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그리움의 기한
* * *
“안녕 챔피언.”
구체 속에서 쏟아져 내린 화염 줄기들을 피하는 사이에 내 옆까지 도달한 홍수아.
급하게 여의에 팔괘 8장 중 불의 속성을 담아 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치이익!
여의를 두 동강 낸 뒤 옆구리를 지나가는 홍수아의 불의 검.
“순수한 불로 만들어진 검이라 자상은 문제없을 거예요.”
“크으으으… 미친년이 화상은 생각 안 하냐?”
이미 흉터투성이인 몸에 예쁜 화상 자국을 추가해 준 홍수아.
옆구리가 타버린 거추장스러운 양복 외투를 벗어버리고
선글라스도 경기장 밖으로 던져버린다.
“소꿉놀이는 끝나셨나요?”
“그래. 어느 못된 아이가 초를 쳐서 말이야.”
“그것참 유감이네요.”
“떨어져라.”
도술 한 마디에 공중에서 떨어지는 철의 비.
라돈 사태 이후로 천 개의 여의를 전부 부른 것은 오늘이 처음인가.
그만큼 좆같은 상황이라는 뜻이다.
철의 비는 우리가 서 있는 경기장 주변을 빼곡히 감싼다.
공식적인 신분, 미스터 손을 때려치운 나 때문에 웅성거리는 관중들.
사람들을 인질로 잡기 전에 내가 이 녀석을 붙잡아서 최대한 억눌러 놓아야 한다.
“아 이 기술 미튜브에서 봤는데!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별거 없네요?”
“감상평이 참 냉정해서 눈물이 나올 거 같네.”
연령에 어울리는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험악하기 그지없다.
아까 한 수를 겨뤄봤을 때 느꼈지만 이 녀석 보유한 신성은 나랑 비슷하거나 그 위다.
어디서 이런 놈이 튀어나왔지?
대체 원하는 게 뭐길래 토너먼트에 참가한 것일까.
“빌런을 이해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지만 그래도 물어봐야겠어. 너 목적이 뭐냐?”
“빌런이요? 하하하!”
쥐고 있던 불의 검마저 없애버린 뒤 한참을 웃는 홍수아.
그러더니 웃음을 뚝 그친다.
“왜 그분의 힘을 갖고도 멍청하게 휘둘리는 거죠?”
“대답해. 아니면 빌런인 걸 부정하는 거냐?”
“꼭 확인하고 싶으시다면야.”
홍수아는 내게 반문한 뒤 다시 홍염의 구체를 만든다.
전과는 달리 싸늘한 어조로 대답하는 홍수아는 구체를 관중석으로 날린다.
확실해졌다, 저 녀석은 사람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다.
“미친년이!”
펑!
구체가 향하는 관중석 쪽에 빳빳한 머리카락을 날려 보내 분신을 소환한다.
분신 녀석이 나를 향해 고개를 젓는다.
“본체, 무리다.”
“알고 있어! 저년 상대로 시간 좀 벌어봐!”
분신과 위치를 바꿔 또 한 번 구체를 하늘로 쳐낸다.
날아가는 구체를 향해 이번에는 여의 또한 날려 보낸다.
여의가 홍염의 구체에 꽂힌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것을 향해 손아귀를 움켜쥔다.
팔괘 3장 감?.
물의 기운을 담은 여의를 구체를 향해서 던진다.
하지만 물의 기운은 구체가 담고 있는 열기를 중화시키지 못하고
이내 화염볼은 공중에서 터져버린다.
““으아아아아아!!!””
구체의 폭발에 휩쓸려 재가 될 뻔했던 관중들이 혼란에 휩쓸려 비명을 지른다.
그저 스포츠 경기로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이 마주한 위협은
상황을 더 혼돈 속으로 빠뜨린다.
분신 쪽을 살펴보니 이미 홍수아의 손아귀에 목이 잡힌 채 타오르고 있다.
재가 되어 역소환되는 분신.
“살살 좀 해주지 그랬어.”
“이런 잔기술들로 서로 간 보는 건 그만하죠.”
무지막지한 화염 구슬을 던져놓고선 분신술은 잔기술로 취급하다니.
자신의 실력에 걸맞게 오만한 년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히어로들과 나를 도와줄 준비를 하는 동생들이 보인다.
“거기 두 분은 끼어들지 마세요.”
그 말과 함께 경기장을 화염으로 감싸는 홍수아.
철저히 외부의 개입이 막힌 상황.
이글거리는 불의 벽 때문에 둘 다 나갈 수 없고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둘 중 하나는 죽어서 나가자는 거냐?”
“저희와 함께할 수 없다면 죽여서라도 그분의 신성을 갖고 가야죠.”
