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대협곡
* * *
모든 것은 본인의 마음가짐에 달린 일이다.
추장이 내게 해준 조언의 본질이었다.
걱정하는 것은 나답지 않다.
언제부터 내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걱정을 달고 살았나.
간단하게 생각하자.
나머지 칠대성 놈들이 어떻게 나오든지 간에 모두 다 두들겨 패줘서 모두를 지키면 되는 것이다.
올드 바이슨 추장의 진심 어린 조언을 듣고 난 이후 어두컴컴한 집을 나섰지만
나 혼자 나온 것이 아니다.
내 곁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조그만 것들이 함께하고 있다.
[당신 정말로 인간 맞아?]
[신기하네]
[우리말을 듣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듣고 있으신가요?]
곁에서 쫑알쫑알 떠들어 대고 있는 이 녀석들.
푸에블로 족이 신령이라고 부르는 녀석들의 정체이다.
이곳에서 살아 온 사람들의 믿음으로 탄생한 어린 신령들은 푸에블로족 추장 말고도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챈 외부인인 내가 신기해서 계속해서 나를 따라오는 중이다.
이를 악물고 그들이 떠들어 대는 것을 무시하고는 있지만 이 꼬맹이들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집에 꼬맹이만 둘입니다. 이 녀석들까지는 벅차요.’
‘신령님들의 선택을 인간이 강제할 순 없네.’
‘댁들의 마을을 지켜줄 신령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허허. 자네에게 관심을 보이시는 신령님들이 전부가 아니니깐 괜찮아.’
교활한 들소 같으니…
올드Old 바이슨이 아니라 스니키Sneaky 바이슨이다.
노인의 능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한 능청스러움은 당해낼 수가 없었다.
[말 좀 해봐, 말 좀 해봐, 말 좀 해봐, 말 좀 해봐]
[시끄러워 실프]
[이 녀석이 말을 안 하잖아!]
[여러분 싸우면 안 돼요]
[듣고 있냐고!]
[음,왜 우리끼리 싸우는 건가?]
금각과 은각은 본인들 스스로 어른 행세를 하기라도 하지 이것들은 완전 어린아이들 그 자체다.
이제는 대답해주지 않으니깐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한 신령 무리.
마지 못해 내가 대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낸 건지 의문이 든다.
“머리 아프니깐 조용히 좀 해줘.”
[앗! 말했다!]
[뭐야 이 녀석, 역시 듣고 있었잖아]
[정말 반가워요]
[호오, 역시 듣고 있었군]
괜히 대협곡을 찾아와서 스스로 족쇄를 차게 된 이 느낌은 뭘까?
“할아버지… 아니 추장님은 만나 뵙고 오셨나요?”
그런 나를 줄리아가 마중 나왔다.
말이 헛나왔는지 추장을 할아버지라고 부른 줄리아.
역시나 들소 타이슨과 소통하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뭔가 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줄리아는 추장의 손녀였나 보다.
“역시 너희 할아버지였구나. 너도 보이지?”
“…네.”
[안녕 줄리아!]
“어서 오세요, 실프 님.”
[있지 줄리아, 이 남자가 우리 말을 계속 무시했어!]
본인이 쉬지 않고 말을 걸어 온 사실은 쏙 빼버린다.
“보기보다 장난기가 많으신 분이라서 그래요.”
[그런 거야?]
줄리아가 아까부터 까불까불 떠들어 대던 뭉실뭉실한 정령에게 눈높이를 맞춰 준다.
뭉실뭉실 솜사탕.
이글이글 화염구.
찰랑찰랑 물방울.
울퉁불퉁 돌덩이.
모양새와 실프라는 이름으로 짐작하건대 이 녀석들은 자연의 정령들이 아닌가 싶다.
바람, 불, 물, 흙.
4원소의 근간이 되는 정령들.
자연의 기운이 가득한 이곳 대협곡에 어울리는 존재들.
먼 그 옛날 원시시대부터 존재해왔던 자연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
그 안에서 탄생한 이 아이들은 내 안에 내재 된 오행과 팔괘의 기운에 이끌린 건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강해지려던 것은 아닌데 말이야.”
“왜 그래요?”
“그런 게 있어. 여기 안 쓰는 공터 좀 있으면 알려줄래?”
