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우리 소통해요
* * *
그 당시엔 내게는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잃었던 시기이기에 세상이 증오스럽고 날뛰는 괴물 새끼들도, 뒤늦게 나타나서
사태를 수습해보려는 성좌 모두 혐오스러웠다.
온 세상이 전쟁터로 변해서 너덜너덜해진다 해도.
오랜 시간 동안 지구를 지배했던 사피엔스의 시대가 저물어 간다 해도.
나만의 조그만 세상이 아주 박살이 나다 못해 가루가 되어서 사라졌기 때문에 그딴 것들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혐오하다 못해 증오했던 이들과 얼추 비슷한 자리에 올라온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날의 광경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예은이 넌 모를 만도 해. 밀레니엄 쇼크를 겪었던 사람들은 잘 얘기하려 하질 않으니깐.”
“…그날 무슨 일을 겪으셨는지 제게 말해주실 수 있나요?”
“뭐, 못 해 줄 건 없지.”
인간의 사고가 진화하고 지식이 쌓이기 시작할 때쯤 인간은 장기간 성좌에게 작별을 고했다.
합리적 지성은 실존했던 성좌의 존재를 점점 지워갔으며 지상에선 인간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하지만 그 진리의 지성이 결국엔 크립티드라는 벽을 만났을 때
인류는 그제야 자신들이 모시던 신을 찾았고 인간의 시대는 천천히 무너져내렸다.
그날 어린 손우진의 조그만 세상도 동시에 무너졌다.
한해의 끝 연말연시에 가족들과 외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날.
하늘에서 커다란 소음이 들려왔을 땐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불꽃놀이가 시작된 건가 생각했다.
그렇지만 도시 상공을 지나가는 전투기가 건물만 한 크기의 괴생명체에게 격추당하고 나서
한 줄기 불꽃을 피워냈을 때 시작된 건 축제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 뒤의 비극은 뻔하디 뻔한 재난 영화와 같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도망치는 인간들을 사냥하기 시작하는 괴생명체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운전하시는 아버지.
질질 짜는 자식들을 진정시키는 어머니.
오빠 손을 꼭 잡은 동생.
무력한 꼬마 아이 하나.
사고.
피.
빨강.
종말.
죽음.
끝.
정신을 차리고 나니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크립티드도, 인간도, 성좌도, 그리고 내 세상도.
성좌들의 개입으로 밀레니엄 쇼크는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서게 된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뒤 몇 날 며칠을 후회와 절망 속에서 보냈는지 모른다.
‘그냥 따라서 죽어버리게 나 좀 내버려 두라고요!!!’
좆도 모르는 어린아이 입에서 제법 살벌한 말이 나올 정도로 인류는 몰려있었는지도 모른다.
“회장님, 아니 그때는 한 씨 아저씨지. 진짜 아저씨한테 존나게 얻어터졌는데 말이야. 아저씨 말로는 본인이 살려냈으니 나는 자기 허락 없이 못 죽는다고 그랬다니깐?”
“……”
“아저씨 앞에서 꼬맹이 새끼가 못 할 말을 한 거지, 정작 당신께서도 자식을 잃으셨는데 내색 한번 안 하시더라고. 아마 한지수 때문에 그러셨을 거야.”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성좌의 보호 아래에서 지낼 수는 없기에.
살아남은 이들은 슬퍼할 시간도 없이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뒤틀린 인과율에 성좌마저 지상에 오래 머물게 된다면 또 어떤 이변이 벌어질지 몰라서 성좌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제시했다.
그것이 바로 인류와 성좌의 기브 앤 테이크 관계, 히어로의 탄생 배경이다.
“왜 사제가 되지 않았냐고 물었지… 그냥!”
“네?”
“그냥. 그냥 다 마음에 안 들었어. 누구는 죽지 못해 사는데 정작 살아남은 쪽에선 자기들끼리 아주 개판을 벌이지 않나 이게 뭔가 싶었지.”
