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악인전
* * *
신전 안으로 들어서자 내부는 어두컴컴하다.
성역 안을 온통 주인의 취향대로 꾸며둔 것이 음침하기 짝이 없다.
“여기서 대체 뭔 짓들을 하고 있길래 꼭꼭 숨어든 거냐.”
악신의 말로는 계약의 이행은 이미 끝이 났다고 하였다.
그 말은 즉 본인 스스로 계획한 것이 아니라 제3 자와 계약을 맺어서
이런 짓을 벌였다는 것인데.
나를 엿 먹이고 싶어 하는 이들은 셀 수도 없이 많긴 하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개지랄을 떨 놈들은 역시나 단 한 곳만 생각난다.
칠대성.
“요새 잠잠하다 싶더니… 하긴 가만히 있는 게 이상한 놈들이긴 하지.”
복해대성 교마왕이 내게 패배한 이후로 칠대성은 이상할 정도로 얌전히 지내긴 했다.
이번 일에는 또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다른 악신에게 외주까지 맡길 정도면 정성도 꽤 들인 것으로 예상하는데.
그것도 지옥의 악신에게 부탁해 사악한 사술로 죽은 자를 다시 되살리는 비윤리적인 일들까지 벌이니 말이다.
터벅터벅.
어두운 신전 안에선 그 속을 걷고 있는 내 발걸음 소리만이 들렸다.
지나칠 정도로 고요한 신전.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서 악신의 광신도라던가 숭배자 놈들이 튀어나와
길을 막을 줄 알았건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야! 아무도 없냐!”
야! 아무도 없냐!
야! 아무도…
야…
악신의 신전 안에서 메아리가 되어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내 목소리.
“하여간 이것들은 기본이 안 됐어. 손님이 기껏 찾아와 줬는데 마중은 나와야 할 거 아니야.”
저벅저벅.
그때 어두컴컴한 암흑 속에서 사람의 발걸음으로 추정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사가 효과가 있었는지 이제야 누구라도 마중을 나오나 싶었는데…
저벅저벅.
이쪽을 향해서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는 소리.
그런데 어째 소리로 듣건대 한 명인 것 같지는 않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그 발소리의 주인공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붉은 안광을 뿜어내고 있고 어둠 속에서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정확히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필수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생기가 그들에겐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무섭게들 눈을 왜 그렇게 뜨고 있어?”
“그아악!!!”
내 인사가 기폭제가 되었는지 천천히 걸어오는 것을 멈추고 이제는 뜀박질을 시작하는 놈들.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지는 않았기에 나는 들고 있던 여의를 고쳐 잡았다.
“크아아악!”
“윽! 무슨 완력이!”
달려드는 그들을 여의를 내세워 막아냈지만 밀어붙이는 힘이 평범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뚜드득!
그렇지만 그 비정상적인 힘을 견디지 못하는 것인지 그들의 팔에서 뼈가 부러져 튀어나오거나 꺾여서는 안 될 방향으로 뒤틀린다.
자신들의 몸이 상하건 말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달려 붙는 이들.
“좀 진짜!”
망자 무리를 밀쳐낸 뒤 여의를 머리 위로 회전시켜 놈들을 털어내었다.
하지만 놈들은 내가 무슨 원수라도 되는 마냥 포기를 모르고 달려들려 한다.
콰직.
그렇게 드잡이질을 하는 사이 빈틈을 노려 망자 한 명이 내 팔을 물어버렸다.
그렇지만 오히려 깨문 망자의 이빨이 산산이 조각나 버린다.
천계의 팔괘로도 버틴 몸이 고작 이빨에 흠집이 가겠는가.
퍼억!
내 팔을 깨문 놈에게 꿀밤을 먹여주었다.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망자들을 상대하고는 있지만 저들과 드잡이질을 해봤자
시간과 체력을 이중으로 낭비하게 된다.
한 방에 끝내버리자.
뒤로 물러선 뒤 오행 중 불의 기운을 여의에 담아내어 뜨겁게 달궈 낸다.
“하아!”
그리곤 기운을 흡수해서 붉게 달아오른 여의를 전방을 향해 힘차게 휘둘렀다.
화르륵!
지성이 있는 생명체라면 그 위험한 불길을 보고 피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저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행의 불꽃을 향해서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캬아아악!!!
어두컴컴한 악신의 성역이 여의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으로 인해 환하게 밝아지고
오행의 파괴력이 담긴 불꽃을 뒤덮어 쓴 망자들은 맥을 못 추고 이리저리 날뛰고 있다.
곧이어 잔불이 은은하게 빛날 때쯤에는 숯덩이가 된 망자들이 바닥에 차갑게 누워 있었다.
그 숯덩이에서 죽은 육신에 갇혀 있던 푸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제라도 편히 쉬시길.”
어떤 사유로 망자가 되었는지 나로선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안식을 찾길 바랄 뿐이다.
망자의 잔해들을 뒤로 한 채 계속해서 신전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을 걷고 나서야 나는 악신의 성역 가장 깊은 심층부로 보이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생김새가 비슷한 망자들의 습격이 몇 차례나 더 있긴 했지만 그들을 모두 성불시켜주었다.
