한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장만복 회장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가끔 고개만 슬쩍슬쩍 끄덕였다.
그게 긍정적인 의미인지 부정적인 의미인지 손다정은 알 수 없었다.
“그래? 흠. 그렇단 말이지. 손 과장.”
“네. 회장님.”
“조만간 최 선생과 자리 한번 마련해봐. 자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 직접 만나보고 싶구먼.”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투자 건은 속는 셈 치고 믿어보도록 하겠네. 지금 이게 미련한 선택이 될지, 현명한 판단이 될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추가 투자금이라고 해봐야 장만복 회장에겐 푼돈.
그렇지만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함부로 투자하지 않는 신중한 성격을 생각하면 평소 장만복 회장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었다.
오직 손다정만 믿고 내린 결정. 그만큼 그녀를 신뢰한다는 의미였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장만복 회장의 재가까지 받아낸 그녀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건우에게 연락했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지금부터는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
입시전문학원은 고3 학생들뿐만 아니라 재수생이나 삼수생 이상의 학생들도 중요한 고객이다.
그러나 그들이 중요한 고객이 되기 위해서는 수능점수가 발표되고 대학 합격 여부가 완전히 결정되어야 한다.
누가 고객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 타깃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고객 유치를 위한 활동은 이르다.
한강 에듀케이션이 대비해야 하는 사람들은 지금의 고2들이다. 수능은 한 달 앞으로 다가왔고, 조금만 더 있으면 고2 학생들도 고3 체제로 전환된다.
2월 늦으면 3월이 되어야 공부를 시작하는 재수생 이상의 학생들과 비교하면 몇 달은 빨리 준비를 시작한다.
손다정이 담당하고 있는 한강 에듀케이션의 성공 여부는 그들을 고객으로 얼마나 끌어들일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어서 오세요. 최건우 선생님.”
“네. 정말 빨리 연락을 주셨네요.”
그래도 며칠은 걸릴 줄 알았는데 시범강의가 끝난 다음 날 바로 연락이 왔다.
“오래 기다리지는 못한다고 협박을 하셨는데 당연히 빨리 연락을 드려야죠.”
“그래도 며칠은 걸릴 줄 알았거든요.”
“후후. 이미 예상하신 것 아닌가요? 아니 오히려 바라고 계셨을 수도 있고요. 그러니 어제 그런 폭탄을 터트리고 가셨죠. 최 선생님 덕분에 한강 에듀케이션은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폭탄이라고 표현하시니 좀 그러네요. 재미난 선물을 드리고 갔다고 해주시죠.”
과거의 건우였다면 손다정의 노련함에 말렸겠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여유가 넘쳤다.
“그렇죠. 엄청나게 재미난 선물이었죠. 선물이 워낙 엄청나서 저희도 쉽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계약금으로 10억 드리겠습니다.”
“10억…이요?”
예상을 뛰어넘는 금액은 건우는 속으로 많이 당황했다.
웬만하면 놀라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10억은 웬만한 금액이 아니었다.
자신의 가치가 10억보다 낮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한강 에듀케이션의 여력을 고려하면 5억 원 정도가 적당했다.
그런데 10억이란다. 지난 삶에서 계약금으로 1억 원을 받았던 걸 생각하면 무려 10배나 뛰었다.
절대 다른 학원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손다정의 확고한 표현이었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정말 능력 있는 여자야. 과감하기도 하고.’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손다정의 최고 장점은 인간미였다.
낯선 학원 강의에 힘들어하던 건우가 스타강사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옆에서 위로하고 토닥여주던 손다정의 힘이 컸다.
예전에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지만, 사람 보는 눈이 생긴 지금은 꽤 탐나는 인재였다.
어차피 건우가 세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손다정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계획을 당장 실행에 옮길 건 아니라서 급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을 두고 그녀를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