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외전 별들의 의회
* * *
싸움, 폭력, 유혈, 투쟁, 분노, 파멸.
그런 수라장을 걸어 온 투신들은 성좌 중에서 가장 원초적이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편이다.
올림포스 전쟁의 신과 천계의 투전승불 사이에서 발생한 분쟁.
투신들 사이에서 유별나게 다혈질인 두 성좌가 결국엔 맞붙게 되었다.
이는 별들의 의회에 참석한 성좌들에게도 큰 관심사로 떠올랐다.
성좌끼리의 분쟁은 어지간해선 발생하지 않는 드문 일이기 때문에
모든 이들의 관심이 결투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손오공이 의회에서 보여준 오만방자한 태도로 인해 아레스를 지지하는 성좌들이 더 많아 보인다.
올림포스에서 벌어지는 투신들의 결투.
전쟁의 신 아레스는 아까 전 불과 같이 화냈던 것과는 달리 결투 직전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갑옷을 착용하고 무장을 확인하고 있다.
그에 반해 맞은 편에 있는 손오공은 태평한 태도로 비치되어 있는 과일을 입안으로 털어 넣는다.
“니케, 누구의 승리를 점칠 수 있겠어?”
올림포스 12신을 위한 상석에서 자신의 오랜 단짝인 승리의 여신 니케에게
결투의 승패를 미리 물어보는 여인, 아레스의 이복누이인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
절레절레.
승리의 여신 니케는 그런 아테나의 물음에 눈을 감고선 고개를 젓는다.
“흐음…”
아테나는 깊은 신음을 흘린다.
과연 두 명의 투신 사이의 격차가 어느 정도이길래 니케가 저런 태도인 것인가.
자신의 이복동생 아레스는 성격이 급하고 전쟁밖에 모르는 바보이긴 하지만 전투력에 있어서는 아테나 자신과 비슷하거나 우위를 점칠 수 있는 투신이다.
아테나가 지혜와 전술로 전투의 판도를 읽어 승리로 이끄는 문무겸비 군신이라면
아레스는 무자비한 폭력, 원초적 투쟁 본능으로 전쟁을 이끌어가는 공포의 군신.
지금이라도 개입해 동생을 말려야 하는가?
하지만 아테나는 그럴 수 없었다.
아레스는 누이가 그렇게 개입해봤자 더 갈가리 날뛸 것이 뻔할 테니깐.
“신성한 결투를 시작하기 전에 양측 성좌는 모두 본인의 자리로 이동하시오.”
올림포스의 주인인 제우스가 결투의 시작을 알린다.
자식인 아레스와 친우인 손오공이 싸우게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성좌의 자격으로 맞붙게 된 일.
그는 이번 별들의 의회 의회장이기에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
아레스가 자신의 중무장을 마치고 결투장 위로 올라온 것과는 정반대로
손오공은 그 어떤 무장도 하지 않고 올라왔다.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처절하게 짓밟아 주마!”
“어린 투신아, 그런 조잡한 것들이 널 지켜줄 것이라 믿는 것이냐?”
손오공이 몸 안에 잠들어 있던 투기를 끓어올리기 시작한다.
그 흉포한 기운에 이를 지켜보던 성좌들마저도 흠칫하며 놀란다.
‘어림없는 일이었어, 니케가 예상한 것처럼 아레스는 패배할 것이다…’
손오공이 기운을 방출하자마자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테나는 생각을 바로 고쳤다.
어떠한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뿜어대는 기운이 이미 아레스를 훌쩍 상회한다.
이복동생인 아레스 본인도 이미 그것을 체감했으리라.
그렇지만 군신으로서의 알량한 자존심이 아레스를 물러서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럼 전쟁의 신 아레스와 투전승불 손오공의 결투를 시작하겠소!”
입회인인 주신 제우스가 결투의 시작을 알린다.
결투가 시작되자마자 아레스는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서 있는 손오공에게 달려든다.
“흐아압!”
그가 들고 있는 군신의 검이 거대한 검기를 방출하면서 손오공을 향해 휘둘러진다.
수많은 전쟁에서 병사들과 괴물들을 도륙 내었던 군신의 검.
하지만 손오공은 자신을 두 동강 내려는 그 검을 보고서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까앙!
아레스가 휘두른 군신의 검은 손오공의 어깻죽지를 강하게 내려쳤지만
손오공의 신체가 반으로 갈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금속과 금속이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만 날 뿐.
보통 신선의 경우라도 먹기 힘든 서왕모의 복숭아, 태상노군이 직접 빚은 영약 수백 개 등을 훔쳐먹고 탄생한 손오공의 단단한 육체에 흠집을 내는 것은 힘든 일이다.
