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미스터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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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립티드 업무 보고서
작성자: 손우진
담당자: 사유정
크립티드 늑대인간 제거
제거 사유: 광견병 걸린 듯하다. 무작정 물려고 함.
동물 보호 단체에서 지랄할 것을 사전에 방지해 주길 요청함.
크립티드 황금 고블린 부족 검거
검거 사유: 금은방을 몰래 털다가 부족 전체가 검거당했음.
약아 빠진 새끼들이 지성체 크립티드를 위한 국선 변호인을 붙여 달라고 요청함.
현장에서 몇 번의 폭력으로 수긍했으니 붙여주지 말 것.
크립티드 밴시 보호처분
보호 사유: 술집을 방문하여 몇몇 손님들을 보고 울어대는 통에 시민들이 신고,
무해 개체라서 협회에 임시 보호처분 요청함.
크립티드 이무기 포획
포획 사유: 크립티드라서 용이 될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한 채 한강에서 깽판.
상담이 필요해 보임. 멘탈을 케어해 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한 명 요청함.
크립티드 강시 제거
제거 사유: 강시 제거 사유는 왜 쓰라고 하는 거야 협회 이 미친 새끼들아 강시가 말이 통하기를 해
호전적이지 않은 크립티드도 아니고 사유란 사유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적어 내라고 시키는 게 짜증 남.
하나부터 열까지 협회가 마음에 안 들어.
히어로가 죽이면 죽이는 거지 적대적인 크립티드 하나 잡는 시간보다 이 보고서 사유는
뭐라고 써내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하는 시간이 더 많이 걸리겠다.
이 탁상행정 넥타이맨 새끼들아 라고 할 뻔.
“와… 진짜 이분은 뒤가 없으시네.”
여동생을 대신해서 보고서를 보내온 손우진.
어쩐 일로 착한 일을 한다 했더니 현직에 있던 습관 그대로 보고서를 써 올렸다.
현장직의 화려한 보고서를 본 협회의 신입 사원은 살짝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렇게 격식 없는 보고서는 처음이다.
이걸 그대로 위로 올려보내도 되는 걸까?
그런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 보고서를 그대로 올렸다간 검수자인 자신도 같이 싸잡혀서 꾸중을 들을 것 같다.
신입 사원은 자신 나름대로 보고서를 다시 작성하기 시작한다.
최대한 격식 있고 말이 되는 쪽으로.
특히 강한 어조로 쓴 강시에 대한 보고서는 손이 많이 갈 것 같다.
오늘도 정시 퇴근은 글러 먹은 하루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신입 사원이었다.
“오빠 진짜 제대로 쓴 거 맞아요? 내 인사고과에 반영된단 말이야.”
“내가 보고서 한두 번 썼나, 한 번도 반려된 적 없으니깐 걱정하지 마.”
내 방식대로 써 올리긴 했지만 현직에 있을 때부터 보고서로 흠잡은 사람은 없었다.
사실 크립티드를 처리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히어로에게 보고서까지 쓰게 만드는
협회 놈들이 나쁜 거다.
“그러면 배틀 토너먼트 나갈 거지?”
“응, 오랜만에 오빠랑 지내니깐 옛날 생각도 나고 좋네요.”
좋아, 팀원 한 명 확보했다.
남은 건 대혁이지만 그 녀석은 이미 소개팅을 나간 상황.
상대가 좋으나 싫으나 내가 한 약속은 지켰기 때문에 따라올 수밖에 없다.
“아저씨, 그런데 배틀 토너먼트는 왜 참가하는 거예요?”
“응? 내가 말 안 했나?”
“네.”
“그냥 오빠가 보기에 재밌어 보여서 나가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배틀 토너먼트에 나가는 이유.
처음엔 그저 재밌어 보여서 참가하려 했지만 일이 꼬였다.
“음… 안 알려줄래.”
“그게 뭐예요.”