성좌의 마지막 직접 개입이라 할 수 있는 천사들의 피의 숙청 사건.
천사들은 자신들의 신도들이 어긋난 길을 걸어가자 피로 참회하게 만든다.
그걸 보면서 어린 시절 내 머릿속엔 각인이 박혔던 것 같다.
인간의 목숨은 한없이 덧없으며 성좌들에겐 특히나 더.
불신이 생겼던 것 같다.
쉽게 잡은 손, 쉽게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피의 숙청 위에 유일교가 싹트고 교단이 고아들을 거두기 시작했을 때
한 아저씨가 자신과 같이 지내자고 제안했을 때도 나는 교단의 보육원을 선택했다.
혼자서 인생 다 산 것처럼 구는 애새끼의 객기라고 해야 하나…
그 시절의 나는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어린 시절에 그렇게 인식이 빠르게 박혀버리니깐 뭐라 말해야 할까, 믿음? 신앙? 그런 게 잘 생기지 않더라고.”
턱.
가만히 내 얘기를 경청 중이던 하예은이 내 손을 살포시 잡는다.
“왜?”
“저도 그냥요.”
“하하. 쓸데없이 이상한 거나 배우고 있어.”
아마도 이 아이의 자기 나름대로 위로하는 방식이겠지.
손에 느껴지는 온기가 따스하다.
“그래도 뭐… 나도 사람이긴 해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도 있잖아. 거기서 새로운 형 누나, 동생들도 만나고 하니깐 숨이 쉬어지더라.”
“소정이 언니도 그때 만난 거죠?”
“응. 소정이는 나중에 들어오긴 했는데, 악마와 유감이 많아서 사제의 길을 걷게 된 경우고 나는 앞서 그런 일도 있고 해서 히어로가 된 거지.”
“제천대성 성좌님과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예요?”
“…이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엔 한 회장님인데.”
참혹한 사고 현장에서 만난 사이일 뿐이지만 한 씨 아저씨는 어린 나를 지극히 신경 써주었다.
아저씨는 본인도 최고위 무신 이랑진군께 선택을 받은 이후 히어로 활동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보육원을 찾아 나를 보고 가곤 했다.
그런 정성에 마음을 열게 된 나는 아저씨에게 도움이 되고자
히어로 활동으로 아저씨가 바쁜 날에는 동갑내기인 손녀 한지수와 보육원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아저씨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런 내 호의를 아저씨는 배반했다.
‘우진이 너, 올해로 나이가 몇이지?’
‘지수랑 같은 거 아시잖아요.’
‘그래. 13살이면 이제 사내 노릇은 해야 하지 않겠냐?’
‘그럼요!’
그날 아저씨 앞에서 객기를 부리면 안 되었다.
고통의 시작이 시작되는 날.
“흐… 아무리 한국 사회가 학연, 지연, 혈연, 연줄 타령은 하지만 이렇게 사양하고 싶은 연줄은 처음이었어.”
스승과의 첫 만남의 최악이었다.
<하! 형님께="" 추천받아서="" 와="" 봤더니="" 이런="" 핏덩이를="" 소개해="" 준="" 건가="" 지금?=""/>
‘…누군 오고 싶어서 온 줄 아나.’
<이놈! 겁대가리="" 없이="" 감히="" 누구="" 앞에서="" 말을="" 흘리는="" 것이냐!=""/>
‘그쪽은 누구신데요.’
<허어… 하늘과="" 맞먹는="" 큰="" 성인,="" 제천대성인="" 이="" 몸="" 손오공을="" 모른단="" 말이냐?=""/>
‘네? 손오공이요? 그게 정말이신가요!’
<하하하! 이제야="" 아는="" 척을="" 하는군="" 그래!="" 이런="" 동방의="" 얼라="" 놈마저도="" 이="" 몸의="" 위상을="" 것인…=""/>
‘손오공 사부! 부디 저에게도 에너지파 권법과 순간이동을 가르쳐 주십시오!’
