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과산 스트리머-68화 (68/106)

〈 68화 〉 외전 오만한 자의 시련

* * *

황폐해진 거리를 걷는 두 사람.

유행을 휩쓸고 간 영화 속 등장인물처럼 꼬마 아이와 피로에 찌든 남성은

서로의 두 손을 꼭 붙들고 길을 걷는다.

남성은 한 손에는 아이의 손을, 반대편 손에는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망치를 들고 있다.

“힘들진 않니 클로에?”

“아직까진 괜찮아요.”

“조금만 힘내자꾸나, 마트가 코앞이니 뭐라도 남아있는 게 있을 거야.”

자신의 추악함을 일깨워줬던 아이와 동행하는 잭 에반스.

아이만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하늘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손우진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치고 난리를 피워봐도 정말로 떠나기라도 한 듯 그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부러 좀비에게 물려 손우진을 불러오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그때 동안 클로에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고 그놈이 확실하게 온다는 보장도 없다.

결국 잭 에반스는 현재 자기 힘으로만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선

혼자서 행동하던 때와 달리 조심스럽게 이동하는 중이다.

“잭은 지금 뭐가 제일 먹고 싶어요?”

“채소만 들어간 샐러드에 맥주 한 캔.”

“밖으로 나가면 샐러드보다 맛있는 게 많은데도요?”

“고기는 당분간 먹고 싶지 않아. 보기만 해도 질리는 느낌이야.”

“저는 인앤아… 그 햄버거 가게는 남아있지 않겠네요.”

“이곳에서 탈출만 한다면 내가 새로운 지점 채로 세워주마.”

서부의 유명 햄버거 프렌차이즈를 언급했다가 현실과 마주한 아이.

서부 이외에는 지점을 내지 않는 가게여서

서부가 멸망한 지금으로서는 다시는 맛볼 수 없는 햄버거가 되어버렸다.

잭 에반스는 아이가 실망하지 않도록 약속을 한다.

빌어먹을 지옥에서 탈출만 살 수 있다면 이 아이의 어떤 소원이든지 들어줄 자신이 있다.

“잭은 부자예요?”

“미련할 정도로 벌어서 남아도는 것이 돈이지.”

그래봤자 미련하게 벌었던 돈은 지금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저 아이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남발하는 공수표 정도로만 사용될 뿐.

“또 갖고 싶은 건 없니?”

“음… 딱히 없어요. 아, 히어로를 만나면 하고 싶던 일은 있어요.”

“하고 싶은 일은 뭐니?”

“하늘을 날아보는 거요, 부탁을 들어주는 히어로가 한 명도 없었거든요.”

“…지금은 이 친구가 말을 듣지 않아서 무리지만 힘을 되찾는다면 꼭 날게 해주마.”

잭 에반스는 괜한 자괴감에 애꿎은 요술 망치의 탓으로 돌려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오기 전의 잭 에반스는 아이의 부탁을 과연 들어주었을까?

그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자괴감이 몰려오는 것이다.

자국을 등지고 미국행에 올랐을 때부터였을까.

더 좋은 환경과 인류를 위해서라는 핑계 하에 눈을 감고 외면하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협회의 억류를 뿌리치고 빠르게 서부에 개입했더라면 이 좆같은 상황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잭, 잭!”

“… 보고 있단다, 망자들 투성이로군.”

사색에 잠긴 잭 에반스를 부르는 클로에의 목소리.

어느덧 도착한 마트 앞은 이미 서성거리는 망자들로 가득 차 있다.

눈대중으로 보아하니 족히 서른 명은 되어 보인다.

자포자기 상태로 죽은 이들의 골을 부수고 다닐 때는 몰랐지만 혼자서 행동할 때보다 신경 써야 할 것이 많다.

아이가 먹을 음식과 식수는 꼭 확보해야 하기에 이곳 식료품 마트는 포기할 수 없는 곳이다.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면 안 돼요? 수가 너무 많아요.”

“그렇지만 남아있는 식량 상황이 좋지 않아. 오늘 구하지 못하면 슬슬 위험해.”

잭 에반스는 자신이 히어로였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망치를 세게 쥐어본다.

“클로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

“또 저 혼자서 안전한 곳에 숨어 있기요.”

“잘 알고 있군. 그럼 다녀오마, 위험하면 꼭 소리 질러서 알려주고.”

“알았어요… 조심하세요.”

아이의 걱정을 뒤로 한 채로 망자들에게 다가가는 잭 에반스.

