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스승과 제자
* * *
육체를 단련하기 위해 간만에 도술로 불러낸 진 여의금고봉.
물구나무를 선 뒤 발 위에 여의금고봉을 올려 둔 채 푸쉬업을 한다.
고통을 받는 육체가 나를 대신해 눈물을 흘리듯 땀을 뚝뚝 쏟아낸다.
8톤짜리 철봉이 주인을 짓누르며 좀 더 단련하라는 듯 떼쓰기 시작한다.
자신을 언제 자유롭게 사용할 거냐며 칭얼거리는 것 같다.
신체를 강화하는 데 사용되는 신성이 빠르게 줄어드는 것이 느껴진다.
“… 우리 말로 하지 그래?”
웅웅
아직 완벽히 인정 받지 못한 점도 있지만 자기 주관이 강한 유물이다.
고개를 들어 발 위를 보니 기존의 철봉 형태에서 은근슬쩍 크기도 늘린 것이 보인다.
자기 주인을 혹독하게 몰아붙이는 성좌의 유물.
성좌나 유물이나 나에게 가혹하다는 점은 똑같다.
난 인간 태생이라 망나니 같던 전주인처럼 너의 장단에 맞춰 줄 수 없어.
신성을 담은 그릇의 바닥이 보일 때 즈음 유물을 발로 밀어 내팽개친다.
쿠웅!!!
자신을 내팽개친 것에 반항하듯 크기를 줄이지도 않고 연무장 바닥에 떨어지는 망나니 여의봉.
8톤의 여의봉을 온전하게 받아내기엔 연무장의 바닥은 너무 연약하다.
“아오! 너 이 바닥이 얼마짜리인 줄 알고 지금!”
우우우웅
내 살다 살다 자식의 사춘기도 아닌 의지가 있는 철봉의 사춘기를 겪어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후우…”
혼자서 비라도 뒤집어쓴 듯이 상의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다.
윗옷을 벗은 뒤 우리 고생한 여의봉에게 다가가 꽈악 비틀어 짜낸다.
내가 흘린 짭짤한 눈물로 촉촉해지는 여의봉.
슈욱!
염분을 싫어하는지 자기 멋대로 길이를 늘여 주인을 밀쳐내려 한다.
나를 엄습하는 이 8톤의 질량 무기.
도술 프렌드 실드.
분신을 소환해 나와 분신의 자리를 교체해 버린다.
내가 있던 자리에 생성되는 나의 분신.
“본…”
콰앙!!!
화가 잔뜩 난 질량 무기가 분신이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가며 기어코 연무장 벽을 박살 내 버린다.
본체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역소환 되는 분신 녀석.
다시 부르기 전까지 나무아미타불 하시길.
“내가 이겼다.”
성질이 난 유물이 나를 덮치기 전에 재빨리 되돌려 버린다.
자신이 있던 우주 공간으로 되돌아가는 여의봉.
한동안 부르면 안 될 것 같다.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지금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방법은
원본 여의를 자유롭게 다루는 것 말고는 없다.
성좌의 무기였던 여의금고봉.
대인전부터 다인전, 거대한 요괴까지 전부 도륙을 냈던 무기.
성좌께서 투전승불, 싸움의 부처라는 명함을 얻기까지 지대한 공헌을 한 성좌의 유물이다.
이놈이 자부심은 어마어마해서 기존의 주인보다 스펙이 떨어지는 나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1만 3천 5백 근의 여의봉은 현재 내 능력이라면 무리 좀 한다면 다룰 순 있다.
하지만 이 모습은 기본 1형태일 뿐, 2형태, 3형태의 모습을 견디지 못하는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스승님, 뭐 좋은 방법 없습니까?”
미우나 고우나 답이 보이지 않을 때는 그래도 스승밖에 없지.
이 불초자식을 위해 무언가 해답을 내려주지 않을까.
<네 놈이="" 약한="" 것을="" 왜="" 내게=""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이냐.=""/>
“그렇다고 이 나이에 천축행을 다시 갈 순 없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몸에 있는 흉터들이 증명해 준다.
웃통을 벗은 지금 내 몸에 보이는 수많은 싸움의 흔적들.
온갖 요괴와 괴수가 넘쳐나는 크립티드의 땅 중국을 건너는 일은 고행 그 자체였다.
우리 성좌가 천축기행을 통해 정신적 성장을 이루었다면
내 경우는 미숙하고 어리석은 히어로가 끊임없는 전투를 통해 육체적 성장을 이룬 것이다.
아마 석가의 챔피언, 법사님과 두 후배 녀석들에게 다시 가자고 제안한다면
후배 녀석들은 물론 석가의 챔피언마저 욕지기를 내뱉을지도 모른다.
“위기의 순간에 쓸 수 있는 그런 기술 없습니까?”
<흥. 그런="" 기술이="" 대체="" 왜="" 필요한="" 것인지.=""/>
우리 성좌께선 공감 능력이 상당히 부족하시다.
나도 말이야, 돌 원숭이로 태어나 이것저것 몸에 좋은 것을 다 주워 먹고 살았으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겠죠.
위험한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려면 노력할 수밖에 없다.