“우리 성좌의 신성?”
“그래요. 순순히 내놓으시면 목숨 정도는 붙여 놀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하하, 미친년…”
히어로 협회에 잠입한 것까지는 완벽했지만 나에 대한 조사는 엉망으로 했구만.
우리 성좌의 신성?
이 녀석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건가.
“내 몸속에 있는 신성은 전부 나만의 고유한 신성이다.”
“네?”
“기껏 잠입해놓고 히어로에 대한 조사는 하지도 않은 거냐, 멍청하긴.”
내 답변에 허점을 찔린 홍수아는 침묵에 잠겨 고민하기 시작한다.
“…본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줄이야, 알겠어요. 당신이 죽여달라고 빌 때까지 만들어서 제천대성께 신성을 받아 내야겠어요”
“생각보다 더 미친년이었네. 너희 성좌는 뭐 하는 놈이길래 교육을 이따위로 시켰냐?”
“건방 떨지 마세요.”
묶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선 머리 끈을 벗어 던지는 홍수아.
검은 머리는 홍수아의 손길을 따라서 붉은색으로 물들어간다.
“저는 하늘의 정복한 평천대성의 적장자, 화운동의 주인을 모시고 있어요.”
“수식어 한 번 지랄 맞게 길군.”
평천대성??大?.
하늘을 평정한 성인이라는 뜻이다.
우리 성좌의 호칭과 버금가는 오만한 호칭.
요괴들의 왕이라고 불리는 평천대성의 적장자는 한 명뿐이다.
화운동의 주인, 성영대왕 홍해아로군.
“그쪽 성좌는 오래전 불가에 귀의하지 않았어? 이렇게 개같이 굴어도 되나 싶네.”
“인과율이 뒤틀린 그 날엔 인간들만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에요.”
밀레니엄 쇼크를 들먹이는 홍수아.
성좌들도 밀레니엄 쇼크에 영향을 받았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
“우리의 대의를 알고 싶다면 따라오세요.”
“그건 싫은데.”
“그렇게 나오시면 어쩔 수 없죠.”
불꽃을 튀기며 창 한자루를 소환하는 홍수아.
저 창을 상대하려면 천 개의 여의도 부족해 보이는데.
“성좌의 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반푼이 챔피언에게 선공을 양보할게요.”
“무시도 이런 개무시가 따로 없군.”
딱 봐도 성좌의 유물처럼 생긴 창을 꺼내든 홍수아.
아까 말했던 말들은 전부 진심이었나 보다.
팔괘 5장 진?.
번개의 기운을 손에 담아낸 뒤 근처의 여의 하나를 잡는다.
이번에는 뇌전을 기운을 품은 여의를 들고선 꽂혀있는 다른 여의를 후려친다.
서로 공명하며 전기 줄기를 이어나가는 여의.
홍수아의 근처에 도달한 뇌전 무리는 그 아가리를 벌린다.
“능력이 부족하니 이런 조잡한 기술에 연연하는 거죠. 불태워라.”
주인의 명령에 따라 불타오르는 홍수아의 창.
창을 주위로 휘두르는 홍수아.
새빨간 홍염의 창은 화염을 내뿜어 주인을 덮치는 번개를 소멸시킨다.
“불꽃이 번개를 태워도 되는 거냐고!”
“성좌의 신성을 거부한 멍청이다운 발언이네요.”
팔괘 6장 손?.
여의를 전방으로 회전시켜 바람을 일으켜 폭풍을 일으킨다.
“말했잖아요. 조잡할 뿐이라고.”
불꽃을 다스리는 성좌의 유물은 더 큰 화염 폭풍을 일으켜
내가 불러낸 바람을 잡아먹는다.
“씨발! 무슨 만능 불꽃이냐? 못하는 게 없네!”
“타올라라.”
홍수아는 화염의 폭풍을 조종해 내 폭풍을 집어삼킨 것도 모자랐는지 나까지 먹으려 한다.
급하게 물의 기운 감과 태를 일으켜 화염을 막아선다.
하지만 물의 기운과 만나도 쉽게 꺼지지 않는 화염.
“소용없어요, 오행의 기운을 거스르는 불꽃은 꺼지지 않아요.”
물은 홍수아의 불꽃을 만나 나무의 기운으로 변한다.
나무의 기운은 이윽고 다시 불을 태우는 장작이 되어 화염을 크게 부풀린다.
“팔괘극권 태산 구르기!”
팔괘 7장 간과 8장 곤의 기운이 합쳐져 내 앞으로 바위산을 쌓아 올린다.
바위산조차 태워 버리는 화염 폭풍은 바위산이 다 무너질 즘에야 소멸한다.
콰앙!
