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되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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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슉!
내 정체를 알게 된 병사들이 급하게 나와 거리를 벌렸다.
전설로만 치부되었던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아니, 대요괴를 마주한 인간의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스승님의 첫인상은 충분히 위압감을 줄 만큼 사납게 생기긴 했다.
“아직도 못 믿겠으면 이 몸의 보패인 여의금고봉이라도 구경시켜 주랴? 이 궁터를 모조리 박살 낼 정도로 아주 크게 만들어서 말이야.”
“아닙니다! 믿겠습니다! 대인 그러니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큭큭.”
털보인 사내놈이 허겁지겁 애원하는 꼴이 아주 우습다.
스승의 모습을 빌려 재미도 모두 봤으니 황제의 근위대인 금군을 놀려먹는 것은 여기까지 하도록 했다.
나는 모습을 원래의 내 모습으로 돌린 뒤 이곳에 찾아온 본래 목적을 다시 한번 언급하였다.
“장난은 이쯤 두고 어서 이 몸을 황제의 앞으로…”
“누가 이리도 소란스럽게 구는 것이냐.”
내 말을 끊어먹고 개입해 오는 목소리.
쿵쿵.
이곳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
땅의 진동과 소리로 보아하니 무장한 놈들이 수십은 동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잔뜩 쫄아있던 군인들도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군기가 잔뜩 들어간 모습으로 대열을 갖춰 선 뒤 인사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드디어 귀한 몸이 소란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납시셨군.
그들의 주인이 궁궐로 들어선다.
주위엔 친위대를 잔뜩 거느린 채로 말이다.
‘쯧. 미신 같은 것은 믿지 않는 편인데 저저 관상이 딱 봐도 사람 여럿 죽여본 상이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눈매에 하관을 뒤덮은 검은 수염, 학문과는 담을 쌓은 것처럼 보이는 다부진 체격.
누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황제의 상이오라고 말하고 있는 군주의 상판대기.
용의 자수가 떡하니 박힌 황금색 용포를 입고 나타난 이.
지금 이 땅의 주인, 우리의 큰손, 후대에 문무대성대광효황제라 불릴 태종 이세민의 등장이다.
황제는 그 날카로운 눈으로 반갑지 않은 불청객인 나를 빤히 꼬나보고 있었다.
저런 사람과 의형제를 맺었다니, 법사님 당신은 대체…
겁쟁이 주제에 이상한 곳에서 담력이 커지는 것입니까.
“이 소란을 벌인 이가 그대인가?”
“폐하,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저것은 인간이 아니옵니다.”
황제의 곁을 지키고 서 있는 군바리 놈이 주인의 앞을 막아서며 나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외형을 되돌렸음에도 내 본질을 파악한 군바리.
그 예리한 감각으로 내 몸에서 풍기는 요기를 단박에 알아차렸나 보다.
남 말할 처지가 아닐 텐데.
저놈의 몸에 밴 피 냄새에 코가 찌릿찌릿하다.
아마 저들이 황제의 경호를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직속 친위대일 것이다.
첫 번째로 마중 나왔던 금군과는 달리 내 기세를 느끼고도 물러서는 기색이 없다.
황제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 따위야 가뿐하게 바칠 놈들로 이루어져 있겠지.
“장군.”
“예. 폐하.”
“짐도 눈이 달려있네. 미치지 않고서야 보통의 인간이 짐의 궁궐을 넘나들진 않았을꼬.”
“……”
보는 사람이 다 무안해질 지경이다.
당 태종의 지적을 받은 친위대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굳게 다물었다.
“북아금군 대장군은 물러서 있으라. 남아금군 모두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을 보니 대화야 가능하겠지.”
군바리는 그런 주군의 명령에 하는 수 없는 태도로 뒤로 물러섰다.
당 태종은 겁대가리가 없는 것인지 자신의 친위대장을 제쳐 두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래. 그대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무슨 일로 짐의 궁궐을 함부로 침범한 것이지?”
“대답해 드리기 전에 하나 확인부터 하지. 당신이 이 나라의 주인인 이세민 씨가 맞소?”
챙!
이전의 군인들이 흥분한 기색을 보이며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면 북아금군이라 불리는 친위대는 아무런 기색 없이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황제를 욕보인 놈을 처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냐는 듯이 말이다.
당 태종은 말없이 군인들을 향해서 손을 들어 올렸다.
황제의 손짓 한 번에 정돈된 자세로 무기를 집어넣는 친위대.
“크흐흐.”
그러고선 홀로 웃어재끼는 것이 아닌가?
이 넓은 궁궐은 주인장인 황제의 조용한 실소만으로 가득 찼다.
그의 웃음에 따라 웃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거 같이 좀 웃읍시다. 뭐가 그리 웃기시오?”
나는 그가 뻘쭘해하면 어쩌나 해서 웃는 연유를 물어보기로 하였다.
“흐흐. 짐의 이름을 육성으로 듣는 건 참 오랜만이라서 말이야. 염라대왕을 뵙고 온 뒤로는 처음이겠군.”
“염라 그 양반 얼굴은 다신 볼 일이 없어서 공감하진 못 하겠구만.”
“허, 그건 죽음을 극복하겠다는 비유적인 표현인가?”
“말 그대로요. 저승의 생사부엔 본인의 이름이 없거든.”
블러핑이 절로 늘어나는 기분이다.
스승의 행세를 하고 있을수록 몸속에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절로 차오르는 것 같다.
“…남아금군 장군은 이리로 오라.”
당 태종은 내 말을 듣고선 굳은 표정으로 금군의 책임자를 불렀다.