“크윽!”
“흥, 조금의 기대는 해 봤건만…”
아레스의 복부에 자신의 주먹을 가져다 대는 손오공.
퍼엉!
주먹을 갖다 대었을 뿐인데 아레스는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저 멀리 나가떨어진다.
훌쩍 뒤로 날아가 경기장 벽에 처박히는 전쟁의 신.
그 가까운 거리에서 아레스의 복부에 촌경을 박아넣은 손오공.
아레스 본인은 그것을 눈치챌 틈도 없이 빠르게 주먹을 내지른 것이다.
손오공은 여전히 싱거운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본다.
“이대로 끝낼 것이냐?”
“죽여버리겠다 손오공!!!”
콰아앙!
벽에 처박힌 아레스는 빠르게 일어나서 난동을 피운다.
분노가 전쟁의 신의 머리를 온통 지배했을 때 그의 폭력성과 투기는 매섭게 증가한다.
“그래, 그 기세만큼이나 좀 열심히 싸우면 얼마나 좋을까!”
“으아아아악!!!”
쿵쾅거리며 달려온 아레스가 손오공을 향해서 군신의 검을 뽑아 든다.
이전보다 커진 흉흉한 붉은색 검기를 생성해내 적을 향해 휘두르는 아레스.
진작에 이럴 것이지.
전쟁의 신의 공격에 대응할 마음이 생긴 손오공.
손오공은 그런 무자비한 검을 상대로 투기를 집약한 손가락 단 하나로 계속해서 막아내 버린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실망감만 생길 뿐이다.
“투신이라는 놈이 지금까지 본능에 휘둘려 전투를 이어왔던 거냐! 한심한 놈!”
투전승불인 그는 불심으로 요괴인 자신의 본능을 극복하는 데 성공한 성인이다.
그런 손오공의 눈으로 보기엔 분노와 폭력에 휩쓸려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아레스가 한심하게 보이는 것이다.
“죽어!!!!”
다시 한번 손오공을 향해 자신의 검을 내리치는 아레스.
“머리로 피가 너무 쏠렸군.”
그렇지만 그 일격 역시 손가락 단 두 개만으로 잡아채 버린다.
“크으윽!!! 아아아악!!!”
“본능에 이끌리는 대로 행동하면서 이 정도인 것이냐, 싱거운 놈 같으니.
이 몸이 몸소 보여주도록 하마. 애송이 투신 녀석아.”
아레스는 계속해서 군신의 검에 힘을 불어넣고 있지만 손오공에게 붙잡힌 검은
꼼짝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손오공은 이 천둥벌거숭이에게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보구 여의금고봉은 제자 놈에게 물려줬기에 지금은 사용할 수 없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화과산 정상의 돌에서 태어나 산의 원숭이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고
하늘을 평정하겠다는 일념 아래 활동했던 제천대성 시절과 서역에 다녀오는 손행자를 거쳐
그 고행 끝에 투전승불로 거듭난 것이 바로 자신이다.
하지만 손오공의 내면엔 아직도 그 본성이 잠들어 있다.
손오공은 불심?心으로 깊이 억눌러 놓았던 자신의 요력을 슬금슬금 해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종의 거울 치료.
본능에 휘둘리는 애송이 놈에게 진정한 괴물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손오공의 몸에서 붉은 요기가 화르륵 일어나자
막무가내로 계속해서 검을 밀어 넣던 아레스가 급하게 손오공과 거리를 벌린다.
자신의 동물적 감각이 보내오는 경고.
저것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존재다.
그 감각이 계속해서 경고를 보내오고 있다.
“대체 네놈의 정체는 뭐란 말이냐!!!”
붉은 요기가 정제되어 점점 손오공의 몸 안으로 흡수되어가고 모습이 드러난다.
그의 붉은 눈과 황금빛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욱더 불길하게 빛나고 있다.
“이 해방감은 정말 오랜만이로군.”
“대답해!”
쉭!
순식간에 자신과 거리를 벌린 아레스 앞으로 도달한 미후왕.
후웅
빠각!
“크아아아아악!!!!”
“공손하게 행동해야지, 왕의 앞에서 뻣뻣하게 서 있지 마라.”
원숭이 왕이 발차기 한 번으로 아레스의 한쪽 다리를 박살 내 버린다.
아레스는 왕을 맞이하는 신하가 된 듯 그의 앞에서 강제로 무릎을 꿇는다.
“그건 그렇고 이 몸을 향해 예의를 표해야 하지 않겠나?”
