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과거의 악연
* * *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지만, 아직 특별할 만한 낌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덕분에 일주일 동안 집 안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데 말이다.
언제 동생이 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기에 삼라만상이라는 기술을 사용해서
계속 동생의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어떤 소득도 건질 수 없었다.
“이럴 놈들이 아닌데 말이지.”
이것은 태풍이 오기 전 고요함에 불과하다.
자신의 주인이 그렇게 증오해 마지않는 유일교의 성직자에게 저열한 도발을 당했는데
그 밑의 수하 놈들이 안 움직일 리가 없긴 하지.
일주일 동안 삼라만상을 유지하는데 소모되는 신성도 무지막지했기에
나는 잠시 기술을 중단하고 잠시 쉬기로 하였다.
방 밖으로 나와 거실로 나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때
머릿속으로 분신 진우 놈에게 전음이 왔다.
‘손우진, 동생에게 미행이 붙었어.’
지금은 끊임없이 기술을 사용한 터라 삼라만상도 다시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
놈들이 만약 이것을 노린 것이라면 우리 집에는 도청 장치 혹은 도촬 카메라가 있을 것이다.
타이밍 한 번 참 개 같네.
‘머릿수는?’
‘느껴지는 기척으로만 일곱,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야.’
목적은 놈들의 본거지를 찾아내 기습하는 것.
소정이는 그것을 위해 자신이 직접 미끼가 되는 길을 택했으니 믿고 따라야 한다.
‘소정이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개입하지 마, 놈들도 어차피 납치가 목적일 거야.’
‘알겠어. 일단은 널 위해서 추적을 위한 흔적을 남겨 놓을게.’
가장 자아가 발달 된 분신이 진우 놈이기에 특별히 소정이에게 붙여 놓은 건데
걱정하지 않아도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알아서 잘 대처하겠지.
나는 냉장고를 열고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천계의 복숭아를 꺼내 먹는다.
복숭아를 씹은 뒤 과즙이 몸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닥이 났던 신성이 쭉쭉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지긋지긋한 놈들 이번에 끝을 보자.”
질긴 악연을 이젠 청산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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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우진을 대신해서 가장 오랫동안 활동했던 분신 손진우는 몸집을 조그맣게 줄여서
안소정의 머리카락 속에 숨어 기회를 엿보는 중이다.
손우진의 동생인 안소정은 적당히 몇몇 놈의 머리를 깨뜨린 뒤 제압당한 상태라
의식을 잃고 얌전히 놈들에게 끌려가고 있다.
손진우는 조용히 악마 숭배자들을 지켜보았지만 놈들은 자기들끼리도 어떠한 얘기도 하지
않은 채 안소정을 차에 태워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상황.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잠깐만, 바다?’
철썩철썩 소리가 들려오고 짭조름한 냄새가 코에 흘러 들어온다.
놈들이 장시간 운전을 마치고 도착한 곳은 어느 이름 모를 항구였다.
끼익.
곧 차가 멈춰서고 악마 숭배자 놈들이 기절한 안소정을 들춰 매고 간다.
“목표는?”
중간 관리직으로 보이는 놈이 배에서 내려 자신의 부하에게 보고를 지시한다.
“확보했습니다.”
“큭큭, 건방진 년… 위대한 대악마를 모욕한 죄는 목숨으로 갚아야 할 테다.”
안소정을 짐짝 다루듯이 받아든 녀석은 그녀를 배에 태우고 출항을 지시한다.
그 모든 광경을 안소정을 대신해서 지켜보고 있던 손진우는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고 느꼈다.
‘배를 타고 간다는 건 놈들의 본거지가 한국이 아니라는 건데…’
본체인 손우진이 잘 따라와야 할 텐데.
그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안소정을 지켜야 하는 이는 분신인 자신 혼자뿐 이기에
손진우는 어두컴컴한 창고 속에서 다시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동생, 정신 차려. 괜찮아?”
틀렸다.
손진우가 계속해서 안소정을 깨우려고 노력해 봤지만 그녀는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악마 숭배자들이 제압 이후 쓴 마취 약물 때문인지 안소정의 의식은 깊게 가라앉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선 손진우의 붉은 눈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후우…”
퉁퉁퉁퉁.
낡은 엔진 소리가 손진우의 감정을 고양 시켰다.
본체인 손우진의 부탁으로 화과산에서 방송을 도맡아 하다 전투를 치르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손진우는 자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옛 시절이 문뜩 떠올랐다.
그때도 곁에서 지켜야 했던 이는 안소정이였는데.
지금도 분신인 손진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은 동생을 지키는 것.
낡은 배의 엔진이 서서히 멎어 들어갈 때쯤 손진우와 안소정이 갇혀 있는 창고의 문이
열렸다.
“빨리빨리 옮기자고… 허억!”
안소정을 자신들의 본거지로 데려가기 위해 창고의 문을 열었던 놈이 놀라 나자빠졌다.
어둠 속 붉게 빛나는 눈과 마주쳤기에 당연한 반응일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 새낀 누구야! 끄아아악!”
빠악.
그 붉은 눈이 악마 숭배자의 눈앞에 도달했을 때 신체 어딘가가 박살 나는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진우는 처음으로 문을 연 놈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어 코뼈를 박살 내 주었다.