<……/>
야!!!!!
감히 그런 근본도 없는 잡스러운 놈과 원본인 이 몸을 비교해!
네 놈의 머릿속에 마구니가 가득하구나!!!
네 친히 너의 그 독소를 빼주도록 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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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아이의 동심 어린 대답에 오만가지의 욕이 오고 갔다.
어휴 시발…
내 또래 남자 새끼들한테 백 번을 물어봐라.
과연 손오공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위대하고 거룩한 제천대성을 먼저 떠올릴 놈이 몇이나 될지 말이다.
“푸흐흐!”
“예은아, 지금 이 자리에서 들으니깐 재밌고 웃기지? 나는 그날 그 자리에서 웃을 수도 없었거든.”
“아흑… 하아 죄송해요, 후후.”
웃음을 참느라 눈가에 눈물까지 생긴 예은이.
그래 웃어라.
뒤지게 혼난 것은 어린 시절의 나 혼자였으니.
그때 사건으로 꽁해 있던 스승은 나를 제자로 받아들이곤 천계로 불러와 아주 개같이 굴리기 시작했다.
스승 밑에서 수행을 하던 시절엔 과장하지 않고 항상 그리웠던 가족들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의 목숨은 굉장히 질긴 편이고 쉽게 죽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삶의 소중함을 배웠다.
힘
3년의 수행.
하산 그리고 히어로 활동 시작.
새로운 인연도 만나고 신서유기 팀과 서역행도 다녀오는 등 이런저런 사건이 참 많았다.
그러고 보면 일선에서 물러난 나를 다시 불러온 것도 예은이었지.
성좌 간의 넥타르 부당거래로 만나게 된 인연이지만 이렇게 친한 사이가 될 줄이야.
세상사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속사정을 누구한테 털어놓으니깐 뭔가 시원하긴 하네. 들어줘서 고마워 예은아.”
“아니요, 저도 오빠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어서 좋은 시간이었어요.”
“어머머? 둘이 뭐한데? 분위기 좋아 보이네.”
갑자기 뒤에서 안소정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은이도 지금까지 손을 잡고 있던 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았는지 황급하게 내 손을 뿌리친다.
약속한 듯이 멀어지는 둘의 사이.
“어우! 좀 깜빡이 좀 틀고 들어와라! 수련은?”
“진작에 끝내고 왔지. 그래서 둘이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건데?”
“뭐 하긴! 네 얘기 하다가 시간 가는 줄 몰라서 그렇게 됐다.”
“내 얘기?”
“그래. 예은이가 너랑 나는 왜 다른 길을 걷게 됐냐고 물어보길래.”
“소정 언니 죄송해요. 허락도 없이 물어봐서.”
“흐응… 예은 동생, 내가 방해한 게 아닌가 몰라. 호호!”
“아니 진짜로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아까 전 사제 관계를 뒤집으려는 듯 안소정이 능청을 떤다.
아주 여유만만이시구만.
“그래서 안소정, 무아지경의 단점은 파악했어?”
“응 누구 덕분에 말이지. 사용자는 계속해서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과 사용 후에는 무리가 간 육체에 부담이 온다.”
“제약이 큰 기술이긴 하지만 짧은 시간에 강해질 수 있는 건 이만한 게 없긴 해.”
“오빠랑 예은 동생은 이 기술 안 쓰지?”
“일정 수준에 도달한 무투파는 잘 사용하질 않지. 사용하지 않고도 육체와 정신이 하나처럼 매끄럽게 이어지니깐 말이야.”
“흐으…”
“5일 남았어, 그동안에 완벽하게 갈고 닦아서 나한테 한 방 먹여봐. 못 하면 알고 있지? 절대로 허락 안 해 줄 거야.”
“네에네에.”
소정이는 건성건성 대답하고선 먼저 수렴동 집으로 향한다.
“어휴 저걸 그냥…”
“후후,저희도 이만 가요.”
“그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