“푸합!”
콰앙!!!
“한 번.”
아레스의 머리채를 잡고 그 머리를 강제로 바닥에 내리꽂아 버리는 미후왕.
결투장에는 그 섬뜩한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두 성좌의 결투, 아니 이제는 처형을 지켜보던 성좌들도 그 압도적인 폭력에 말을 잊어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한다.
콰앙!!!
“그, 그만!”
콰앙!!!
“두 번.”
콰앙!!!
“세 번.”
“커억…”
“그만두세요, 승부는 끝났습니다.”
처형을 이어나가고 있던 손오공의 등 뒤에서 불청객의 목소리가 개입한다.
털썩.
미후왕은 자신의 머리 색깔과 같이 얼굴도 붉은색 피투성이가 된 전쟁의 신 아레스의
머리를 툭 떨구곤 뒤를 돌아본다.
“건방지게 왕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냐?”
미후왕이 으르렁거리며 그 불청객의 눈앞에 다가와 자신의 붉은 눈을 부릅뜬다.
결투를 중재하러 나온 불청객, 아테나는 그런 미후왕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간다.
“지금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던 간에 약속했던 결투는 끝이 났습니다. 제 동생은 더이상 싸울 의지도 능력도 없어 보입니다만.”
“……”
미후왕의 살벌한 요기를 단신으로 맞이하는데도 물러서지 않는 아테나.
그 태도에 미후왕은 요기를 거둔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여신의 맑게 빛나는 눈에 변덕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하하하! 형만 한 아우 없다더니 누이 역시도 마찬가지로군.”
“당신의 자비에 동생을 대신해 감사드리죠.”
“됐어. 놈이 일어났을 때 이 지랄을 겪고도 분하다고 생각하면 또 찾아오라고 전하기나 해.”
자신의 이복동생을 챙기는 아테나를 두고선 손오공은 떨떠름한 표정의 친우 제우스에게
눈빛을 보낸다.
“크흠! 결투의 승리는 투전승불 성좌에게 돌아가게 되었소!”
……
승자를 선언하는 제우스.
결투로 시작해 처형으로 끝난 잔혹한 결과에 환호하는 성좌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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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랬어야만 했나요, 오공?”
“제 성격 아시잖습니까.”
“후우…”
자신의 본성도 투쟁을 통해 극복한 부처답게 이 아이는 예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관세음보살은 꾸짖을 생각도 그만두었다.
“요기는 또 어떻게 된 겁니까? 불심을 깨우쳤을 때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니었나요?”
“보살님도 참. 애초에 요괴로 태어나 이렇게 생겨 먹은 것을 제가 어찌합니까? 심성이야 수련 가능한 것이지만 체질은 아니라고요.”
“문제없는 것 확실한 거죠?”
“보살님, 저 이래 뵈어도 투전승불 입니다.”
“…알았어요, 믿도록 하죠. 그건 그렇고 당신의 제자 이야기는 쏙 들어갔네요. 오공 설마?”
“저 그렇게 똑똑한 놈 아닙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어느 정도 의도한 것은 맞았다.
때마침 보기 좋게 아레스 놈이 시비를 걸어 주어서 수월하게 풀린 것도 있고.
손오공은 자신이 제자를 이렇게나 챙긴다는 자아도취에 취해 천계로 돌아갈 준비를 하려 한다.
“가는 건가 오공?”
그때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가 손오공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온다.
“아 제우스, 그… 자네 아들래미 얼굴을 심하게 박살 낸 건 사과할게.”
“사내놈이 자기 입으로 벌인 일이니 책임을 져야지. 본인은 신경 쓰진 않는다만
그것보다 애 엄마가 화가 잔뜩 나서 말이지… 하하! 연회는 참석하지 않을 건가?”
“올림포스 주신이면서완전 잡혀사는구만, 연회고 뭐고 내가 있어봤자 분위기만 망치겠지. 난 간다.”
“손오공!!!”
저 멀리서 자신을 찾는 미의 여신의 화난 목소리 또한 들려온다.
제자 챙기려다 오히려 자신에게 혹이 붙게 생겼다.
손오공은 급하게 떠나려고 하지만 갑자기 제우스 놈이 자신의 팔을 턱하고 잡는다.
“야!!!”
“미안하네, 그래도 일단은 고모님의 부탁 아닌가 하하.”
“이 개족보 집안이! 언제부터 네놈이 예의를 중시했다고 그래! 빨리 이거 안 놔?”
“하하하!!!”
결국은 신나게 얻어터진 자식을 위한 아비의 소심한 복수에 당하고 만 손오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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