한 달 가까이 힘을 빼앗긴 상태에 익숙해 진 그에게 이 정도 숫자의 망자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망치를 매개체 삼아 미약한 전기도 뿜어낼 수 있는 경지까지 도달했다.

드르륵­ 드르륵­

망치에 달린 끈을 잡고 길게 늘어뜨려 땅에 끄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에 이목이 끌린 망자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적개심을 뿜으며 달려든다.

“크아아악!!!”

“편히 쉬시오.”

이제 용서는 바라지 않는다.

자격조차 없는 그에겐 망자가 되어 버린 이들을 위해서 평온한 안식을 주기 위해 노력할 뿐.

죽은 상태로 이승을 헤매고 다니는 이들의 굴레를 끊는다.

퍼억!

망치와 부딪히자 수박처럼 터져 나가는 죽은 이의 머리통.

살아있는 생명에 반응하는 이들이기에 겁내지 않고 계속해서 몰려든다.

간격을 유지한 채 계속해서 망치를 휘두르는 잭 에반스.

휘두르는 손짓 한번에 망자들의 머리가 계속해서 터져 나간다.

그의 요술 망치에는 묻어 있는 피딱지가 마르기도 전에 새로운 혈흔이 물든다.

“허억 허억…”

그나마 천둥의 신을 섬긴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신의 망치는 망자를 상대로 전혀 망가지지 않으니 말이다.

“클로에! 다 끝났으니 어서 이리 오렴.”

잭 에반스는 숨어 있는 아이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의 부름에 총총 뛰어와서 붉은 피로 물든 거리를 살펴보는 아이.

“언제 봐도 엄청나네요. 아저씨가 그레이트 원 중에서 제일 강한 거 맞죠?”

“그건 모르겠구나. 잠깐, 지금 손잡으면 안 돼. 피가 묻잖니.”

“뭐 어때요. 저도 씻지를 못해서 더러운걸요.”

아랑곳하지 않고 잭 에반스의 손을 잡는 아이.

피해 보려고 했지만 완고한 아이의 태도에 잭 에반스는 포기하고 손을 내어준다.

쓰러진 시체들을 피해서 식료품 마트로 걸음을 옮긴다.

마트가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걸음이 느려진다.

그곳에는 먼저 온 손님들이 그들을 맞이하는 듯 빼곡하게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밖에서 벌어진 소란이 궁금해서 몰려온 건지 마트의 출입구에는 셀 수도 없는 망자들이

그들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다.

마트의 손님들이 가득 찰 때쯤 투명한 유리창과 유리문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좆됐다.

아무래도 좆됐다.

잭 에반스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 하나의 문구.

“…아저씨!”

“씨발!!!”

잭 에반스는 아이를 덥썩 품에 안고 그대로 뒤를 돌아 달리기 시작한다.

너무도 안일하게 생각했다.

홀로 살아남은 아이의 직감을 믿었어야 했는데.

부족한 식량 상황에 눈이 멀어서 마트의 위험성을 생각하지 못한 자신을 탓해봐도 이미 늦었다.

쨍그랑!

뒤에선 인파를 버티지 못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그들을 쫓는 망자들의 추격이 이어진다.

크에에에엑!!!

케에에에!!!!

오랜만에 등장한 신선한 고깃덩어리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빠르게 추격하는 망자 무리.

마트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의 힘을 낭비한 잭 에반스.

이대로 가다간 사이좋게 죽는 것은 예정된 결과다.

“클로에!!! 내가 놈들을 유인할 테니 혼자서라도 도망치거라!”

“싫어요! 아무리 아저씨라도 죽을 거예요!”

“말 좀 들어 제발!”

“혼자 남겨지는 건 이제 싫어요!”

아이의 직감은 잭 에반스의 각오를 눈치챘나 보다.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을 살리려는 그의 태도에 클로에는 완강히 거부한다.

이런 실랑이를 해결해 주고 싶었던 걸까?

그들의 앞으로 마트의 손님들과는 다른 새로운 무리들이 뛰어오는 것이 보인다.

앞뒤로 가두어진 절망적인 상황에 잭 에반스의 입에는 실소가 절로 나온다.

더는 도망칠 곳도 없다.

골목으로 도망친다 해도 이 정도 수 앞에선 죽음을 조금이나마 지연시키는 것뿐이다.

막힌 길목이라도 나온다면 죽음은 예정된 일이다.

“하… 벌을 받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누구에게 건네는 건지도 모르는 자조 섞인 말에 클로에가 그의 옷깃을 꾹 붙잡는다.