내 싱거운 대답에 피식 웃어버리는 아이들.
재밌어 보여서 수락한 점도 있지만, 협회장 아재에게 부탁받은 일도 있어서
아무리 동료들이라도 기밀 사항을 입 밖으로 꺼낼 순 없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을 때쯤 걸려 오는 전화.
발신인을 확인해보니 오대혁의 이름 세 글자가 적혀있다.
“여보세요.”
형님!
“왜 다짜고짜 전화해서 난리야 너는.”
참한 처자를 소개해 달라고 그랬더니 이러기 있소!
“그 정도면 참한 처자지, 새끼가 눈만 높아서 말이야.”
그때 스피커 건너로 들려오는 참한 처자의 목소리.
대혁 오빠? 마저 공부해야지 여기서 뭐 하고 있으세요.
소정 아씨, 그게 말이오…
“끊을게 대혁아, 소정이가 좀 집요할 거다.”
형님! 형님!
띠리링
소리치는 대혁이를 소정이에게 맡긴 뒤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린다.
돼지 놈에게 소개해 준 여성은 동생 안소정이었다.
대혁이 놈도 소정이가 내 동생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한껏 부푼 마음으로 나간 소개팅 자리는 교리 공부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게, 형이 나가자고 했을 때 한 번에 나갔어야지.”
“대혁이 오빠는 절대로 큰오빠 못 이겨 먹겠네요.”
날 말로 이겨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다.
. . . . .
“소개팅은 재밌게 즐기다 왔냐?”
“말도 마시오…”
조금은 핼쑥한 얼굴로 돌아온 대혁이.
대회가 코 앞인데 이러면 쓰나.
“내 유일교의 교인도 아닌데 그날 유일교 교리는 전부 외우고 온 것 같소.”
“그래도 소정이가 이쁘긴 하잖아.”
“이쁘면 뭐 하오! 뻔히 형님의 동생인 걸 아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소!”
“대회가 끝나면 다른 사람 소개해 줄게.”
“내 절대는 형님께 소개 받지 않으리다.”
대혁이 놈은 토라졌는지 내 성의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영리한 녀석.
“그나저나 형님, 머리는 또 왜 그렇게 올리셨소?”
“오늘은 손우진이 아니라 미스터 손이라 불러라.”
“미스터 손, 머리는 왜 그 모양 그 꼴이오?”
“시킨다고 또 하냐.”
놀리려고 그런 건지 형이 시켰다고 한 건지 군말 없이 따르는 오대혁.
“협회장 아저씨가 허락은 해 줬는데 신분을 감추려는 최소한의 노력은 하래잖냐.”
“그래서 기껏 생각한 게 미스터 손이라는 신분이오?”
“그래.”
“크하하하하하케엑!”
이 새끼 이럴 줄 알았다.
사정을 전부 듣고 난 뒤에야 비웃는 돼지 녀석의 머리를 쥐어박는다.
어쩐지 돼지 녀석이 시키는 걸 고분고분 듣는다 했어.
“까불고 있어, 아무튼 오늘은 말실수 하지 말고 미스터 손이라 불러라.”
“아흐 진짜… 미스터 손 당신은 그 주먹부터 나가는 버릇을 고쳐야 하오.”
“불만 있어?”
“물만 있소.”
쓸데없는 사족을 붙인 놈을 무시해 준 뒤 유정이를 기다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오는 유정이.
“등록했어?”
“네. 협회장님이 미리 말해둔 건지 문제없이 등록했어요.”
“역시 높으신 분 백이 든든하네.”
즐기려고 했던 대회인데 비밀 임무를 줬으면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예선전부터는 힘을 빼지 말자.
본선에 올라가서 윤곽이 드러날 때쯤에 임무를 수행하자.
“그래서 우린 몇조야?”
“예선전 D조에 배정받았어요.”
“한참 기다려야겠네.”
“그동안 뭐라도 먹으면서 기다립시다.”
