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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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또 우리 익명의 후원자분께서 쌀 두 가마니 후원을! 허허! 신도들의 덕이 쌓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요. 이 시주는 아주 감사히 사용하겠소!”
길을 걷다 보면 하늘에서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지는 후원 세례.
이 서역행의 가장 큰 후원자, 당 태종과 원만한 합의를 이룬 끝에 얻어낸 결과다.
내 예상대로 황제가 기꺼이 후원자 역을 맡아주기 시작하자 그 밑의 것들도 절로 따라왔다.
소문은 귀족들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가 내세를 위한 덕을 쌓고 싶은 놈들이 너도나도 후원 경쟁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덕분에 우리의 여정은 막힘없이 진행 중이다.
아마도 그 능구렁이 황제는 의도적으로 소문을 흘렸을 것 같다.
자신이 우리의 후원자 역할을 홀로 담당하는 것보다 여러 명이 참여하면 자신에게 집중되는 부담도 줄어들고 겸사겸사 귀족들의 힘도 꽁으로 뺄 수 있는 기회이니 말이다.
황제에게서 소문을 듣게 된 고위층 귀족들은 자신들의 집에도 인방을 설치해달라고 성토하기 시작했고 그런 열띤 성원에 감동한 난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분신을 만들어서 설치하고 왔다.
반쪽짜리 일방향 소통 방송이긴 하지만 구경꾼이 있으니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세상 호구들 천지로군! 참 살기 좋아졌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손형? 꿰엑!”
“이 꿀꿀이 놈이! 소중한 후원이 끊기면 어쩌려고 함부로 입을 놀려.”
돼지 주제에 개소리를 지껄이는 놈의 입을 콱 잡아서 다물게 했다.
이곳에 와서 좋은 점이라곤 찾아볼 순 없었지만 그나마 소소한 즐거움이 하나 있다.
바로 성좌를 합법적으로 갈궈 먹을 수 있다는 점.
내게 주둥이를 잡힌 이.
대혁이의 담당 성좌이자 미래의 정단사자가 될 몸, 저팔계 되시겠다. 관계가 어쨌든 간에
이곳에서는 내가 손오공 역할을 맡고 있기에 전혀 문제 될 것 없다. 뭐 이곳의 상황을 알 턱도 없겠지만.
그래서 본래 이야기처럼 복릉산 아랫마을에서 깽판을 치고 있던 이 돼지를 빠르게 주워왔다.
“아이익! 그 손부터 나가는 습관 좀 제발 고치셔!”
“돼지가 말대꾸?”
“우리 말로 합시다! 평화! 사랑! 존중! 법사님! 손형이 폭력을 행사하려 합니다요!”
스폰서를 헐뜯은 악질 돼지를 응징해 준 다음 다시 법사님을 태운 백마의 곁으로 돌아와 재갈을 잡았다. 처음에야 저팔계를 쥐 잡듯이 잡던 내 모습을 간간이 말리시던 법사님도 이제는 그냥 강 건너 구경 모드시다.
“오공아. 아우를 아껴주려무나.”
“암요. 이게 다 제 나름의 애정 표현입니다.”
“허허.”
역시나 별말 안 하시는 법사님.
서천행은 아주 순탄하게 그리고 초고속으로 진행 중.
식량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미 수많은 호구, 아니 덕을 쌓으려는 후원자분들께서 넘치도록 시주하고 있기에 그것을 쓰거나 근처 촌락에서 교환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미 서천행 경험자인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 이 여정엔 막힘이 없다.
어렸을 적부터 지겹도록 들어온 이야기인데다 무식하게 직접 가본 적도 있기에 헤매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잠시 찾아온 관세음보살께선 이곳이 다른 세계에서 온 손오공의 심상 세계라 하였다.
그리고 현실 세계의 내 몸은 나와 체인지한 손오공이 차지하고 있다고 하니 뭔 짓을 할 줄 모른다. 적어도 홍해아 놈 정도는 곤죽을 내줬으면 하는데 말이지.
이곳에서 이뤄야 할 목적은 단 하나. 빠르고 정확하게 이야기를 마무리시킨다.
관세음보살께선 사라지기 전에 정체 모를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고 언질을 남겨주시긴 했는데 내 생각엔 아무리 봐도 경전밖에 없는 것 같다. 이곳이 오행산에 깔려 있던 손오공의 심상 세계라면 그의 이야기를 나만의 방식으로 완성시켜 주겠다.
“과거의 경험이 도움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참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뭘 혼자 그리 중얼중얼 거리쇼? 그거 굉장히 음침해 보입니다.”
“넌 걱정도 안 되냐? 먹을 생각만 하지 말고 나처럼 미래에 대한 설계 좀 그려봐라.”
“크하하하하! 손형은 생긴 것답지 않게 계집스러운 면모가 있구려.”
“…빨리 다른 놈을 구하든지 해야지.”
그 시절 스승님의 심정을 절실하게 느끼는 중이다.
이 돼지 녀석은 사람의 성질을 긁는 데 있어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의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아주 숨 쉬듯이 하는 것이다.
대혁이 놈의 끝없는 깐족거림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것만 같아.
성좌는 보통 같은 부류의 인간을 점찍곤 하는데 자기랑 성향이 비슷한 놈을 뽑은 게 분명하다.
“일행에 들일 이가 또 남았단 말이요?”
“그래.”