이 어린아이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의지할 곳은 생판 남이었던 자신뿐이다.

그 모습에 잭 에반스는

“미안하구나 클로에.”

파직!

잭 에반스가 아이의 목에 손가락을 갖다 대어 미약한 푸른 빛을 내뿜는다.

힘을 잃어버려서 다행인 점은 이것 하나뿐인 것 같다.

잭 에반스는 생각했다.

약해진 출력 탓에 힘 조절할 필요 없이 아이를 기절시킬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잭 에반스는 기절한 아이를 안고 골목길로 들어선다.

들어선 좁은 골목길은 온갖 잡동사니로 길이 막혀있다.

“후우…”

챔피언이 개입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은 버린 지 오래다.

개자식… 구경하고 있다면 죄 없는 아이만이라도 데려가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잭 에반스는 아이를 땅에 내려놓은 뒤 망치로 땅바닥에 줄을 찍찍 긋는다.

절대로 이 줄 뒤로 망자들을 보내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

“나는 천둥의 신 토르가 점지한 자요.”

크아아아악!!!!

끼에에에에엑!!!

“위대한 자의 이름을 더럽힌 아둔한 자 일지니.”

어느덧 그들의 코앞까지 다가온 망자 무리.

그 광경을 보고서 잭 에반스는 마지막 고해성사를 끝마친다.

“천둥을 이어받은 자가 마지막으로 고한다, 너희는 지나갈 수 없다.”

곧이어 잭 에반스와 죽은 이들로 이루어진 검은 파도가 충돌한다.

. . . . .

<이놈이 첫번째인가?=""/>

“뭐 꼴에 리더라고 첫번째로 통과 했네요.”

<크하하하! 역시="" 내가="" 고른="" 화신체야!=""/>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정신을 되찾는 잭 에반스.

망자들을 상대로 계속해서 망치를 휘두르다가 정신을 잃어버렸는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꿈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다.

<일어났군 그래=""/>

“…위대한 천둥의 신 토르를 뵙습니다.”

<몇 번은="" 더="" 신청해도="" 되겠어,="" 버르장머리="" 없던="" 놈이="" 이리도="" 공손해질="" 줄이야=""/>

인사와 동시에 생각이 든 한 존재.

자신이 지키려 했던 아이의 안위를 급하게나마 물어본다.

“토르시여! 클로에, 클로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어지간히 정들었나 보군.”

“손우진! 아이는 무사한 건가! 제발 그렇다고 말해!”

“정신 차려 에반스, 시련은 너의 헌신으로 이미 끝났어.”

“시련이라고? 아니, 그렇다고 해서 있는 아이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 아이는 너의 시련을 위해서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야. 아이가 홀로 살아남았다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잖아?”

“허… 그런 말도 안 되는…”

클로에의 실체를 듣자 허탈감에 빠진 잭 에반스.

그런 그에게 천둥의 신이 질문을 건넨다.

<나의 화신="" 잭="" 에반스여,="" 이번="" 경험으로="" 깨달은="" 점이="" 있느냐?=""/>

“… 어린 생명 하나 구할 수 없는 제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었는지 깨달았습니다.”

<하하하! 그거면="" 됐다,="" 토르라는="" 이름은="" 언제나="" 가장="" 낮은="" 자들의="" 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거다=""/>

하늘에서 푸른 벼락이 내려와 잭 에반스를 내려친다.

벼락을 맞은 잭 에반스는 자신의 몸에 익숙한 기운이 맴도는 걸 감지한다.

그가 신세를 졌던 망치는 푸른 전격을 뿜어대며 그를 보챈다.

토르께서 회수해갔던 힘이 돌아왔다.

<어서 너에게="" 남겨진="" 일을="" 끝마치러="" 가거라=""/>

“알겠습니다 토르시여…”

“어이 보모, 맡긴 아이는 데리고 가야지.”

그렇게 바라던 힘이 돌아왔음에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는 잭 에반스.

손우진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자 그가 타고 있는 구름 뒤에서 클로에가 고개를 빼곰 내민다.

“잭 아저씨 혼자 가려고요?”

“손우진 당신이 클로에는 허상이라고 하지 않았나?”

“네 멍청한 표정을 보고 싶어서 거짓말 좀 해봤어.”

“하아…”

아이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안도감과 동시에 허탈함이 밀려온다.

다시는 저 고약한 원숭이의 심기를 거슬러 손아귀에서 놀아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잭 에반스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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