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천계??
* * *
태상노군께 양해를 구한 뒤 스승님을 만나러 간다.
그래도 제자 된 도리로서 천계에 왔는데 인사는 드리고 와야지 않겠는가.
스승을 만나러 가는 길.
나 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금각과 은각 두 명이 모두 따라나선다.
“너희 말이야, 우리 스승님 싫어하지 않았어?”
“맞아.”
“엄청 싫어!”
미간을 찌푸리는 아이들.
첫 만남에 스승을 언급한 일로 나를 공격한 것을 보면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런 녀석들이 대체 왜 스승을 만나러 가는 나를 따라오는 걸까.
“근데 뭐하러 따라와?”
“그 원숭이 자식한테 자랑해야지!”
“네 놈 제자는 우리 사제가 되었다고 말이야!”
“빙과 얻어먹고 또 사제 타령이냐.”
배속으로 들어간 아이스크림은 그새 까먹은 건지
나를 사제라고 부르는 쌍둥이.
너희 같은 사저들을 둔 적은 없다.
옆에서 종알종알 떠드는 쌍둥이를 데리고 길을 걸으니
천계 주민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인간 한 명이 천신의 시종 둘을 데리고 걷고 있으니 볼 수밖에 없겠지.
“듣고 있어?”
“아니.”
“못된 손우진!”
“벌을 받아야 해!”
홀로 잡생각에 빠져 있었다 보니 쌍둥이가 얘기하는 걸 놓쳤다.
괴롭히는 척하며 은근슬쩍 어부바를 요구하는 은각.
동생을 업어주니 언니 쪽도 샘이 났나 보다.
목마를 탄 은각.
품에 안긴 금각.
내가 환자로 온 건지 보모 노릇을 하러 온 건지 참.
“사저라고 주장하기 이전에 사저 노릇 좀 하면 안 돼?”
“흥, 윗사람을 알아서 섬기는 것이 사제가 할 일이야.”
“이랴!”
태상노군께 가르침을 받기도 전에 고생길이 열린 게 뻔히 보이는군.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스승의 영역.
저 하계에 있는 우리 집 화과산을 크게 늘려 놓은 것만 같은 비주얼.
천계에 있는 제천대성의 보금자리다.
어린 시절 이후 다시 방문하니 감회가 새롭다.
스승님의 집을 방문한 이후 계속 징징거렸더니 내 성화에 못이긴 스승이
서울에 장만해 준 것이 화과산의 탄생 배경이다.
지금은 인간에 원숭이에 동물들에
심지어는 엘프까지 살고 있는 괴상한 곳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이리 와라!”
뜻은 알고 따라 하는 건지 내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금각과 그마저도 틀린 은각.
입구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 곧이어 문이 열린다,
끼이익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리 오라고… 엥?”
“하이.”
“도련님!”
. . . . .
본래의 화과산 원숭이들은 깨달음을 얻고 천계로 올라왔기 때문에
스승의 거처에서 지내며 왕의 시종을 자처하고 있다.
시종장은 용케도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원숭이 아저씨.
“오랜만에 만난 건데 어떻게 알아보셨네요?”
“왕께서 도련님을 자주 관찰하시기에 알 수밖에요 하하!”
성좌들의 관음병이란 참.
인간들을 보는 것을 좀 그만두면 안 되나.
“스승님은 안에 계시죠?”
“예, 폐하께서는 거처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너희는 어떻게 할 거야?”
“당연히 같이 가야지.”
“여기 온 이유가 있는걸.”
두 아이를 데리고 시종 아저씨의 안내에 따라 왕의 궁궐로 향한다.
궁궐에 가까워지자 온몸이 저릿저릿하다.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티를 아주 대놓고 내시는 중이다.
“진짜 짜증 나!”
“원숭이 놈 잘난 척은!”
스승의 기운을 감지한 쌍둥이는 화를 버럭 낸다.
내 동행이 누구인지 진작 알았기에 이런 장난을 치시는 걸지도.
역시 취향 한번 참 고약하시다.
