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악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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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당했으면 억울하지도 않지.
대업이다 뭐다 하면서 협박성 회유를 먼저 권해온 곳은 저쪽이다.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 칠대성의 일원인 우리 스승의 힘이 필요한 모양인데
스승은 이미 천계의 일원이라 제자인 나를 회유하려는 거 아닌가.
뒤가 구린 놈들인 것 같아 거절의 의사를 표했더니 돌아온 것은
무차별 폭격과 내 가슴에 구멍을 빠앙.
그것을 수습하고자 기어스의 채무자가 되고 채무를 갚기 위해 천계까지 다녀오고
결국엔 늦은 나이에 팔괘로까지 들어갔다 오고.
칠대성 놈들에게 입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온 놈들이 지금 와서 모르쇠를 하겠다고?
장난하나?
“그게 무슨 소리지? 우리의 위대한 대업을 전해 듣지 못한 것이냐?”
“지금 와서 발뺌하는 건가? 만나자마자 가슴에 구멍을 뚫어준 게 그년인데 무슨!”
“그 아이에게 듣기로는 분명 그대가 제안을 거절해서 제거를 진행했다고 전해 들었는데… 크흠! 그 점은 본좌가 대신 사과하도록 하마.”
당황한 홍해아의 태도로 보아하니 토너먼트 때는 홍수아의 단독 행동이 맞았나 보다.
다혈질 년…
자기 상사에게도 가짜 보고를 올리는 일이 있더라도 나를 처리하고 싶었던 걸까.
지독한 행보에 소름이 돋는다.
“사과는 됐고, 지금이라도 그 대업이 대체 뭔지 나한테 설명해 주던가.”
“호오. 드디어 관심이라도 생긴 것이냐? 그렇다면 이 몸이 친히 설명해 줄 수 있지.”
그럴 리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칠대성 놈들의 대업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싶지도, 참여할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서 신성을 회복해야 하니 어떤 개소리를 하든지 간에 들어줘야 한다.
기회를 봐서 천도복숭아 하나 정도는 소환할 수 있는 때를 노려보기로 했다.
“우리 칠대성의 목표는… 단절이다.”
“단절?”
“그렇다. 지금 지상에서 벌어지는 작태들은 어떠하지? 원래의 질서라곤 찾아볼 수 없고 혼돈으로 가득한 상태지.”
“……”
“인간 놈들은 태고의 시절로 돌아가 신들의 개가 된 지 오래고, 우리 요괴들은 이계에서 넘어 온 잡것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고 있다.”
“그래서 신들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하고 주도권을 너희가 되찾겠다는 거냐?”
“그래! 지상은 온전히 지상의 존재들의 것이어야만 해!!”
홍해아는 붉은 눈을 번들거리며 자신들의 대업을 나에게 설파했다.
흥분한 그에게서 막대한 요력이 뿜어져 나온다.
“당신 그런데 신선의 길은 때려친 건가?”
“흥, 본좌의 태생을 다시 자각한 것뿐이다. 어울리지도 않는 짓이었지.”
‘이거…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밀레니엄 쇼크에서 대체 무슨 영향을 받았길래 관세음보살님의 밑에서 교화 과정을 거쳤다는
홍해아가 저 정도 요기를 풍겨대는 건가.
교화의 달인이라고 생각했던 관세음보살님의 실력에 살짝 의심이 간다.
아니, 스승님의 케이스를 생각해보면 정말로 운이 없던 것일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신선 시절의 홍해아는 더이상 없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나를 영입하려는 이유에 대해선 아직 충분히 못 들은 것 같은데.”
우걱우걱.
“아아, 그대를 영입하려는 이유는 지상의 정화를 좀 더 수월하게 하려는 것도 있지.”
“뭐? 정화?”
우걱우걱.
“제자인 그대가 우리 칠대성의 뜻에 함께한다면 변절자인 제천대성도 대요괴로 군림했던 시절로 돌아올 수 있는 일이고…”
꿀꺽!
“잠깐만. 그 정화라는 게 설마 인간들을 제거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정확히는 신들과 연결된 인간들만을… 잠깐, 그런데 자네는 아까부터 뭘 그리 맛있게 먹는 것이지?”
“아 이거? 특별히 선물 받은 천계의 복숭아인데? 가만히 들으려니깐 입이 심심하더라고.”
홍수아와 싸우면서 입었던 피해들이 말끔하게 회복되고 신성이 쭉쭉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녀석의 개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느라 좀이 날 뻔했던 몸을 이곳저곳 풀기 시작했다.
“칠대성의 영업 홍보는 잘 들었고 제 마음도 이미 정해진 것 같네요.”
“…하! 뻔뻔한 점이 굉장히 짜증 날 정도로 그 원숭이 놈과 꼭 빼닮았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내가 그 정도로 개차반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신들과의 접점을 끊기 위해 인간을 제거하고 요괴가 주도하는 세상을 만들겠다.
저 녀석들에게 협력하는 놈들은 제정신이 아닌 게 확실해졌다.
그냥 인간을 배반한 부역자인 셈이다.
지상의 존재들을 위해서 거창한 대업을 주장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놈들이 만든 세상에서 인간은 요괴의 먹이가 될 뿐이다.
