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그리움의 기한
* * *
홀로 주절주절 떠들어 댄 영화 속 대사에 기아스가 응답을 해 주었다.
내 언약에 반응하는 기아스.
구멍 난 가슴은 신성이 모이면서 저절로 메꿔진다.
얼스터의 영웅이 가르쳐 준 기술.
인간이 세상에 맹세하는 최고의 도핑.
기아스의 맹약은 이미 자기 멋대로 성사되었다.
‘내가 무슨 맹약을 맺은 거지.’
그리운 이들에 대한 혼자만의 언약.
내 언약을 들은 기아스는 내게 제약을 걸고 힘을 내려주긴 했다.
몸을 일으켜 상태를 확인해보니 역시나 신성이 급격하게 증가한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신성의 상태가 예전과 같지 않은 것 같다.
이 이질적인 느낌, 대체 뭘까.
동생들과 싸우고 있다 뒤늦게 눈치챈 홍수아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기아스의 맹약은 뒤에 생각하고, 힘을 얻은 이상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랑하는 이들이 내 곁을 떠나는 일은 더이상 없을 것이다.
“여의금고봉은 부름에 응하라.”
주인의 부름에 유성과도 같은 빛줄기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나의 유물.
나의 심복.
나의 충실한 종이 주인을 향해 날아온다.
라돈 사건 때와 달리 주인의 부름에 바로바로 응답하는 녀석.
기아스에 맹세한 이후 녀석이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했나 보다.
쾅!
홍수아와 내 사이에 꽂힌 진 여의금고봉.
시꺼먼 묵빛의 철봉을 집어 드니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게 들린다.
지금은 여의 1단계 정도는 가볍게 사용할 수 있을 수준인가.
진품의 여의를 들고선 꼬나보자 주춤하는 홍수아.
“목을 잘랐어야 했는데!”
“그러게, 내 주둥이가 얄미우면 목을 잘랐어야지.”
새 생명을 얻은 내게 살벌한 말을 하는 홍수아.
하지만 이 녀석 말대로 목이 잘렸다면 기아스고 나발이고 시전할 수도 없었겠지.
“네가 왜 그렇게 나를 회유하려 했는지 알 거 같아.”
“뭐?”
태연하게 대답하는 듯하지만 내 눈에는 보인다.
동요하는 홍수아가 말이다.
“너희들 두려운 거지? 우리 원숭이 신의 제자인 내 존재가 말이야.”
“닥쳐!”
정곡을 찔린 듯 큰소리를 내는 녀석.
티를 꼭 그렇게 내서 모른 척하기도 힘들겠다.
“세상이 뒤바뀌어도, 인간이 신을 만났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시끄러워!”
“너희는 나를 이길 수 없어.”
성격은 개차반에 성질은 불꽃과 같으며
깽판에는 저승과 이승을 가리지 않고 고약한 성미는 신분을 가리지 않는 스승님.
그런 스승을 빼다 박았다고 하는 나를 건드려?
우리 성좌께 배운 만큼 백배, 천배로 돌려주겠다.
“당신은 제천대성이 아니야, 나머지 대성들의 화신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그러는 너희도 성좌 본인이 아닌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지.”
“기껏 살아 돌아와서 죽음을 재촉하다니, 타올라라.”
다시 한번 오행의 기운을 조작하는 홍수아.
지면은 이글거리고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기아스의 힘으로 신성이 급격하게 늘어난 지금.
우리 성좌의 발끝 정도는 따라온 것 같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오행의 이치가 화안금정을 통해서 보인다.
팔괘 8장으로 녀석의 불을 끄는 데 실패했던 이유는 결국 신성량의 차이.
신성을 부여해 강제로 불火의 기운을 덮어씌우고 있다면
더 큰 신성으로 물?의 기운을 불러오면 그만이다.
마침 물의 기운을 가득 담고 있는 것이 내 손아귀에 있지 않은가.
까마득한 옛날 반고가 땅을 다진 이후 수만 년 동안 저 심해 속에서
‘바다의 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여의봉.
여의봉을 두 손으로 잡은 뒤 경기장을 찍어누른다.
“안 그래도 더운 데 그만 좀 해라.”
신성의 파동이 여의봉의 주위로 파문을 그리며 헤엄쳐나간다.
아까처럼 물의 기운을 만나도 수생목, 목생화의 과정을 거쳐 더 큰불을 키우려고 애써보지만
소용없다.
