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뒤를 잇는 자
* * *
긴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미국.
뉴욕 JFK 공항에 착륙한 뒤 비행기 문을 열고 나오자 몇몇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우선 사건의 책임자인 터너 국장과 미국 히어로 협회의 제임스 블랙 회장.
그 뒤로는 고위 관료로 보이는 양복쟁이들과 경호원들이 줄줄이 나열해있다.
공항에선 경호원들이 통제하는 줄 너머로 현지인들까지 뭔 일인가 싶어 구경에 나선 상황.
“하 참나…”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런 대접은 너무 노골적인 의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자리를 만들어 강제로 감투를 씌우려는 속셈이 뻔히 보인다.
터너 국장, 장난합니까?
저 앞의 중앙정보국의 터너 국장이 속으로 내 전음을 전달받자 흠칫한다.
반응을 봐선 인파가 곳에서 입을 쉽게 열지 못 할 줄 알았나 본데.
속으로 대답하세요, 의사는 전달되니깐.
정말 죄송합니다 챔피언. 높으신 분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저로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중앙정보국장에게 지시를 내릴 사람이라, 답은 한 명뿐.
하얀 집에 거주하고 계신 높으신 분의 개입이 있었나 보다.
이제 내게 배려를 바라지 마. 내 방식대로 나갈 테니깐.
그렇게 명쾌한 답변을 원하면 해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터너 국장과 일방향 소통을 끊어버린 뒤 일행을 챙기기로 한다.
이 정도로 인파가 몰릴 줄 몰랐던 아이들은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다.
“형님, 원래 이럴 예정이었소? 무슨 국빈 방문도 아니고 이게 무슨…”
“대혁이는 쌍둥이 챙기고 예은이 유정이 엘레나는 꼭 붙어있어. 내가 대표해서 말할 테니깐 그냥 자연스럽게 행동해도 돼.”
고개를 끄덕이는 일행.
계단에서 내려와 가장 앞에 있는 터너 국장과 먼저 악수를 한다.
“터너 국장! 다시 만나서 정말로 반갑군요!”
“크윽… 미국을 방문하신 걸 환영합니다. 챔피언…”
“이 정도 환영 인파를 모으시고, 터너 국장의 정성에 정말로 감동했습니다.”
압박이 느껴질 만큼 터너 국장의 손아귀를 꽉 움켜쥔다.
새빨갛게 물들어 가는 그의 손.
이건 시작일 뿐이다.
“챔피언 손! 미국 방문을 환영합니다!”
웃는 얼굴로 나를 반기는 제임스 블랙 회장.
“하하, 일개 히어로의 방문에 미국 협회장님께서 나오실 필요는 없었는데 이렇게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미국은 언제나 강력한 히어로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그러겠지.
이 나라 최고의 팀이라 불리는 그레이트 원도 자본의 힘으로 만들어진 팀이니 말이야.
미국이 각국의 우수한 히어로를 돈으로 빼내 온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들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똑같은 취급을 받는 것은 사양이다.
“미스터 한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아쉽군요.”
“이번 방문은 저희 협회장 님과 관련이 적어 기회가 없었네요. 뭐 언젠가 시간이 나겠죠.”
블랙 회장에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떠들어댄다.
뒤를 돌아보니 일행들은 가식을 떠는 나를 보고선 이게 미쳤나 싶은 표정을 짓고 있다.
망나니 놈이 왜 가면을 쓰고 얌전히 행동하나 궁금한 것이겠지.
히죽
내 입가에 걸린 미소의 의미를 알아챈 대혁이와 유정이 그리고 예은이와 엘레나가 빠르게
고개를 젓는다.
이미 늦었어 애들아.
도착한 뒤 이 풍경을 봤을 때부터 상당히 꼴 받은 상태였거든.
곧 폭발할 화약을 꾸욱 꾸욱 눌러 담는 중이다.
이제 심지에 불만 붙이면 된다.
관심 없는 양복쟁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눈 뒤에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공항에 들어선다.
거기서 우리를 반겨주는 건 싱싱한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던 기자단이다.
우리나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녀석들로 꽉꽉 채워서 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도 지르는 맛이 있지 않겠는가.
“챔피언, 혹시 기자들을 위해서 질의응답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까 전부터 불안에 떠는 터너 국장을 대신해서 나와 대화하는 제임스 블랙 회장.
터너 국장은 나에 대해 너무도 자세하게 알고 있어서 불안에 떠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란 인간은 이런 뒷통수에 가만히 있을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깐.
“그럼요. 저에게 궁금한 점이 많을 텐데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활짝 웃는 제임스 블랙 회장.
속으론 답답한 터너 국장이 이 퍼킹 아시안에게 왜 이렇게 쩔쩔맸나 생각하고 있겠지.
일이 술술 풀릴 땐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손수 알려줘야겠다.
경호원의 저지가 사라지자 슬금슬금 다가오는 기자들.
자, 빨리 내가 원하는 질문을 던져주길 바란다.
“투데이 USA의 윌리엄 토마스입니다. 우선 챔피언의 미국 방문을 환영합니다, 혹시 어떤 연유에서 방미를 결정하신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재미없는 질문에 흥이 팍 식는다.
많은 기자 중에 이런 정상인을 선발하다니. 운이 좋군.
“환영 감사합니다. 제가 미국을 방문한 이유는 개인적인 비즈니스 이유입니다. 마침 장소 협찬이 들어와서 이렇게 방문하게…”
“챔피언은 고통받는 미국 서부인들에게는 관심도 없습니까? 현재 챔피언이 방문한 이유가 절망스러운 서부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비즈니스라뇨!”