자신의 풍만한 배는 고려하지도 않은 채 얘기하는 대혁이 놈.
저 녀석 그래도 나름 대회 준비한다고 쉬지 않고 먹었을 텐데 아직도 들어갈 자리가 있는 걸까?
“넌 사람이 어떻게 먹을 생각만 하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 아니겠소?”
초인들끼리의 대결은 쉽게 볼 수 없는 구경거리라 그런지 대규모 인파가 몰려온 상황.
이 사람들을 따라서 온 노점상들이 수도 없이 많으므로 먹거리는 많다.
대혁이 눈에는 토너먼트 대회장이 아니라 뷔페에 온 기분일 거다.
“자. 난 됐으니깐 너나 실컷 먹어라.”
고위급 히어로에게만 주어지는 카드를 대혁이에게 건네준다.
아저씨가 임무를 주었으니 따지고 보면 이것도 경비처리 해도 되겠지.
법인 카드는 이럴 때 쓰라고 준 것 아닌가.
“미스터 손이 어쩐 일이오? 우리 순번이 돌 때까지 내 적당히 먹고 오리다 하하!”
“가라 가 새끼야.”
신이 나서 뛰어가는 오대혁.
먹는 것과 관련되면 몸놀림이 날렵해지는 놈이다.
저 육중한 몸뚱이에서 나오는 무게감은 땅이 흔들리는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신나게 긁을 텐데 괜찮겠어요?”
“뭐 어때, 저거 법인 카드야.”
“협회에서 대혁 오빠한테 카드를 괜히 안 주는 게 아니에요.”
“치팅데이였다고 변명할까?”
“대혁 오빠는 항상 치팅데이예요.”
둘이서 신나게 대혁이를 까고 있을 때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인물이 있다.
“미스터 손.”
“아아, 잠깐 다른 곳에 가서 얘기합시다. 금방 올 게 유정아.”
“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나이를 따라서 북적거리는 대회장을 벗어난다.
까만색으로 도배를 한 괴상한 패션 감각.
협회의 블랙 요원이다.
양지에서 일하는 히어로와 달리 어두운 음지에서 활동하는 요원들.
업무의 특성 상 빌런 놈들을 조사하고 추적하는 일을 맡고 있는 중이다.
대중들은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이지만 인류를 위해 힘쓰는 점에서는 히어로와 다를 바 없다.
“미스터 손, 저희가 조사해봤을 때는 수상한 인물은 없었습니다.”
“꼭꼭숨었나 보네요, 빌런놈들이 잠입한 것이 확실합니까?”
“예. 저희 쪽 스파이 요원들이 정보를 입수한 것이라 확실하지만…”
“현장에서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잠입해 있다?”
“그렇습니다.”
아저씨가 부탁한 기밀 임무.
이번 히어로 배틀 토너먼트에 잠입한 빌런을 검거해 줄 것.
인파가 많이 몰린 상황이라 빌런놈들이 무슨 일을 꾸미든 간에 대형참사가 벌어질 것이다.
힘에 미친놈들은 자신이 성좌를 만족시키기 위해 어떤 일이라도 벌이겠지.
이를 우려한 협회장 아재는 토너먼트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해 왔다.
어떻게 하면 꼼수를 써서 대회에 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내게는 최고의 제안이었다.
대회도 참여할 수 있고 쓰레기 같은 놈들도 덩달아 팰 수도 있고, 일거양득 아닌가.
“작정하고 숨은 놈들이라면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놈들이겠죠.”
“그래서 더 걱정입니다. 민간인들도 많이 모여 있는 상황인지라…”
“어차피 놈들도 예선전은 뚫고 올라올 겁니다. 본선이 진행될 때쯤에 항상 화안금정으로 살펴보도록 하죠.”
“부탁드리겠습니다. 미스터 손.”
“예.”
빌런놈들아 아무리 숨어 봤자 내 화안금정 앞에서는 못 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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