“하하! 막내 탈출이로군!”
“아닌데?”
“꾸엑?”
“누구 마음대로 막내 영입이야. 당연히 강한 놈이 형님 하는 거지.”
“아니! 손형! 이 모임엔 연공 서열도 없단 말이요!”
“어. 꼬우면 나보다 강해져.”
“손형!”
주먹이 법보다 가까운 시대에서 태어난 스승님의 가르침은 단순무식하다.
강한 놈이 법이다.
“아까 나보고 계집스럽다던 돼지는 어디 갔을까?”
“쪼잔하게 그런 걸 마음에 담아두고 계신 거요!”
“근데 이게 가만히 내버려 뒀더니 감히 형님한테 성질을 부려?”
짜악!
건방지게 튀어나온 놈의 올챙이 배를 손바닥으로 힘차게 후려쳐 버린다.
“꾸에엑!”
“징징거릴 시간에 순찰도 다녀오고 좀 그래. 네놈이 모범을 보여야 내가 막내를 영입할까 말까 고민이라도 하지.”
“헝헝! 손형 정말 너무하시오!”
뱃살에 두루치기를 당한 돼지는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가버렸다.
“오공, 이번엔 자네가 심했어.”
모든 걸 뒤에서 보고 계신 삼장 법사님이 연장자로서 훈계의 말씀을 이야기하신다.
“주기적으로 갈구지 않으면 머리끝까지 기어오를 놈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법사님.”
“팔계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찌하려고 그러느냐?”
“제가 장담컨대 다음 밥시간에 귀신같이 찾아올 겁니다.”
“껄껄.”
그 한마디로 납득하셨는 지 웃어넘기신다.
“그래서 새로운 일행 얘기는 또 무엇인가?”
“팔계 녀석 말고도 관세음보살께서 맡기신 문제아가 한 명 더 있거든요.”
“허어. 어떨 때 보면 이 고승보다 자네가 더 법제자다워. 관세음보살님과는 또 언제 얘기를 나누었단 말인지.”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회귀자의 양심을 찌르는 법사님의 발언에 쓴 웃음으로 웃어넘길 수밖에 없는 나였다.
. . .
콰앙!
어두운 공간 사이로 빛 한줄기가 쏜살같이 날아갔다.
화려한 선 하나를 그은 장본인은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래도 성에 차질 않는군.”
손오공.
정확히는 손우진의 몸을 빌려 현시대에 강림한 그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주먹을 반복해서 움켜쥐었다. 이 몸은 저 시건방진 조카뻘 녀석을 패는 데 문제가 되진 않는다만 본래의 신체에 비하면 부족한 감이 있다.
그는 부족한 신체의 강도를 자신의 밑도 끝도 없는 요기로 뒷받침하는 중이었다.
대요괴의 요기를 온몸에 둘러 상대의 공격이 몸에 닿기도 전에 상쇄시킨다.
인간의 몸이 신기하게도 미후왕의 요기를 문제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신기하긴 하다만 알 바 아니다.
오공은 본인 스스로도 지금 이 투정이 제법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하였다.
그 뽀글이 놈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으니 그걸로 된 거지…
본래 신체의 주인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이제는 돌아올 수도 없을 것 같으니 본인이 잘 사용해 줄 수밖에. 고맙게도 이 시대의 기억 또한 남겨두고 가서 적응하는 데 큰 무리도 없어 보인다. 오공은 얼른 저 건방진 놈을 처리하고 나서 새로운 세계를 마음껏 즐기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콰앙!
붉은색 빛 한줄기가 선을 그리고 날아갔던 저편에서 불덩이가 쏜살같이 날아와선 오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요기로 이루어진 호신강기와 맞부딪히자 힘을 잃고선 소멸해버렸다.
오공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벌레처럼 기어 다니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 그랬다면 성의를 봐서라도 못 본 척해주었을 텐데.”
“씨이발!!! 몸만 성했더라면 네놈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쿨럭쿨럭!
발악하듯이 소리 지른 이가 이내 피를 울컥 토해냈다.
신체 어디 하나 성한 곳 없어 보이는 이. 우마왕의 적장자 홍해아다.
홍해아는 손오공에게 호기롭게 덤벼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폭력뿐이었다. 압도적인 무력과 끝이 보이질 않는 요기로 인해서 과거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나 버렸다.
저 원숭이와 엮여서 좋은 꼴을 본 인간, 요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자연재해가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과 다름없다.
삼매진화는 이미 손우진 놈과 싸울 때 써버린 상태고 다시 사용하기에는 몸의 상태와 요기가 허락해줄 것 같지 않다. 홍해아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해 봤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큭큭. 발악하는군.”
“과거의 네놈도! 지금 네놈이 차지한 녀석도 당한 기술이 삼매진화다! 네놈이 갑자기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그럼 해 보거라.”
“지금쯤… 뭐라고 했지?”
“그 잘난 기술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지. 짐이 너그럽게 기다려주마.”
저 원숭이 놈은 기억만 존재할 뿐 삼매진화를 경험한 적이 없기에 저러는 것이다.
홍해아는 이 기회가 천재일우라고 생각했다. 놈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기술을 완성시키기 위해 홍해아는 재빨리 자신의 주위로 마차를 소환하였다.
“크흐흐흐… 네놈의 오만함이 목을 죌 것이다.”
“그건 두고 볼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