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스승과 제자
* * *
“흠…”
기아스라.
까마득한 선배들이라고 볼 수 있는 켈트 신화 속 초인들의 힘의 원천.
자신과의 맹세, 신과의 맹세, 힘의 맹세.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몸에 저주 비슷한 제약을 건다.
그 대가로 맹세를 지키는 동안엔 막대한 힘을 얻게 되지만 맹세를 어기는 순간
그에 상응하는 페널티를 입게 된다.
나와 대화하고 있는 성좌만 해도 그 기아스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그 어떤 맹세라도 가능합니까?”
<조건이 까다로울수록="" 더="" 강한="" 힘이="" 부여될="" 것이네.=""/>
“평생 성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만두게 챔피언!="" 대체="" 얼마나="" 강한="" 힘을="" 원하길래="" 그러는="" 건가!=""/>
무지막지한 내 말에 화들짝 놀라 나를 만류하는 성좌.
호오, 이 정도 수준은 상급 제약에 해당한다 이 말인가.
“하하,그냥 해본 말이죠. 아직 맹세를 거는 방법도 모릅니다.”
<말에는 힘이="" 있다네,="" 뱉은="" 순간부터는="" 되돌릴="" 수="" 없지.="" 그러니="" 항상="" 조심하게.=""/>
중국 쪽 히어로 단체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현세 지옥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대중들을 구원하는 스님들이 이러한 제약을 걸어 강해진다고 하는 소문이 있다.
성좌도 기겁하는 제약을 걸어버린 스님들은 얼마나 강할까.
“성좌께서는 왜 그런 맹세를 거신 겁니까?”
<본인이 내건="" 맹세들은="" 나를="" 있게="" 하는="" 언약="" 그="" 자체였지.=""/>
빛의 왕자 쿠 훌린.
어릴 적 이름은 세탄타.
자신이 죽인 번견의 주인, 대장장이 쿨란의 사냥개를 자처한 순간부터 부여받은 새로운 이름.
형제처럼 같이 자란 개들을 먹을 수 없다고 맹세한 첫 번째 기아스.
그리고 자신의 핏줄에 대한 자부심.
광명의 신 루 라바다의 핏줄을 이은 고귀한 혈통.
모든 인간들의 대접을 거절하지 않겠다는 영웅의 자부심은 두 번째 기아스가 되었다.
“자기 삶과 관련된 맹약을 하게 되는 순간 더 강한 힘을 받는군요.”
고민이 깊어진다.
기아스라는 힘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나를 파멸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렇기에 성좌와 같이 상시 적용되는 맹세는 가장 위험한 맹세다.
정말 중요한 순간에 힘을 폭발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맹세를 해야 한다.
“뭐 지금 고민해봤자 의미 없네요. 우선 기아스를 사용하는 법부터 배웁시다.”
<심장에 제약을="" 거는="" 행위를="" 떠올리게.="" 본인은="" 가시덩굴로="" 심장을="" 감쌌지.=""/>
성좌는 자신이 아끼던 무기 게 볼그의 가시로 심장을 감싼 건가.
기아스를 어겼을 때 가시가 심장을 쥐어짰을 텐데 그 고통은 상상하기도 싫다.
바닥에 털썩 앉은 뒤 자세를 잡고 눈을 감아 심상 세계에 돌입한다.
무(無), 우주, 지구 그리고 나.
거대한 공허에서부터 인간의 몸속까지 빠져든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내 몸을 지탱하고 있는 심장이 펌프질하는 것이 보인다.
촤르륵
심장을 향해 스멀스멀 올라오는 철뱀의 무리.
이내 쇠사슬은 내 심장을 포박한 뒤 꽉 옥죄기 시작한다.
쿨럭!
심상 세계에서 나오자마자 피를 토해낸다.
“우웩…준비 단계에 들어섰을 뿐인데 이 정도입니까.”
<그만큼 위험한="" 기술이라="" 본인이="" 경고하지="" 않았나.=""/>
머리엔 긴고아, 가슴엔 기아스.
참 지랄맞은 상황이군.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 . . . .
루카스의 수업은 순탄하게 진행 중이다.
내 공격을 방어한 뒤 동일한 강도로 때리는 것을 목표로 연습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단단한 내 신체를 상대로 싸우면서 점점 힘 조절을 배워가는 소년.
“루카스, 힘이 더 들어갔어.”
“네!”
자신의 마창으로 여의봉을 두들기는 루카스를 다그치며 완급조절을 한다.
이제 사람을 때린다는 행위에 거리낌이 사라진 루카스.
내 강박과도 같은 윽박질에 말끝을 흐리는 습관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 정도로 가르쳤으면 초인의 괴력을 조절하는 법만 익히면 된다.
문제는 나머지 한 녀석.
수련을 통해서 리차드의 등장 징조를 알게 되었는데
루카스의 감정이 격해질수록 검은 머리가 점점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수련 중인 지금도 머리끝이 살짝 붉어진 것이 보인다.
“루카스 이제 멈춰.”
“벌써 끝났나요?”
억눌렸던 폭력성이 눈을 뜬 건지 굉장히 아쉬워하는 루카스.
처음 봤을 때의 슈퍼 겁쟁이 루카스는 어디 간 것인가.
“네 공격엔 이제 망설임이 없어. 이 정도면 시험에서 떨어지지 않겠지.”
“감사합니다. 선생님!”
내게 감사를 표하는 루카스. 하지만 벌써 인사를 받기엔 이르다.
“뭔 소리야. 네 수업이 끝이라는 소리지.”
“네?”
“그 녀석을 불러.”
칭찬하자마자 다시 한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슈퍼 겁쟁이 모드로 돌아간 루카스.
