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스승과 제자
* * *
루카스는 외적인 부분 말고도 내면까지도 내 방식대로 물들였다.
‘그거 알아? 인간의 몸은 생각보다 튼튼하다는 걸.’
‘하지만 선생님이 똑같은 강도로 반격하라고 하셨는데요.’
‘사실 그건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야.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좀 더 힘차게 때려도 돼.’
아무것도 모르던 겁쟁이 소년은 화과산 악질 원숭이의 뾰족한 마음을 닮아갔다.
이 악의 손길은 소년의 제2의 인격도 피해 갈 수 없었다.
나는 두 명의 소년을 나만의 색깔로 칠해 나갔다.
‘죽이는 것보단 살려두는 것이 더 굴욕적이지.’
‘패자는 죽인다.’
‘아냐, 살려둬서 너에 대한 공포심을 평생 느끼도록 두는 거지.’
‘일리 있다.’
그리고 결전의 날.
길고 긴 핍박의 시간은 오늘 이후로 끝이다.
소년이 반쪽짜리 챔피언이라는 불명예 오명을 벗어 낼 시간.
어서 빨리 이놈을 합격시키고 기아스를 완성해서 집으로 돌아가자.
시험을 치기 위해 EU 히어로 협회가 있는 독일로 향한다.
이미 최고 장수생으로 유명세를 펼치고 있는지 루카스를 바라보는 사람들.
“어쩐 일로 주눅이 안 들었지?”
“이젠 합격할 자신이 있으니깐요.”
“항상 기억해. 기브 앤 테이크는 이제 너의 모토야.”
이제 병신같이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호구처럼 당하지 않는 실전 교육을 받은 루카스는 당당하게 합격하고 오겠지.
그렇게 담소를 나누며 시험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
“이게 누군가? 되다 만 챔피언이 아니신가!”
와, 존나게 진부하다.
누가 봐도 나 버러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라고 알리듯 뻔한 대사에
가만히 있는 우리에게 다가와 시비를 거는 것부터.
자신이 이곳에서 악역을 맡고 있다는 티를 풀풀 낸다.
“안녕 마르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 시비를 걸어오는 녀석의 이름도 알고 있는 루카스.
나의 윽박지름으로 심적 부분도 상당히 단단해진 루카스는 여유롭게 비꼼을 받아낸다.
“안녕 마르셀? 하하! 너는 한가롭게 인사할 시간이 아닐 텐데?”
“이번엔 느낌이 좋거든.”
“지금까지는 느낌이 좋지 않아서 떨어진 것이냐? 어이가 없군. 하하하!”
“씨발놈이 먼저 말을 걸어 놓고 지랄이야.”
“뭐야?”
욕지거리를 내뱉는 나를 돌아보는 마르셀인지 니미셀인지 하는 놈.
싫어하는 타입 두 번째에 드는 놈이고만.
내 앞에서 깝죽거리는 놈.
“먼저 말을 걸고 왜 지랄이냐고, 너 말이야 이 씨발놈아. 귀에도 버터를 처발라서 안 들리냐?”
“이런 천박한 원숭이 새끼가!”
자신의 언행은 기억하지 못한 채 내 무차별적인 폭언에 열이 뻗쳤나 보다.
화과산 원숭이가 아닌 인종 차별적 언어로 이 말을 들은 것은 참 오랜만이다.
이내 자신의 장갑을 벗어 내 안면에 던지려 하는 놈.
물불 가리지 않고 무기부터 뽑아 들 줄 알았는데 꼴에 기사 놈이라 이건가.
“그만 마르셀.”
그런 놈의 결투 신청을 말리는 목소리.
아쉽다. 우리 학생 기도 살려줄 겸 합법적 깽판이 가능했는데.
차라리 저 녀석의 보호자가 시비를 걸어 줬으면 좋겠다.
“브뤼노 경!”
“죄송합니다. 저의 종자 녀석이 챔피언을 몰라뵙고 결례를 저지른 점 사과드립니다.”
“저 멀리 있는 동양의 챔피언을 알고 있네?”
“힘이 전부인 세상에서 강자분들의 얼굴은 알아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과와 함께 자신의 견습 기사의 머리를 땅에 닿기 직전까지 처박아 버리는 기사 나으리.
아쉽다.
애새끼가 비정상이라면 보호자도 높은 확률로 비정상이길 마련인데
이런 경우는 호부견자와 같은 상황인가.