쩌저적
수승화, 물이 열기에 비해 너무 많으면 결국 물이 얼어버린다.
오행의 이치에 따라 홍수아의 불은 얼어붙는다.
“그 잘난 오행도 알고 보니 별거 없었군.”
“크윽…”
자신의 주특기가 손쉽게 막혀버리자 이제는 창을 들고선 싸울 준비를 한다.
“와라.”
까딱 까딱.
내 트레이드 마크.
상대방을 열받게 만드는 가벼운 손짓.
이미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손 인사를 시전 해준다.
“한 번 죽었던 주제에 건방 떨지 마!”
도발의 성능은 충분했는지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홍수아.
자신의 성좌에게 받은 불꽃의 창에 불을 두른 채 뛰어온다.
“너에게 죽어서 배운 점이 하나 있긴 하지.”
팔괘나 천 개의 여의는 준비 과정이었을 뿐이다.
스승이 걸어왔던 길은 패도?.
무력 하나로 세상을 뒤흔든 사내의 후계자 아닌가.
압도적인 힘으로 눌러버린다.
새롭게 태어난 내가 배워 나가야 하는 투쟁의 방식이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뒤 홍수아를 향해 여의를 내리찍는다.
“꺄아아아악!”
“그렇게 무게를 잡더니 이제는 나이에 걸맞게 우네.”
상극의 무기와 힘의 격차 때문에 힘 싸움에서 밀린 홍수아가 비명을 지른다.
징징대는 홍수아에게 다가가 한 마디를 읊조린다.
녀석의 복부에 맞닿은 여의.
“커져라.”
콰아앙!
근거리에서 8톤의 철봉에 직격으로 맞아버린 홍수아는
경기장 벽 몇 개를 박살 내면서 벽에 처박혀버린다.
이거 분명 장외패다.
“아쉽네, 심판만 있으면 내가 이긴 거잖아.”
심장이 박살 난 상태로 넉다운 상태에 빠지긴 했지만
그때도 판정을 내릴 심판이 도망갔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 아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주위를 둘러보니 싸우던 것을 멈추고선 홍수아와 나의 싸움을 바라보고 있던 요괴와 히어로들.
초대도 받지 못한 크립티드 녀석들이 어딜 감히 인간들의 축제에 참여했는가.
“뭘 쳐다봐 역겨운 새끼들아.”
후우
머리털을 뽑아 바람을 불어 분신을 소환한다.
예전 분신과는 다르게 모두 여의 하나씩을 들고 나타난 분신 녀석들.
“사람들을 지키고 쓰레기를 정리해 둬.”
“짬처리는 항상 우리한테 맡기지.”
“본체 놈은 지독한 게으름뱅이야.”
“게으름만 놓고 보면 녀석은 원숭이가 아니라 소야 소.”
각자의 여의를 어깨에 메고선 한마디씩 하고선 주위 요괴들을 소탕하러 가는 분신들.
그 걸음걸이가 심히 불량스럽다.
허어…
괜히 쓸데없는 자아를 가져버린 녀석들.
내 무뚝뚝하고 성실했던 분신은 어디로 간 것인가.
“오빠!”
“형님!”
내게 다가오는 동생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인다.
“저년이랑 싸울 때 다치진 않았어? 팔다리는 멀쩡히 붙어 있지?”
“말도 마시오, 내 이렇게 살이 빠진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오.”
대혁이의 정상적인 목소리를 듣는 것은 참 간만이다.
성대마저 비계가 꼈던 녀석은 살이 빠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힘을 축적해 둔 살이 모두 빠진 것을 보니 대혁이 놈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수 있다.
“오빠 괜찮아요? 심장은요? 멀쩡히 뛰고 있어요? 네?”
“괜찮아. 다 계획이 있었지 그럼.”
“어느 미친놈이 계획대로 심장을 터트린다 했더니 우리 형님이셨…”
“으아아아악! 손우진!!!”
동생들과의 우애를 다지는 시간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홍수아.
근거리 폭격에 정신을 못 차릴 줄 알았더니 잘도 살아 돌아왔다.
“다들물러서 있어.”
“죽일 거야… 죽여버릴 거야…”
붉은 머리는 산발에 깔맞춤을 한 건지 코에선 피를 질질 흘리면서
나이와 맞지 않게 살벌한 말을 내뱉는 홍수아.
머리끝까지 화가 났는지 머리에서 김이 올라오는 게 보일 정도다.