루카스인 상태에서는 걱정이 없다.
그러나 만약 시험에서 리차드가 튀어나오게 된다면?
시험에서 리차드가 상대방을 죽이는 순간 루카스는 히어로가 될 수 없다.
그러니 제2의 인격, 리차드 또한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리차드에 대한 트라우마는 어마어마한 모양이다.
자신의 친구를 쉽게 부르지 못하는 겁쟁이 소년.
어쩔 수 없나.
“리차드. 듣고 있는 거 안다.”
“그만두세요! 선생님 제발!”
“네 얘기를 하는데 언제까지 그 속에서 숨어있을 셈이냐?”
“선생님!”
“빨리 나와라 이 무식한 머저리 새끼야.”
내 폭언이 짐승에게 닿았을까?
루카스의 몸에서 열기가 스며 나오기 시작한다.
상체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로 이미 옷은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덩치를 점점 불린다.
머리는 핏물처럼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머리카락도 자라기 시작한다.
루카스가 숨겨 둔 친구.
붉은 장발의 광인이 몸에선 열기를 내뿜으며 완전히 등장한다.
저번에는 기세만 보여주더니 도발 좀 했다고 본격적으로 튀어나오는 투견 녀석.
쿠와아아아아아악!
짐승의 포효를 내뱉는 루카스였던 것, 아니 이제는 리차드다.
“리차드. 내 욕을 알아들었다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얘기일 텐데?”
내 질문은 개무시한 채 내게 솥뚜껑만 한 주먹을 내지르는 녀석.
이 선생님, 정말 슬퍼지려 한다.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하잖아.
퍼억!
리차드의 주먹을 손으로 받아낸다.
손바닥이 저릿저릿한 것을 보니 맨손으로 크립티드를 잡았다는 소리가 이해된다.
“사람한테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지?”
과거 헬렌 켈러의 스승이었던 설리번 선생님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나는 지금부터 손 설리번이다.
맞는다는 걸 모르고 살아온 아이를 위해 손수 알려 줄 시간이다.
파앙!
내 가르침을 받고 저 멀리 날아간 뒤 쓰러지는 리차드.
아아… 이것은 죽빵이라는 것이다.
몸 하나는 튼튼한지 금방 회복해서 일어선다.
“아프다!!! 아파!!!”
“그래, 아프다는 걸 배웠구나. 지금부터 하나씩 배워가는 거야 리차드.”
“너! 죽인다!!!”
한 어절은 넘어가는 대화를 하고 싶은데.
단순한 의사표시로 나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리차드 녀석.
그만큼 이 손 설리번 선생님이 어색하다는 것이겠지.
루카스가 들고 있던 마창 게 볼그는 진작에 내팽개친 지 오래다.
그저 자신의 우월한 신체 능력만을 믿고 싸우려는 못된 습관을 고쳐줄 시간이다.
“리차드. 인간이라면 도구를 써야지. 그렇게 싸우는 것은 짐승들의 방식이야.”
아직도 가르침을 거부하곤 맨몸으로 달려드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인지 이족 보행도 포기한 채 개새끼처럼 뛰어온다.
신체가 변형되면서 튀어나온 것인지 날카로운 손톱을 꺼내 들어 찢어발길 준비를 한다.
“말했잖아. 그렇게 싸우는 것은 인간의 방식이 아니야.”
거리를 벌리며 봉의 이점을 살려 리차드의 공격을 쳐낸다.
그 후 놈의 얼굴을 한 대씩 때리기 시작한다.
이 일방적인 데미지 교환에 화가 잔뜩 난 놈이 마구잡이로 손톱을 휘두르지만
그 공격을 유유히 여의로 쳐내는 내겐 닿지 않는다.
“으아아아아아악!!!”
잔뜩 꼴 받은 리차드가 포효를 내뿜는다.
“우리 다시 한번 죽빵을 배워보자.”
이번에는 주먹이 아니라 여의로 리차드의 얼굴을 후려친다.
또다시 쓰러지는 교육생 리차드.
선생님은 우리 리차드 믿어!
그렇게 몇 번의 반복 학습이 이루어진 뒤, 몸에서 나오는 열기가 줄어드는 녀석.
잔뜩 꼴 받았던 녀석의 머리가 식었나 보다.
“이제 대화를 할 생각이 들더냐?”
“…”
하도 얻어맞아서 양쪽 콧구멍에서 코피를 줄줄 흘리는 리차드.
상남자답게 한쪽 팔로 쓱 코를 훔치더니 피를 닦아내 버린다.
피범벅인 얼굴로 나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이는 미치광이 녀석.
“강자. 인정한다.”
“그거 정말 영광이군. 나를 선생님이라 불러줄 수 있겠니?”
“가르침 원한다. 배운 뒤 내가 너 죽인다.”
“하하하!”
이거 생각 없이 달려드는 개새끼인 줄 알았건만 교활한 늑대 자식이었구만?
장족의 발전에 이 설리번 선생님 울음이 터질 것 같다.
“배울 수 있다면 다 배워가라. 오늘은 이쯤하고 루카스나 불러와.”
“나 기다린다.”
리차드의 체격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붉은 머릿결도 원래의 검은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이내 내가 알고 있던 루카스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소년.
“선생님…몸이랑 얼굴이 욱신욱신 거려요…”
“리차드가 학구열이 뛰어나서 말이야, 당분간은 고생 좀 해야겠다.”
“하아…”
네 친구는 조금 과격해서 힘 조절이 어려워.
견디는 거다 루카스.
녀석이 협조적으로 나오는 이상 루카스의 시험 합격이 머지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