궁궐의 문이 열리고 왕을 알현한다.
저 높은 상전의 자리에서 붉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왕.
최강의 생명체.
돌을 가르고 태어나 체술, 도술, 오행을 모두 익힌 화과산 최고의 아웃풋.
나의 스승, 손오공이다.
“헬로 마스터.”
“흥!”
스승님이 손가락을 튕기자 퍽! 소리와 함께 나는 뒤로 나자빠진다.
“아휴! 오랜만에 만났건만 손부터 나가십니까!”
“오랜만에 찾아온 제자 놈이 적당히 건방져야 말이지.”
“서역의 인사말도 모르시다니.”
“한 번 더 때려주리?”
“아니요.”
나는 자세를 고치고선 스승께 다시 인사를 한다.
“불초 제자가 스승님을 뵙습니다.”
“오냐.”
이거 완전 엎드려 절받기 아닌가.
그렇지만 또 한 번 맞기는 싫기에 입 밖으로 꺼내진 않는다.
“그래서 네 옆의 떨거지들은 왜 데리고 왔느냐?”
“이 원숭이 놈이 누구 보고 떨거지래!”
“야! 다시 붙어!”
스승의 폭언에 흥분한 쌍둥이가 발작한다.
자신이 이겼던 상대에겐 관심이 없는지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하는 스승.
“하암… 패배자한테는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참아, 참아.”
하품을 찍찍하며 쌍둥이를 도발하는 스승.
뛰쳐나가려는 쌍둥이를 품에 붙잡고 어르고 달랜다.
아마 나 말고 스승이 인방을 했다면 시청자들은 열이 뻗쳐 모두 고혈압에 걸렸을 것이다.
원조의 빈정거림은 역시 달라도 뭔가 다르다.
“치료법은 찾았고?”
“예, 태상노군께서 기아스의 제약을 우회할 수 있는 법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뭔데?”
“팔괘로에 들어가자고 하시더라구요.”
“이런 미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스승님.
내 반응과 똑같다.
그래,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그 노친네가 노망이 난 게 분명하구나!”
“주인님은 멀쩡하시거든?”
“흥, 겁쟁이 원숭이 같으니.”
“오행의 이치를 모르는 놈이 들어가면 노릇하게 구워지는 게 팔괘로다 이 멍청한 것들아!”
트라우마가 도진 건지 버럭 화를 내신다.
스승님은 팔괘로에 갇혀 태워질 뻔했지만, 오행의 이치를 통달했기에
바람이 부는 쪽을 찾아가 열기를 피할 수 있었다.
허나 그 과정에서 매캐한 연기는 피하지 못했기에
그때 충혈된 눈은 스승의 시그니처 화안금정이 되어버렸다.
자신이 겪었던 일 때문에 이렇게 반응하시는 거겠지만…
“그 스승님… 그게 말이죠.”
“헤! 우진이는 우리 주인님한테 배우기로 했지롱!”
“샘나지? 제자를 뺏겼대요!”
이제야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는지 금각 은각 자매는 스승을 마구 놀린다.
설마 어린애도 가차 없이 때리실 건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스승을 바라본다.
그런 자매를 여전히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는 스승님.
“왜?”
“아니, 화내실 줄 알았거든요.”
“하! 이런 것에 화낼 거였으면 번견 놈에게도 보내지 않았을 거다.”
“뭐야, 재미없게…”
“재미없어! 괜히 따라왔네.”
굉장히 관대하게 넘어가신다.
하긴 제자를 끼고 살았으면 기아스를 배우라고 하지도 않았겠지.
스승의 포용력을 내가 너무 저평가했다.
“대신 부탁이 있다 우진아.”
“어떤 부탁이요?”
“그… 어려운 건 아니고, 좀 곤란한 일이라서 말이야.”
“천하의 제천대성에게 어려운 일이 뭐가 있습니까.”
“아무튼! 노인네에게 배우는 걸 허락할 테니 심부름 하나만 하고 오너라.”
대체 어떤 일을 시키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시는 걸까.