바위산이 무너질 때를 노려서 공중에서 기습을 시도해봤지만 쉽게 막아내는 홍수아.
“오행을 다루는 제가 당신의 속셈을 모르고 있을까요?”
“뭐라…”
“펑.”
홍해아의 후계자는 내가 휘두른 여의를 상대하던 창을 곧 땅에 찍어누른다.
창에서 흘러나온 불의 기운이 내가 모아두었던 자연의 일곱 가지 기운을 흩트려놓는다.
팔괘를 엉망으로 만든 불의 기운은 대기로 올라와 내 눈앞에서 폭발하고 만다.
콰아아앙!
내 신체는 폭발에 휩쓸려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이 느껴지고
직격으로 맞아버린 폭발 때문에 의식이 멀어져 간다.
…터벅터벅.
나를 날려버린 홍수아가 내게로 걸어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한쪽 눈이 떠지질 않아서 시야가 뿌옇다.
내 앞에 쪼그려 앉은 뒤 쓰러져 있는 내 머리를 들어 올려 눈을 마주치는 홍수아.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는 홍수아는 패배자를 동정하는 눈빛이다.
“결국 인간의 신성은 이 정도밖에 안돼요.”
“…”
“손우진 씨, 마지막으로 기회를 드릴게요. 저희와 함께하시겠어요?”
“…크흐흐흐.”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벌써 다 이기셨나 보군.
저희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홍수아와 뜻을 함께하는 녀석들이 있다는 거겠지.
밀레니엄 쇼크는 인간들뿐만 아니라 성좌에게도 영향을 끼쳤다라.
진작에 불교에 귀의했다고 전해지는 홍수아의 성좌, 홍해아는 변질했다는 건가.
“가까이 와…”
“동료가 된다면 치유해드릴게요. 그래서 함께하실 건가요?”
내게 귀를 내미는 홍수아.
변질한 성좌는 결국 크게 본다면 크립티드 아닌가?
미안하지만 크립티드와 한솥밥을 먹기는 싫어서 말이야.
“좆 까.”
“꺄아아아악!”
확실한 거절의 뜻을 말해 준 뒤 홍수아의 귀를 물어뜯었다.
퉤!
살점을 뱉은 뒤 비명을 지르는 녀석을 느긋이 감상한다.
하지만 손에서 불을 피워낸 후 상처를 지지는 홍수아.
“독하다 독해.”
“그냥 죽어 이 미친놈아!!!”
콰직!
성좌의 유물로 내 심장을 내려찍어버린 잔인한 년.
형체를 잃은 심장은 기능을 상실하고 갈 곳을 잃은 혈액은 움직임을 멈춘다.
구멍이 난 가슴과 입에서 쏟아져 내리는 피.
창이 불꽃 모양이라 가슴에도 불꽃이 하나 피었네.
쿨러!
입으로 울컥 쏟아지는 피 한 바가지.
“…살려서 데려간다고 하지 않았냐? 말이 다르잖나 크크…”
“너 같은 미친놈은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남아있는 놈들을 정리한 뒤에 시체로 끌고 가주마!”
경기장을 감싸고 있던 불꽃을 거두는 홍수아.
매정하긴, 환자를 두고 혼자 가버리다니 말이야.
꺼져가는 의식을 붙잡고선 눈을 굴려 주위를 살핀다.
놈들의 수하들이 도착했는지 스타디움을 개판으로 만들고 있는 요괴들과
이에 맞서 싸우고 있는 히어로들.
쓰러진 나를 발견하고선 홍수아에게 달려드는 동생들.
이렇게 쓰러져 있다간 동생들마저 죽을 것이 뻔하다.
“인생사 가장 큰 고통은 바로 후회이니…”
박살 난 심장에 걸려있던 기아스가 응답할지는 모르겠다.
어린 시절, 밀레니엄 쇼크 이전에 가족들과 함께 봤던 마지막 비디오 영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삶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제천대성의 길을 선택한 한 남자의 이야기.
그의 대사를 따라 말한다.
“…하늘이 내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난 그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리다.”
죽기 직전 가족을 향해 내뱉는 나의 작은 고백.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더냐?=""/>
영화 속에서 긴고아를 착용하려는 남성에게 묻는 관세음보살의 마지막 질문.
우리 원숭이 성좌가 지금 물어본 것인지 아니면 죽어가는 내게 들리는 환청인지 구분을 못 하겠다.
“손우진!!!”
거대한 신성의 집약에 동생들과 싸우는 것을 멈추고선 다시 나를 향해 뛰어오는 홍수아.
다행히 기아스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나 보다.
늦었어 새끼야.
내가 해줄 말은 이것 말곤 없다.
“그리움에 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 년으로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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