“따라오세요.”
“너희들도 따라와.”
새롭게 합류할 친구들의 능력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데려가는 김에 이 수다쟁이 녀석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봐야겠다.
. . . . .
“팔괘 6장…”
[냠]
팔괘 6장으로 생성한 회오리바람을 순식간에 삼켜버리는 뭉실이.
조그만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변한 실프는 회오리바람을 압축시켜 자신의 입 안에 넣어버린다.
“너 먹으라고 만든 게 아니니깐 그만 좀 삼켜줄래?”
[그렇지만 네가 만들어 낸 바람은 맛있단 말이야!]
조그만 백금발의 소녀가 항변 해온다.
푸에블로족을 지켜오던 신령님들의 수준을 알아보려고 했는데 이런 식이다.
회오리바람을 받아먹고 나서 친구들의 곁으로 돌아가는 실프.
[맛있냐?]
[응, 엄청 맛있어!]
[저도 먹어보고 싶네요…]
[음, 나도 마찬가지다]
이게 테스트 현장인지 미식회 현장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
[히히! 이 친구는 아무래도 바람에 소질이 있는 것 같으니 나만 따라갈 수밖에…]
잘난 척하는 솜사탕이 보기 싫어 다른 기운들도 소환했다.
3장, 4장, 8장.
차례대로 소환하니 허겁지겁 달려와서 낚아채 가는 정령들.
“내가 능력이 워낙 출중해서 말이지.”
[… 재미없어, 하나 더 만들어줘]
배신감에 표정이 구겨진 실프.
당연하다는 듯이 바람을 한 개 더 요구한다.
“아무럼요.”
거절하는 순간 땍땍거릴 것이 뻔하니 군말 없이 한 개 더 만들어 주었다.
[엄청 맛있잖아! 치사해 실프!]
[이렇게 맛있는 물은 처음 먹어봐요!]
[음!]
소환한 팔괘의 기운들을 먹고 난 뒤에 호들갑을 떠는 정령 무리들.
의도와는 다르게 시식 코너가 되어 버렸지만 저 정도 반응을 보여주는데 어쩔 수 있나.
오행의 기운까지 섞어준다면 기절할 것만 같기에 맛의 강도를 차근차근 올리기로 다짐했다.
[아앙! 이래서 혼자 따라가려고 했던 건데!]
“뭉실이 이름은 이미 들었고 나머지는 자기소개 좀 부탁해.”
[잠깐! 뭉실이가 설마 나를 말하는 건 아니지?]
“자, 거기 이글이글부터 찰랑찰랑이랑 울퉁불퉁까지 순서대로 시작.”
실프의 말을 가볍게 씹어버리고선 자기소개를 시켜본다.
[나는 샐러맨더]
[저는 운디네라고 불린답니다]
[음, 이 몸은 노움이라는 이명을 얻었지]
조그만 아이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소개한다.
사실 실프의 이름을 듣는 순간 모두의 이름을 알고는 있었지만 확인차 물어본 거다.
“흐음… 반가워, 나는 손우진이야.”
실프, 샐러맨더, 운디네, 노움.
15세기의 연금술사 필리푸스 파라켈수스가 정립한 4원소의 주인들.
푸에블로족은 이 친구들에게 그들의 이름을 붙여줬나 보다.
스승에게 배운 것을 토대로 생각하면 역시 이 녀석들은
푸에블로족이 숭배한다고 해서 성좌라고 부를 수는 없다.
동양권에서 흔히 사용되는 신?이라는 단어는 서양의 신God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을 특정 지어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정령 혹은 영적 존재들.
그것들을 모두 포함해서 신?이라고 한다.
이때 말하는 우주는 눈으로 관측할 수 있는 우주보다 더 포괄적이다.
하늘, 다시 말해 밀레니엄 쇼크과 함께 발생한 외우주의 개벽으로 인해
인간은 영적 존재와 접촉할 수 있었고 영적 성숙을 겪고 나서 유년기의 끝을 맞이한
소수 인류는 진화를 이루었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 존재, 그들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 성좌라고 부르는 존재들이다.
영적 존재Spirit가 보유하고 있는 성질, 특성, 형태 그 어느 것 하나도 정의되지 않은
미지의 힘 신성.