수락하기도 전에 불길한 예감이 든다.
“서왕모에게 좀 다녀와다오.”
“아이 진짜! 별 탈 없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서왕모에게 다녀오라는 소리는 그때 받은 복숭아를 훔친 것이 들켰다는 소리다.
“내 손을 떠나 하계로 내려줬다고 하는데도 믿지를 않는데 어떻게 하느냐!”
“그러면 애초에 훔치지를 마셨어야죠!”
“이것이 잘만 얻어먹고 뭐가 어째?”
이 패턴, 분명히 긴고아를 작동하려는 모양새다.
원격이면 몰라도 직접 만난 이 상황에선 절대로 당해주지 않을 것이다!
“끄하아악!!!”
스승님께 손을 뻗어봤지만 이 날렵한 원숭이는 벌써 눈치를 채
나를 자빠뜨리고선 깔고 앉아 뭉개버린다.
체구도 작은 주제에 무슨 산이 내 위에 올려져 있는 것 같다.
“흥! 스승을 이겨 먹으려 하다니, 백 년은 이르다.”
“항복! 항복할게요!”
“다녀올 거지?”
“크윽…”
“대답.”
“알겠습니다…”
내 소심한 반란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하계에 내려가기 전까지만 오해를 풀어달라고 하니 기한은 충분하다.
문제는 서왕모께서 복숭아를 먹은 나에게 화를 낼지가 걱정이지만.
“가냐?”
“가야죠, 팔괘로에서 살아남으려면 열심히 수련해야죠.”
얼굴도 비추고 심부름도 받았겠다 이제는 가야 할 시간.
“잠시만 기다리거라.”
짝짝
왕의 박수 소리에 시종들이 무언가를 들고 온다.
“이건 뭡니까?”
“제자라는 놈이 하도 맞고 다니길래 준비했다. 내 예전 장비들이지”
자세히 살펴보니 스승이 입었던 갑옷들 아닌가.
“제가 입을 수 있을까요? 체급이 다를 텐데요.”
“주인의 체형에 따라 조절되는 유물이니 걱정 안 해도 된다.”
“감사히 입겠습니다.”
“그 변절자 놈들한테 맞고 다니지 말고, 알겠냐?”
“알겠어요.”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제자 놈이 칠대성과 싸워야 하니 걱정이 되었나 보다.
이렇게 자신의 유물까지 내어 줄 정도로 걱정되셨나.
은근히 정이 많으시다니깐.
“진짜 갑니다!”
“오냐. 뒤져서 올라오면 시종으로 부려 먹을 테니 열심히 살거라.”
“덕담 참 감사하네요.”
“메롱!”
“붸에!”
스승님께 인사를 한 뒤 궁을 빠져나온다.
금각 은각 자매는 혀를 낼름 내미는 것으로 인사를 마쳤다.
. . . . .
“우진아, 서왕모께 먼저 갈 거야?”
스승과 나눈 대화를 다 듣고 있던 건지 서왕모에 대해 물어보는 금각.
관심 없는 척하면서 다 듣고 있었구나 너희.
“아니, 하계로 내려가기 전에 갈려고.”
“서왕모 님의 복숭아 먹어 봤어?”
“응. 엄청 맛있더라.”
“부럽다…”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 귀한 반도원의 복숭아를 낼름 훔치는 우리 성좌가 간땡이가 부은 것이지.
“집에 몇 개 정도 남았을 텐데, 줄까?”
“진짜? 진짜로 줄 거지?”
“우진 사제!”
“대신 너희도 복숭아를 먹으면 공범이니 같이 사과하러 가야 할 텐데, 괜찮겠어?”
“그건 좀…”
“난 그래도 먹을래!”
자신의 언니보다 더 과감한 은각.
여신의 복숭아를 먹는 일인데 이 정도 기개는 있어야지.
“금각이에겐 아직 무리려나, 어린이에겐 버거운 일이긴 하지.”
“나도 먹을 수 있어! 무시하지 마!”
또 한 명의 공범이 추가 되었다.
서왕모께 사죄하러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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