분신이라고 해도 손진우 자신의 전투력은 본체에 기반하기 때문에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진 상태.
시시한 악마 숭배자의 콧등쯤이야 한순간에 납작하게 만들어 버릴 무력 정도는 지니고 있다.
“손, 손우진이잖아!!!”
“대체 이 새낀 어디서 튀어나온 건데!”
“으아아악!”
“겁, 겁먹지 말고 다 같이 덤벼들어!!!”
본체 놈과 생긴 게 똑같아서 다행이군.
손진우는 속으로 자신의 본체의 지랄맞은 명성에 감사를 표하기로 했다.
제대로 싸워 보기도 전에 저렇게 적들이 알아서 혼란에 빠졌으니 말이다.
착각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것은 저쪽 사정이고.
그러거나 말거나 손진우는 굳은 몸을 서서히 풀어가며 악마 숭배자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퍼억! 콰직! 빠각!
인간의 신체에서 들려선 안 될 소리가 몇 차례 난 이후.
손진우는 고요한 선상 반란을 혼자서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첨벙!
어차피 도움 될 것 하나 없는 놈들이기에 악마 숭배자들을
하나둘씩 배 밖으로 던져 버리는 손진우.
살아생전 인류에게 폐만 끼치고 간 놈들이지만 이 정도면 해양 생태계를 위한
공헌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손진우는 구름을 불러와 근두운을 만들어 낸 뒤에 그 위로 안소정을 태우고 하선하였다.
“아무래도 여긴 한국이 아닌 거 같은데.”
손진우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추정조차 할 수 없었다.
근두운은 잠든 안소정을 태우고 손진우의 뒤를 졸졸 따라온다.
본체인 손우진과 연락을 해보려 했지만 전음 역시도 잡음이 낀 것처럼
매끄럽게 전해지지 않았다.
“여긴 대체 어디야?”
황폐한 거리.
드문드문 보이는 박살 난 건물들, 하지만 그 연식은 굉장히 오래되어 보인다.
인적은 찾아볼 수도 없고 불쾌한 기운이 대기에 가득하다.
이 찐득하고 음침한 기운을 봐서는 놈들의 본거지가 가까워진 것 같은데.
손진우는 계속해서 나아가 보기로 하였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손진우의 앞으로 실마리가 튀어나왔다.
누가 보더라도 음침한 지하의 것들이 살고 있을 법한 외관을 지닌 사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대놓고 광고를 해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네.”
그럴 수밖에, 위대한 그분의 영역을 숨겨서는 안 되는 일이지.
손진우의 혼잣말에 들려와선 안 되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위기 감지 능력이 경종을 울린다.
지금 자신의 말에 대답한 정체불명의 것은 위험한 놈이라고 손진우는 판단했다.
“나와. 얼굴이나 보고 얘기하지 그래?”
후후, 손우진 네놈이 그렇게 원한다면야.
분신인 손진우의 앞으로 지옥의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그 사악한 피조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불길이 모두 꺼졌을 때 손진우는 놈에게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으로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너 설마 김승연이냐?”
“호오! 그 고귀한 챔피언께서 이 몸을 아직도 기억해주다니 그거 정말 큰 영광이군 그래 하하하!”
머리에 솟아난 굽은 뿔과 등에 달려있는 피막의 날개.
눈은 오직 칠흑 같은 검은색만으로 이루어져 있고 날카로운 꼬리는 이리저리 휘둘린다.
손진우 자신이 마지막으로 봤을 땐 인간도 악마도 크립티드도 아닌 어중간한 생명체였을 텐데
어느새 성형 수술을 마친 건가.
지옥의 복지는 꽤 확실한 편인가 보다.
타락한 성직자, 김승연.
그는 분명 본체에게 패배한 뒤 악신의 손아귀에 붙들려 지옥으로 끌려갔을 텐데?
찌푸려지는 손진우의 미간.
손진우는 이 악연의 재등장에 불쾌함을 감출 수 없었다.
자아가 발달하지 않은 시절이긴 하지만 손진우는 김승연에게 패배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해 낸 기술 등용문으로 잠시나마 시간을 벌 순 있었지만 온갖 신성을 흡수한
성직자 괴물에게 완력으로 밀려 버린 것 또한 사실이다.
분신인 자신에게 있어 첫 패배를 안겨준 놈을 다시 만났기에 손진우의 표정은 굳어졌다.
“너 지금 속으로 할만하다고 생각했지? 멍청한 새끼야, 안 됐지만 난 분신이거든?”
“뭐라? 아아… 크크큭. 그 반푼이 놈에게 다시 동생을 맡기다니, 손우진 놈도 안일하기 짝이 없군.”
“오늘 한 번 그 반푼이 새끼한테 뒤지게 처맞고 가자. 이번에야말로 성불시켜 줄 테니 말이야.”
“…이 시건방진 놈이.”
자신의 기운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김승연.
평범하지 않은 외형처럼 뿜어내는 기운 또한 심상치 않다.
손진우도 이제는 자신의 것이 된 천 개의 여의 중 하나를 꺼내 들고서 전투태세를 갖춘다.
오늘 하루는 제법 길어질 것 같다고 생각하는 손진우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