건방진 애새끼를 교육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 괜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다.
“뭐 그쪽 체면을 봐서라도 사과는 받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챔피언.”
자신의 견습 기사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브뤼노라는 기사.
“저 새낀 대체 누구냐?”
“나이츠 헤븐 소속 브뤼노 경의 견습 기사 마르셀이에요.”
유럽 유명 칼잽이 성좌들의 모임, 나이츠 헤븐의 떨거지였구만.
꼭 집단의 유명세를 자신의 위세처럼 착각하는 놈들이 저렇게 오만방자하다.
“널 알고 있다는 건 저 새끼도 최소 한 번은 떨어졌다는 소리 아니야?”
“네. 뭐 그런 셈이죠.”
“뭐 하는 놈이야. 저 새낀 만나게 되면 리차드 먹잇감이다.”
가끔은 타인의 힘으로 주제 파악이 필요한 녀석들이 있다.
마르셀이란 놈은 자신의 주둥아리가 불러온 재앙을 맞이할 차례다.
시험에 응하시는 수험생은 해당 고사실로 이동하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가자.”
“네!”
. . . . .
이제 막 히어로 걸음마를 떼는 애송이들이 모여 체력 측정 시험을 치른다.
대부분은 막힘없이 진행해 나가고 있는 중.
사실 체력 측정에서 떨어지면 애초에 가망이 없다는 소리지.
기본이 준비가 안 되어있는데 어떻게 괴수를 잡겠다는 건가.
그중에서도 자신의 힘을 마음껏 발산하는 루카스.
녀석은 이 시험이 익숙한 듯 시험 감독관이 지시하기도 전에 알아서 시험을 이어나간다.
창피하게 지 혼자서 장수생 티는 다 낸다.
“적당히 조절해 루카스.”
“저기 참관인분…직접적인 조언은 안 됩니다만.”
“지금 저놈이 체력 측정에서 탈락할 놈으로 보이십니까?”
“그래도 주의 부탁드립니다…”
동양의 챔피언이라도 챔피언은 챔피언.
챔피언이 참관인으로 참가한 이상 적당한 주의만 주는 감독관이다.
역시 사람은 어느 정도 권력이 필요하다.
익명성의 가면을 쓴 고아단 앞에선 무용지물이지만.
알아서 통과하겠지.
과외 학생을 믿고 낮잠을 때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험 감독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험 종료! 측정을 멈춰 주시길 바랍니다!”
체력 검사가 끝났나 보다.
루카스 놈은 얼마나 열심히 한 건지 몸이 땀범벅이다.
“뭐 이리 열심히 했어?”
“그게 평소처럼 하다 보니깐 이렇게 됐네요.”
그때 당시엔 대인전이 잼병이니 최대한 점수를 받아보려고 열심히 노력한 것인가.
눈물 난다, 눈물 나.
짠내 나는 스토리에 입안까지 짭짤해 질 정도이다.
“그래서 다음은 대련 시합이야?”
“네. 선생님도 히어로 시험을 보시지 않았나요?”
“내가 뭔 시험 세대야. 나 땐 괴수 잡는 놈들은 죄다 히어로 자격을 줬었어.”
그저 괴수 잡던 백정들을 통제하기 위해 히어로 직함 하나씩은 줬던 과거.
레이드고 나발이고 살아남고자 좆같은 크립티드 새끼들을 도륙하던 놈들에게
목줄 하나 걸었던 것이 히어로의 기원인데 이젠 시험도 보고 참 세탁 잘했다.
“시험은 어떻게 진행되는데?”
“합격한 인원끼리 조를 나누어서 각자 한 번씩 대련을 진행해요.
일정 승점을 얻은 사람만이 합격할 수 있어요.”
그렇단 말이지.
얼마 후 시험 감독관이 수험생들을 불러 조 추첨식을 시작한다.
당연히 루카스는 깝죽거리던 새끼와 같은 조가 돼야지.
하지만 운에 맡기기엔 저런 재수 없는 놈들은 항상 운이 좋아서 불안하다.
머리카락을 뽑아 손바닥 위로 올려놓는다.
후우
내 입김을 불어 넣자 무언가로 변하는 머리카락.
이내 내 손에 나타난 것은 미니 손우진 군단이다.
개미 정도의 크기로 와글와글 움직이는 놈들.
“차렷.”
내 한마디에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군단.
“내 분신들이라면 뭘 꾸미고 있는지 알고 있겠지?”