일찍이 내게 탈탈 털렸던 남아금군 장군은 황제의 호출에 헐레벌떡 주군의 앞으로 달려왔다.
“남아금군 장군! 폐하의 부름에 찾아뵙나이다!”
“장군. 저자의 정체에 대해 먼저 들은 것이 있는가?”
“그것이…”
“꾸물대지 말고 빨리 말하지 못할까!”
“본인의 입으론 자신이 제천대성 손오공이라고 주장했사옵니다!”
남아금군 장군의 입에서 튀어나온 폭로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리는 것이 느껴진다.
황제 역시도 스승의 개망나니 전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생사부에 자신의 이름을 지울 망나니는 우리 스승님 말고는 없었으니 유명했을 테지.
그건 그렇고 저 자식이…
내가 손수 스승님의 본모습을 보여줬는데도 뭐? 주장했사옵니다?
“거기 장군! 이리콤.”
까딱까딱.
“……”
이 악물고 못 들은 채 하는 남아금군 장군.
“금고봉 날아든다.”
“잠깐! 그것만은 안 되오!”
남아금군 장군은 황제의 윤허가 떨어지지도 않았는데도 쏜살같이 내 앞으로 튀어왔다.
참으로 충신이로다.
“이야! 이거 완전 군기가 빠졌네? 감히 신하가 황상의 허락도 없이 자리를 비워도 되나 몰라?”
“흐아악!!!”
내 말을 듣고선 소리를 지르며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황급하게 달려가는 남아금군 장군.
장군이나 되어서 이런 짬 취급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폐하!!! 이 불의를 용서하여주시옵소서!!!”
다시 당 태종의 앞에 도달한 남아금군 장군은 바짝 엎드려 자신의 주군께 용서를 빌었다.
“…남아금군 장군은 그만 물러가라.”
나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황제와는 계속 부대끼며 살아야 하거든.
당군의 군기를 바로잡는 내 행동에 큰 감동을 받은 건지 당 태종은 머리를 붙잡고
바짝 엎드린 장군을 물렀다.
그 뒤 황제의 윤허가 떨어지자 장군은 혼이 빠지 얼굴로 다시 내게로 뛰어왔다.
“허억허억…”
“이리콤을 듣고서도 무시한 당신의 잘못을 이제 알겠어?”
“대체 이리콤이 무엇인데 그러시는 것이오!”
“이리로 콤. 콤은 서역의 말로 오라는 뜻이지. 황상을 지키는 장군이나 되어서 서역 말도 깨치지 못했다니 쯧쯧.”
“이런 미친 새끼가…”
“뭐라?”
“모두 내 잘못이라 말했소!”
“큭큭! 내 장군의 성의를 봐서라도 다시 한번 이 몸을 소개해드리지.”
나는 몸에 갇혀 있던 요기를 마음껏 발산하였다.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붉은 요기는 점점 형상을 갖추어갔다.
“이 몸은! 화과산 돌덩이에서 벼락을 맞고 태어난 원숭이들의 왕!”
제멋대로 날뛰는 요기로 인해 대기가 요동치고 스산한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하계와 상계 모두 휘젓고 다닌 거대한 성인!”
금군은 황제를 호위하느라 내 자기소개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기껏해야 잡요괴 정도나 보았을 텐데 이런 대요괴의 요력을 경험하는 건 아주 귀한 일이지.
황제는 그 속에서 홀로 크게 뜬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제의 골칫덩이! 여래의 대적자! 제천대성 손오공이 인간들의 왕 이세민에게 인사드리오!”
. . . . .
그 난리를 피운 뒤론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정말로 내가 손오공인 줄로만 안 황제는 나를 자신의 본궁으로 초대해주었다.
“그런데 전설 속 이야기로는 손 선생께선 오행산에 봉인되었다 하였는데… 어찌 이제야 나타나신 것인지요?”
크으.
내 몸은 아니지만 출세했다 손우진.
이놈, 저놈, 저자에서 높디 높은 황제가 직접 손 선생이라 불러 주다니 말이다.
“허허! 그것을 이야기하자면 황상께서도 빠질 순 없지요.”
“예?”
“지금 본인의 상황이 어찌 되냐면…”
나는 스승님의 밑에서 지겹도록 배웠던 서유기의 앞부분을 각색해서 읊어 주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황제의 깨달음, 설법을 위해 초대한 삼장법사와 관세음보살의 등장.
흙이 들어간 술로 맺은 의형제와 서천행의 시작.
그리고 고난을 겪은 삼장법사와 만나게 된 오행산의 죄수.
“허어! 이렇게 생생할 수가! 형제와 만난 것이 확실하군요!”
이것을 들은 당 태종은 화들짝 놀라며 나의 신통력에 감탄하였다.
아무렴, 강제로 주입된 지식인데 잊어먹을 수가 없지.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셨군요 하하!”
당 태종 마음속에는 의심이라는 놈이 모두 방을 뺐을 것이다.
사고 친 요괴라고는 해도 전설 속 인물이 자신의 의형제를 도와준다고 하니 마음이 놓이겠지.
나는 얼추 준비가 된 것 같아 슬슬 준비해둔 밑밥을 깔아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황상.”
“예. 손 선생.”
“제가 있는 한 저 멀리 서천에 있는 경전을 구해 오는 것은 아주 손쉽겠지요?”
“그야 물론이지요! 아주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후우…”
“아니 갑자기 웬 큰 한숨을 쉬시는지? 뭔가 잘못되었습니까?”
“그게 아니라, 제가 걱정하는 것은 황상 바로 당신입니다.”
“예? 저 말입니까?”
미끼를 물으시오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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