인류는 신?과의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막혀 있던 성장판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실프, 샐러맨더, 운디네, 노움은 믿음을 매개체 삼아서 지구에서 만들어진 인위적 정령들.
힘을 보유하곤 있지만 그 힘은 관측할 수 없는 미지의 힘이 아닌 자연의 부산물들이다.
그래서 대협곡에서 태어난 이 아이들을 외우주에 존재하는 성좌로 취급할 수 없는 것이다.
속된 말로 지구의 날것들이라는 소리다.
“신령님들을 데려가실 건가요?”
“본인들이 좋다면 말릴 생각은 없어. 그런데 염려되는 점이 하나 있어서 말이야.”
“저희 마을 때문이죠?”
“응. 바이슨 추장 말로는 이 녀석들 말고도 마을을 지킬 신령들이 존재한다고 하던데 사실이야?”
“저희 부족은 오래전부터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을 숭배하며 살아왔어요. 그 믿음에 대한 보답을 이 위험한 시대에 신령님들께 받는 중이고요.”
“알았어, 알았어. 그래도 확실하게 하고 싶으니까 진법을 설치해 두고 갈게.”
“진법이 뭐예요?”
“이 친구들이 없어도 작동하는 방범 시스템이지.”
이들의 조합으로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강력한 진법을 설치할 수 있겠다.
“뭉실, 이글, 찰랑, 울퉁 따라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실프가 가장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선다.
[뭐 어때, 부르는 인간 마음이겠지]
불의 정령 샐러맨더가 오히려 시큰둥하다.
조그만 소년의 머리카락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중인데 마음은 식어있는 걸까.
실프와 샐러맨더 두 녀석의 성격이 어째 바뀐 거 같기도 하고.
마을로 돌아온 뒤에 이 마을의 우두머리인 추장의 허락을 받고자 다시 한 번 추장의 집으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복도 너머로 추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새로운 친구분은 마음에 드셨는지요?”
“짹짹이 한 명 빼고는 성격들이 무난하네요.”
[야! 너 지금 나 말하는 거지!]
[멍청한 실프, 저 친구가 언제 너라고 콕 찝어서 말했어?]
[이익!]
솜사탕과 불덩이가 뒤엉켜서 싸움을 시작했다.
저러다 집에 불을 낼 것 같아서 두 손을 뻗어 결속력으로 녀석들을 끌어당긴다.
“가만히 좀 있어라.”
[이익, 이거 놔!]
[크윽! 못 빠져나가겠어!]
[하아… 싸우면 안 된다니까요]
[음, 운디네 말이 맞아]
결속력을 꼬마들 싸움 중재에 사용하는 것을 본다면 하늘에 계신 태백금성께서 경탄할 노릇이겠지만 급한 불부터 꺼야 하지 않겠는가?
그나마 운디네와 노움은 이 두 녀석보다 비교적 얌전해서 다행이다.
한 쌍을 이루는 정령들, 참으로 조화롭다.
“이 친구들을 데려간다면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그런데 마을에 방범 장치를 설치하고 싶습니다.”
“방범 장치라… 자네만의 비법을 토대로 설치하는 겐가?”
“그런 셈이죠.”
“허허, 최강의 챔피언이라 불리는 자의 제안을 어찌 거절하겠나, 부탁하네.”
“자세한 사항은 줄리아를 통해서 전해드리겠습니다.”
바이슨 추장의 허락이 손쉽게 떨어졌다.
추장의 집 밖으로 나온 뒤에 줄리아에게 필요한 것을 요청해본다.
“마을의 전체 지도를 구할 수 있을까?”
“지도요? 아뇨… 딱히 마을 지도를 그려놓진 않았어요.”
“흠, 그렇다면 하늘 위에서 직접 보고 와야겠네.”
“대체 어떤 걸 만드시려고 그러는데 지도가 필요해요?”
“궁금하면 따라와도 되고.”
우리 앞에 대령 되는 구름.
그 위에 폴짝 뛰어서 탑승한다.
[오오! 이 인간 구름 위에 탔어!]
[나도 태워줘!]
[저도 부탁해도 될까요?]
[음, 본인도 부탁하네]
“전 사양할게요. 집으로 오는 경험으로 충분해요.”
근두운 술법에 크게 데였던 줄리아가 거절의 뜻을 밝혀온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