이거 놔!!! 우리에겐 알 권리가 있어!!!
내가 말하던 도중에 끼어들어 말을 끊어버리는 남성.
웅성거리는 소란과 함께 경호원들의 제지를 받으면서 난리를 치고 있다.
내가 그렇게나 찾아다녔던 이다.
젠장, 믿고 있었다고!
“괜찮아요. 그를 놔주세요.”
나는 그를 끌고 가려는 경호원을 역으로 제지한다.
이렇게 귀한 기회를 제공해 준 이를 저렇게 함부로 대할 순 없지.
“귀하는 어디 소속이시죠?”
“큼큼! 로스엔젤레스 저널의 헨리 카터입니다.”
“아이고, 서부에서 오셨군요. 심정을 이해합니다.”
“이해보다는 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좋아, 싸가지도 합격.
내가 찾고 있었던 인재상이다.
“켈리포니아 주가 힘든 시간을 겪고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서로 돕고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를 바란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놈 좆됐군…”
하 새끼, 성질하고는.
뒤에서 대혁이 놈의 나직한 한 마디가 들려온다.
함께 지낸 시간이 길어 이 부분이 열 받을 포인트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헨리 카터씨는 어떤 대답을 원하시는 겁니까?”
“지금 일부로 그러는 겁니까! 챔피언 당신이 서부의 상황을 도울 수 있냐 없냐 그 한마디가 힘들어서…”
“서부의 사태를 해결할 수 있냐고? 아 물론, 내 힘으로 혼자서 해결할 순 있지.”
내 입가에서 사라진 가식의 미소와 벗어던진 존대.
수많은 인파가 몰린 공항에는 정적이 흐른다.
최고의 타이밍이다, 최적의 타이밍이야.
“그런데 의문이 들어. 과연 내 방식대로 해결한다고 하면 너희 미국인들이 동의할지 말이야.”
“그게 무슨…”
톡톡.
발을 두 번 굴러서 여의를 불러온다.
콰앙!
“꺄아아악!!!”
“테러야!!”
공항 천장을 뚫고 등장한 여의.
화려한 등장에 공항에 있던 사람들은 혼비백산이 된다.
이 녀석도 주인을 닮아서 그런지 관심종자의 끼가 철철 넘친다.
“잠시 소란이 있었어요. 자 다들 아가리를 합시다, 합.”
미세한 신성이 담긴 외침에 위압감을 느낀 사람들이 입을 다문다.
“지금 이 상태의 여의는 무게가 8톤. 그리고 점점 크기를 키울 수 있지.”
여의가 내 손에서 점점 길쭉하게 늘어난다.
어느새 뚫린 천장까지 늘어난 여의. 몸집도 점점 거대해지고 있다.
“10톤, 20톤, 50톤, 100톤, 1000톤. 아까 어떻게 해결할 거냐고 했지? 그건 쉬워. 최대한 여의를 크게 불려서 서부 전역에 굴려버릴 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살아 있을 생존자도 같이 죽이자는 거요!”
“치료제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들을 죽여선 안 돼요!”
내 제안에 벌떼같이 반발하는 사람들.
하지만 대꾸를 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고 있으니 그들도 덩달아 조용해진다.
이제 깨달은 거겠지, 저 미치광이 동양인 히어로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는 것을.
“너무 안일하잖아, 치료제라고 했나? 크립티드가 되어버린 이상 그딴 건 없어. 여긴 좀비 영화가 아니라고.”
희망이 꺾인다.
“그 지옥 같은 구덩이 속에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았고 지금도 몇 명이 죽어가고 있을까?”
희망이 꺼진다.
“그만 현실 좀 받아들여. 답은 이미 나왔었잖아, 서부를 깨끗이 밀어버린다. 내가 대신해주면 그나마 친환경적이긴 하겠네.”
희망의 끝.
미사일의 후폭풍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커다란 룰러로 땅을 고르는 것뿐이다.
“우리를 농락하려고 방문한 것이오! 챔피언 손!”
그런데도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나 보다.
이제야 목소리를 내는 블랙 협회장.
늦어도 너무 늦지 않았나, 서부 사태를 방관한 것처럼.
“농락이라뇨, 사실 적시가 언제부터 농락의 영역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네요.”
“당신이 제시한 방법이 대체 농락이 아니면 뭔가! 빨리 협력한다고 말해!”
“하하! 이젠 숨기지도 않네요. 처음부터 솔직하게 나왔으면 얼마나 좋아."
“이런 미친 놈이!”
“그깟 하찮은 알력다툼을 포기 못 해서 국민을 버린 것들이 말이 참 많아.”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숨어 있던 녀석들까지 우리를 둘러싸 위협을 보내온다.
“나는 투전승불戰??의 뒤를 잇는 자.”
내 머리 위에 씌워지는 긴고아.
녀석은 황금색으로 밝게 빛나기 시작한다.
싸움의 부처 투전승불.
‘불심?心’을 단련하여 끝내 ‘원심?心(원숭이의 마음)’을 싸워 이겼다고 전해진다.
그는 내면의 번뇌를 외면한 이들에겐 손을 뻗지 않는다.
제자는 스승의 거울, 이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을 선포한다.
“자신과 싸우는 이에겐 마음의 평안을, 도망친 겁쟁이들에겐 징벌을.”
불타는 붉은 눈과 눈을 마주친 이들.
“말해라. 너희는 어느 쪽이지?”
겁쟁이들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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