8톤의 여의를 맞고도 살아 돌아오다니, 피곤하다 피곤해.
“그렇게 원하면 오늘 끝장을 보자.”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길, 삼매三?…”
그때 홍수아를 향해 순풍이 불기 시작한다.
강력한 바람은 홍수아를 날려 버린다.
홍수아는 준비하던 기술을 완성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하늘로 날아간다.
보호자 분께서 악동 녀석을 데리러 오셨네.
지금 부딪히면 곱게 끝나지 않을 거라 판단한 건가?
현명하군. 여의에 주입하던 신성을 흩뜨려 버린 뒤 날아가는 홍수아를 배웅한다.
“왜 지금 간섭하는 거야! 날 내려놔!!!”
“홍수아! 넌 장외패로 졌으니깐 결국 내가 이겼다.”
“아아아아아악!!!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손우진!!!”
발악하면서 날아가는 녀석.
역시 애새끼는 애새끼였는지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어휴.”
한숨을 크게 내신 뒤 주위를 둘러본다.
뭐 하나 멀쩡한 구석이 없는 경기장.
사상자는 몇 명이나 나왔을까, 나머지 챔피언들이 관중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켰을까.
내가 홍수아를 전담하고 맡았으니 나머지는 챔피언들이 제 역할을 해줬기를 믿을 수밖에.
“대혁아, 유정아. 수습 좀 부탁한다.”
동생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긴 뒤 아까 전부터 잡고 있던 의식을 끈을 놓는다.
끈을 놓자마자 피로와 수마가 나를 덮치고 눈앞이 깜깜해진다.
. . . . .
방어 기제로… 것이니… 시간이 지나면…
기다리는… 말고는 …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
무책임하게 끈을 놓아버린 의식을 다시 깨운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병실에 모여있는 사람들.
“오늘 내 생일이었던가?”
대혁이, 유정이, 예은이, 깐프 엘레나, 그리고 협회장 아저씨와 손녀 아가씨.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정신을 차린 나를 뒤돌아본다.
“그러게 내가 말하지 않았소, 돌대가리라 머리 쪽 이상은 절대 없을 거라고.”
“한시라도 감동을 느낄 수 없게 해줘서 정말 고맙다.”
“크에에엑! 형님! 아직 힘을 회복하지 못했소! 살살! 그만!”
일어나자마자 한 일은 결국 대혁이 놈의 긴고아가 되어 주는 일이었다.
홀쭉하더라도 주둥아리는 그대로 놀리는 녀석.
반성해라 이 생체 긴고아의 죄수여.
“오빠들! 손님도 계신 데 그만 좀 해!”
“아저씨는 여전하셔서 다행이라 해야 할까요…”
“우진님은 동생분과 우애가 좋으시네요.”
각각의 반응을 보여주는 여성진들.
동생과 드잡이질하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아재는 내게 다가온다.
“아직도 동생을 못 잡아먹어서 괴롭히더냐?”
“이놈이 항상 성질을 긁는데 어쩔 수 없죠.”
“…이번 일은 그래도 수고했다.”
“제가 빌런 찾는 건 또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초를 쳐서 미안하지만, 홍수아는 우리가 찾고 있던 빌런이 아니었다.”
이게 뭔 개풀 뜯어먹는 소리지?
홍수아가 협회에서 찾던 빌런이 아니라고?
“사망한 히어로 중에 등록된 신원과 다른 인물이 존재하더구나. 그놈이 우리 요원들이
찾고 있던 빌런 녀석이었다.”
차세대 유망주로 기대를 받을 정도로 히어로 활동을 해왔던 홍수아.
히어로인 나와 접선하기 위해서 협회에 잠입했을 것이다.
이미 현직에서 물러난 나를 만나기 위해서 배틀 토너먼트에 참여했다
내가 화안금정으로 정체를 발견했어도 당당한 그 태도.
녀석들의 목적은 확실하다.
“저를 노리고 있는 단체가 있어요. 그곳의 조직원 중 한 명이 홍수아 일 겁니다.”
“너 하나만 노려서 그런 개판을 쳤다고?”
“예. 정확히는 제 신성이 필요하니 함께하자 하더군요.”
“놈들의 정체는 알고 있느냐?”
“홍수아의 뒷배를 보면 짐작은 가요.”
칠대성七大?.
큰 성인이란 뜻의 대성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지닌 대요괴 집단.
우리 성좌의 창피한 과거사가 얽혀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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