키득키득 웃으면서 경례를 하는 미니 분신 군단.
이내 내 손을 타고 내려가 은밀하게 움직이는 군단 녀석들.
“루카스! 힘내라!”
내 커다란 응원 소리에 나를 돌아보는 사람들.
루카스 녀석은 속도 모르고 히죽 웃으면서 나를 쳐다본다.
새끼. 자기 선생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도 모르고 웃어대긴.
이목이 끌린 사이에 추첨용 상자 속으로 들어가는 군단.
눈치챈 사람 없이 다시 조 추첨에 들어가는 사람들.
“루카스 웨인, B조!”
다른 놈들은 상관없다.
어차피 지금의 루카스라면 지는 것이 우스울 정도이니깐.
리차드를 위한 먹잇감이 필요할 뿐.
지금 추첨용 통 안에는 미니 손우진들이 그 녀석을 위한 B조 공을 남겨두었을 것이다.
오직 한 놈을 위한 공은 녀석의 손으로 들어가겠지.
곧이어 녀석의 뽑기 시간이 다가왔다.
“마르셀 뒤프레, B조!”
놈은 자신이 사기를 당한 것도 모른 채 웃어댄다.
아마도 아까 당한 굴욕을 루카스에게 설욕할 작정이겠지.
그렇게 같은 곳에서 서로 다른 꿍꿍이를 숨긴 채 조 추첨이 끝났다.
. . . . .
“승자! 루카스 웨인!”
그저 내가 알려준 대로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하면 똑같은 방식으로 돌려주는 루카스.
그런 행태에 자신을 놀리는 것이냐며 화를 내는 이도 있었지만 뭐 어떤가?
꼬우면 이겼어야지.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낸다고 하는 크립티드 도플갱어처럼 행동하는 루카스.
패배자 놈들은 루카스보다 약했을 뿐이다.
저 전술의 파훼법은 그저 루카스보다 강했으면 되는 일.
그저 만년 낙재생 루카스에게 패배한 것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모두 선생님 덕분이에요.”
“그 소린 저 녀석부터 이기고 해라.”
루카스와의 대련을 준비하는 기세등등한 버터 새끼.
지금까지는 수준이 떨어지는 놈들과 붙은 것이고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겠지.
네 놈을 위한 특별한 손님이 있다.
“루카스 웨인과 마르셀 뒤프레는 시험을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마침내 부딪히는 두 사람.
멋모르고 나가려는 루카스를 뒤에서 붙잡고는 승리의 주문을 외쳐준다.
“리차드. 저 새끼가 말하길 너는 되다 만 것이라던데?”
움찔.
머리에서 미약한 스팀이 올라오고 머리카락 끝은 점점 붉어져 온다.
녀석이 완전히 변하기 전에 등을 밀어 대련장으로 옮겨 놓는다.
“루카스 웨인, 마르셀 뒤프레 모두 시합 준비.”
내가 리차드를 화나게 만들었다.
나는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
“루카스 웨인, 괜찮은 겁니까?”
얼굴이 시뻘개진 루카스의 상태를 확인하는 감독관.
이제 루카스가 아니라 리차드다.
“긴장해서 그런 겁니다. 진행하셔도 좋습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감독관에게 시합의 진행을 재촉한다.
이윽고 대련 시험이 시작된다.
“그럼 대련 시험 시작!”
“루카스 이 덜떨어진 녀석! 너는 챔피언의 수치다!”
시작하자마자 도발을 퍼붓는 마르셀 놈.
말하는 꼬라지를 보니 저놈의 적개심은 챔피언으로 선정된 루카스에 대한 질투였군.
챔피언으로 선정된 루카스가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자 자신이 챔피언이었으면
쉽게 통과했을 거라는 망상을 했을 것이다.
녀석의 말이 결정타를 먹인 건지 리차드가 불려 나온다.
상의는 진작 열기로 녹여버린 리차드.
맨손으로 무작정 달려들던 나와의 첫 만남과는 달리 등에 멘 연습용 창을 꼬나쥐는 녀석.
붉은 장발에 가려져 있던 진홍색 눈알은 상대방을 꼬나본다.
“뭐, 뭐야…넌 누구야!”
녀석의 흉악한 모습에 살짝 질린 듯 리차드의 정체를 물어보는 칼잽이 녀석.
이미 울고불고해도 늦었다.
이 손 설리번 선생님이 직접 가르친 리차드 켈러의 등장이다.