내 앞에 보이는 이 거대한 문.
누가 보더라도 이곳이 중요한 곳입니다 라고 알려주고 있다.
“안에 있으면 문 열어.”
쿵쿵쿵.
시험 삼아 문을 가볍게 두들겨보았지만 역시나 열리지 않는 문.
강제로 힘을 줘야지만 열리는 무식한 방식인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은 도구의 동물.
손에 쥔 여의를 향해서 평소와 같은 도움을 요청하였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게?”
우우웅.
말하지도 않아도 내 뜻을 알아주는 녀석.
지금 여의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기특한 것.”
여의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자마자 몇 번 쓰다듬어 준 뒤 대문을 향해서 여의를 겨누었다.
“커져라.”
콰아앙!!!
거대화한 여의가 문제를 단 한 번에 해결해주었다.
꿈쩍도 하지 않던 문도 강한 물리력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여의의 크기를 다시 줄인 뒤 문이 박살 난 여파로 생긴 먼지를 헤쳐 가며 안으로 들어섰다.
“당신은 참 한결같군요.”
뿌연 먼지 너머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속이 매우 불편해지는 기분이다.
“이야! 오늘 무슨 날인가? 반가운 얼굴들이 줄줄이 나오네.”
먼지가 걷히고 모습을 드러내는 목소리의 주인공.
“오랜만이에요, 손우진.”
“홍수아.”
칠대성의 일원.
변절자 중 한 명인 성영대왕 홍해아의 화신.
그리고 내 가슴에 시원한 바람구멍을 한 번 내준 장본인이기도 한 홍수아가 나를 반겨주었다.
김승연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홍수아까지.
과거의 악연들이 줄줄이 나를 만나고 싶어 환장한 것인가.
나야 반갑기 짝이 없다.
이번에야 말로 정말 끝장을 볼 수 있는 기회이니 말이다.
“그런데못 본 사이에 많이 컸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홍수아는 어린아이 같은 외형에서 벗어나
고등학생 정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토너먼트에서 패배한 뒤로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보다.
“당신과 만난 이후로 저도 가만히 있진 않았거든요.”
“거 아무거나 주워 먹고 그러면 탈 날 텐데 참… 그나저나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지금이라도 우리의 대업에 합류한다면 기꺼이 알려드리죠.”
“참 나, 너무 날로 먹으려 드는 거 아니냐.”
“후후.”
훅!
여의를 홍수아에게 겨누고 말을 이어 간다.
“댁들이 꾸민 일 덕분에 내 심기가 아주 불편한 상태에요.”
“그 역겨운 것 좀 제 눈앞에서 치워주시겠어요? 구역질이 날 것 같네요.”
“아아, 그때 여의한테 호되게 당해서 안 좋은 기억들이 다시 떠오른 거냐?”
“정말… 너는 여전히 짜증나는 놈이군.”
붉게 물드는 홍수아의 머리.
그와 함께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신성의 크기도 급격하게 증가한다.
그동안 가만히 있지 않았다는 말은 허세가 아닌 듯 홍수아에게 느껴지는 신성의 크기는
토너먼트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너는 모를 거야.”
“나도 마찬가지야. 내 뒤통수를 노리는 놈들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무서워서 잠도 못 잤다고.”
“궁금해? 왜 지금까지 조용히 지내왔는지.”
“응, 궁금해. 그러니 얌전히 털어놓을 건지 아니면 개같이 처맞고 털어놓던지 둘 중 하나만 골라.”
걸터앉은 관 비스무리한 것에서 홀짝 내려오는 홍수아.
“흥. 여기까지 오면서 만났던 인간들은 모조리 처리했어?”
“말은 똑바로 하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었던 존재겠지.”
“그것들은 전부 초창기 실패작들이야. 혼과 육체의 거부 반응 때문에 자아를 되살리지 못했거든.”
“……”
“그다음 실패작들은 알다시피 네가 만났던 인간… 한승원이라고 했었나?”
저 년은 역시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쓴 괴물이다.
입에서 꺼내는 얘기들이 하나같이 잔혹하기 짝이 없다.
무엇을 말할까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들어준 내 잘못이다.
“이번에는 자아를 되살려 놓았더니 육신이 얼마 버티지 못하더라고.”
“적당히 해.”
“흐응, 그 잠깐 사이에 그 실패작에게 정이라도 생긴 거야? 우리 챔피언 불쌍해라…”
“아가리 닫아 역겨운 년아.”
하긴 우리 둘이 언제부터 말을 섞는 살가운 사이였다고…
전후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서 대화를 해보려 했지만 저 년은 요괴들의 하수인.
생리적으로 무리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역함을 참을 수가 없어서 바로 전투에 들어가기로 했다.
“어머? 이 다음이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안 듣는 거야?”
“그냥 널 쥐어패면 알아서 불 것 같아서. 덤벼.”
“후후… 나도 바라던 바야!”
홍수아는 두 손에서 자신이 자랑하던 화염을 피워 올려 나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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