포식자 놈들이 가축의 권리를 퍽이나 고려하고 생각해주겠다.
“뭔 소리를 할까 하고 얌전히 들어줬는데 시간만 날렸잖아. 우리 어울리지도 않게 이러지 말고 얼른 주먹이나 주고받자.”
“하아, 인간들은 이래서 피곤해. 그놈의 이타심이라는 게 대체 뭐라고.”
터벅터벅.
내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는 홍해아.
그는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홍수아가 걸터앉았던 관으로 다가갔다.
“자네를 위해 막대한 손해를 보고 지옥의 뱀과 거래했건만… 내 제안을 끝까지 들어 보지 그랬나. 일이 이렇게 되어서 정말 유감이군.”
끼이익.
홍해아가 아까부터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관의 문짝을 열어버린다.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게 해주마. 네놈은 혈육을 본 지 오래됐을 테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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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야, 네 동생 왔다.”
“지금 몇 신지 아는 사람?”
“하영이 왔으니깐 집에 갈 시간이겠지.”
연말연시에도 어린 손우진은 평소처럼 자신의 친구들과 단지 내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냈다.
내년이 오면 학교 친구들과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데.
이럴 시간도 곧 있으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쯤 손우진을 찾으러 그의 동생이 직접 찾아왔다.
“하영아.”
“엄마가 오빠 찾고 있어, 빨리 안 오면 오늘 나가서 안 먹겠다고 했단 말이야!”
“너 사실 나가서 못 먹을까 봐 뛰어왔지?”
“응!”
“알았어. 얘들아, 나 동생 때문에 먼저 갈게. 나중에 놀자.”
“그러지 뭐. 시간도 늦은 거 같은데.”
“잘 가!”
“다음엔 좋은 카드 좀 많이 챙겨 와 허접아!”
어린 손우진은 가운데 중지를 친구들에게 들어 올리곤 동생을 챙겨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빠, 나 궁금한 거 있어.”
“뭔데?”
“왜 엄마한테는 오빠가 하는 손가락 알려주면 안 돼?”
“손하영! 너 엄마한테 말했어?”
“아니?”
“휴… 하영아, 이거는 어른들한테 말하면 안 되는 비밀이야.”
“왜?”
“어른들이 알면 우리만의 인사를 따라 할 거야. 하영이 너 반에 개그맨들 유행어 따라 하는 남자애들 있어 없어?”
“있지.”
“걔네가 하는 거 보면 어때?”
“재밌어!”
“어휴, 하영이 넌 아직 어려서 이해 못 하겠다.”
어린 손우진은 동생에게 개똥철학이 담긴 변명을 급하게 해봤지만
동생인 하영이가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동생을 속여먹기 쉬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어린 손우진.
하지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점은 변함이 없다.
자신의 손을 꼭 잡은 동생의 고사리손을 쥐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번만큼은 동생을 내세울 수도 없는 상황.
“손우진! 오늘 엄마가 나가기 전에 뭐라고 말했었지?”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오라고 한 거 같은데.”
“근데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시작되는 어머니의 잔소리.
자신이 잘못한 점도 있기에 어린 손우진은 얌전하게 경청하고 있었다.
물론 마룻바닥의 점이나 패턴을 새면서 말이다.
“잘못했어? 안 잘못했어?”
“잘못했어…”
최대한 기가 죽은 연기를 해야 한다.
어린 손우진은 어머니의 화가 좀 더 빨리 누그러질 수 있도록 불쌍한 연기를 시작했다.
“으휴, 빨리 화장실 가서 손 씻은 다음에 옷 갈아입고 와. 아빠 오시면 외식하러 나갈 거니깐.”
“네에. 하영아 이리와, 너도 나랑 손잡았으니깐 씻어야지.”
“싫어, 오빠가 들어주면 씻고.”
“아직도 혼자서 손을 못 씻는 초등학생을 들어주는 오빠가 세상에 어디 있냐?”
“우리 반 친구들 중에는 많은데?”
“너 내가 친구들한테 물어본다?”
어린 손우진은 말은 그렇게 했어도 동생을 데리고 세면대로 향한다.
자신을 손을 깨끗이 닦은 뒤 꼼꼼히 말리고선
아직 키가 작아 세면대를 이용하는데 불편을 겪는 동생을 손수 들어주는 어린 손우진.
“손가락 사이도 비누칠해야지.”
“하려고 했거든? 담임 선생님이 손 씻는 법 알려주셨단 말이야.”
“그래. 하영이 너 잘났다.”
동생과는 나이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자신의 친구들을 이겨 먹는 것처럼 할 수가 없다.
어린 손우진은 자신의 동생이 자기보다 더 영악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도 나갈 채비를 마치시고 동생인 하영이와 소파에 앉아 잠시 티비 속 만화를 보는 손우진.
곧이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왔다.”
“아빠!”
“하영아!”
“다녀오셨어요.”
“밖에 차가 엄청 막혔을 텐데 일찍 왔네요?”
“어휴, 말도 마. 연말에 외출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기억 속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시콜콜한 하루 일상 이야기를 주고받으신다.
여기서 반드시 막았어야 했는데.
나가선 안 되는 날이었는데.
“오랜만이야, 오빠.”
그때 내 눈앞에 있는 현실의 하영이가 나를 과거에서 끄집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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