흐흐흐
나에게 배운 이후로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법만 늘어난 리차드.
이미 기세 싸움에선 진 먹잇감을 향해 실소를 흘린다.
“나 리차드.”
루카스가 테크니컬한 타입이라면 리차드는 힘의 논리를 따르는 타입.
단단히 성난 투견이 상대방을 향해 단순한 찌르기를 지른다.
어떤 기술도 첨가되지 않은 그저 단순한 찌르기.
슈욱!
파공음을 내지르며 상대를 향해 찔러 들어가는 연습용 무기.
저 창은 저놈이 썼기에 일합도 못 견딜 거다.
“크악!”
검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이내 뒤로 튕겨 나가는 버터 녀석.
자기가 무슨 챔피언인 줄 아나 봐.
연습용 창은 애처롭게 단 일합만에 박살 나 버렸다.
하지만 마르셀 놈의 검 또한 반파된 상황.
“너무 나약하다.”
터벅터벅 쓰러진 놈을 향해 걸어가는 리차드.
“롤랑이시여!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힘을!”
반쯤 남은 검으로 애처롭게 성좌를 찾는 녀석.
자신에게 남은 모든 신성을 쏟아부어 빛나는 검날을 만들어 낸다.
나름 뒷배가 든든한 놈이었지만 시합 상대가 좋지 않았다.
그런 놈을 흥미로운 눈으로 기다리는 리차드.
마지막 발악을 구경하고 싶나 보다.
리차드의 가슴팍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놈.
그걸 피하지 않고 그냥 마주하는 무식한 리차드 새끼.
상남자특.
오는 공격은 피하지 않는다.
“나는 말했다. 너는 약해.”
담담하게 맨 가슴팍만으로 검기 비스무리한 빛의 검을 막아낸 상남자 녀석.
그저 생채기만 생겼을 뿐 치명타를 허용하지 않는다.
녀석의 머리를 움켜쥔 뒤 들어 올리는 리차드.
워낙 기세가 흉흉했을까 놈의 스승 브뤼노가 시합에 개입하려 한다.
그러면 안 되지.
“죽이진 않을 테니 가만히 있어.”
축지로 그의 앞에 도달한 내가 앞을 막아선다.
“이미 결과가 뻔한 상황입니다. 챔피언, 명예라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을 책임지는 것이 기사의 명예 아닐까?”
“…”
그 사이 리차드 녀석이 처형식을 진행해버렸다.
콰앙!
그대로 상대방을 시험장 바닥에 찍어 누른다.
살아는 있는지 움찔움찔하는 패배자 녀석.
“감독관. 결과가 나온 거 같습니다만.”
“…승자는 루카스 웨인!”
정확히는 리차드 웨인이지.
나이츠 헤븐의 견습기사를 맨 손으로 박살 내버린 리차드.
이 모습에 질린 건지 아니면 리차드의 모습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걱정한 건지
다음 상대방들이 빠른 기권을 신청했기 때문에 루카스의 장수생 생활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 . . . .
“소감이 어때?”
“그러면 안 되는 거지만, 사실 리차드가 싸우는 모습을 봤을 때는 통쾌했어요 하하.”
오늘 도착한 히어로 자격증을 든 채로 시험 소감을 말하는 루카스.
리차드에게 사냥당한 마르셀이란 놈은 얼굴이 곤죽이 난 것은 물론 치아가 다 박살이 났다.
아마 재활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에 당분간은 시험은 꿈도 못 꿀 것이다.
나이츠 헤븐은 이 일로 나에게 반감을 품을 테지만
꼬우면 한국으로 와서 그놈의 결투나 신청하던가.
아아, 순수했던 소년은 안녕.
이 정도면 정말 가르칠 것은 다 가르쳤다.
어디 가서 호구는 잡히지 않을 것이다.
“다 컸네, 다 컸어.”
쿠 훌린께 기아스의 새로운 활용법도 배웠겠다, 이제는 정말로 돌아갈 시간.
“너는 날아다닐 수단도 없을 텐데 당분간은 못 보겠네.”
“선생님처럼 한국까지 걸어서 가 볼까요?”
강림파 챔피언이 아무 의미도 없는 고행을 걷겠다고 하는 건가 지금?
그것도 단순히 지인 얼굴 한 번 보려고?
“뇌도 리차드를 닮아가냐?”
“하하하!”
내가 필살기 하나 배우려고 애 하나를 완전히 망쳐 놓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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