<영웅 출신="" 성좌에게="" 가봐라,="" 인간으로="" 태어났던="" 그라면="" 해답이있겠지.=""/>
“누구를 찾아가야 합니까? ”
<사냥개 녀석.=""/>
“그렇게 말하면 제가 어떻게 압니까? 괜히 있어 보이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아아악!”
쓸데없는 한마디를 내뱉었다가 강력한 두피 마사지를 받았다.
. . . . .
쿨란의 사냥개.
빛의 왕자.
광명신 루 라바다의 적장자.
그림자 마녀 스카하크의 수제자.
켈트 신화의 영웅, 얼스터의 상징 쿠 훌린은 오늘도 고민에 시달린다.
자신의 제자, 루카스 때문이다.
본인이 고른 아이인 만큼 재능은 차고 넘치지만 심약한 성질이 문제다.
성좌의 챔피언으로 점 찍어 놓은 아이인데 소심하고 수줍은 성격 탓에 싸우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때문인지 히어로 자격시험에서 번번이 떨어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신체 능력 테스트는 아무런 문제 없이 통과하지만 대련 시험이 말썽이다.
자신보다 약한 이들에게 벌벌 떨다가 득점도 못 한 채 떨어지는 것이다.
벌써 탈락의 고배를 마신 것이 대체 몇 번째인가.
쿠 훌린 본인이 스승이지만 성좌이기 때문에 현실에 개입할 수 없다.
말로 가르치는 데엔 제약이 있어서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때 다른 성좌의 챔피언이 쿠 훌린을 찾아왔다.
“초면에 실례지만 기술 하나만 배워 갑시다.”
루카스와는 달리 정 반대편에 있는 인간이 말이다.
. . . . .
얼스터의 영웅, 빛의 성좌가 내건 조건은 굉장히 황당하였다.
자신의 제자가 히어로 시험에 통과할 때까지 후견인 역을 맡아 줄 것.
요즘 성좌는 방송도 보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이렇게 제자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는데 한가롭게 내 방송이나 볼 리가 없지.
그동안의 사정을 들어 보니 능력이 뛰어난 아이가 특유의 소심함 때문에 계속해서 시험에 낙방한다는 모양이다.
그게 말이 되나? 얼마나 호승심이 없길래 그만큼 떨어졌는데 싸움을 싫어하는 걸까.
시험에 계속 떨어지면 그 모멸감으로 없던 성질도 생길 것 같은데.
“그래서 네가 루카스냐?”
혈기 없는 새하얀 피부색에 검은 머리의 소년.
딱 봐도 패기 없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쿠 훌린의 예비 챔피언.
“대답!”
“네,넵!”
갑작스러운 내 요청에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녀석.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이 녀석을 보고 있으면 빛의 성좌의 안목이 급격하게 의심스러워진다.
“성좌께 얘기는 들었고?”
“네.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제 후견인이 되어 주신다고…”
“나만 노력한다고 시험에 통과할 수는 없어. 달라질 자신은 있고?”
“그건…”
고놈 참,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 끝머리를 늘이는 게 참 답답하다.
정말 일말의 호승심도 없는지 한번 시험해 봐야겠어.
“야. 자신 없으면 때려치워 그냥.”
돌변한 내 태도를 마주하자 동공이 흔들리는 루카스.
아직까진 급격한 변화가 없다.
“성좌 망신시키지 말고 그냥 그만두라고. 창피하지도 않아?”
이제는 눈망울이 촉촉해지더니 눈물까지 흘리려 한다.
얼스터의 영웅이 선택한 아이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면 어서 보여다오.
“쿠 훌린께서도 내심 다른 아이를 원하고 있지 않을까? 아아, 내 선택을 되돌리고 싶구나 하면서 말이야.”
엄청난 폭언에 내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 루카스.
성좌는 쉽게 하지 못할 막말을 녀석에게 퍼붓는다.
보여라. 너의 숨겨진 재능을.
아직 고개를 숙이고 있는 루카스.
그 순간
루카스의 기세가 달라진다.
아니 이걸 루카스라 부를 수 있을까?
“누구냐 너?”
이 어린 소년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투견과도 같다.
소심하고 겁 많은 루카스는 이곳에 없다.
이놈의 정체는 대체 뭘까.
나를 향해 이를 드러낸 채 으르렁거리는 투견.
이내 종적을 감추고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
다시 루카스로 돌아온 상황인가.
“리차드는 화를 잘 내서 함부로 부르면 안 돼요…”
이제야 돌아온 소심한 루카스.
훌쩍이면서 내게 조심스러운 조언을 해 준다.
“아까 그놈이 리차드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루카스.
이것 참 재밌는 경우다. 한 몸에 두 명의 인격이 공존하는 상황이라니.
“시험을 리차드에게 맡겨버리는 건 어때?”
“안 돼요… 리차드는 너무 폭력적이라 사람들이 위험해요.”
한 명은 소심한 성격에 사람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는 겁쟁이.
다른 한 명은 야생 들개와 같은 사나운 성질을 지닌 투견.
이 정도면 루카스가 몸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근데 너 성격은 그렇다 치고, 싸울 줄은 아냐?”
“네…”
“말로만 그러는 건 아니고?”
“스승님께 배운 기술들은 항상 연습하고 있어요.”
말로는 무엇을 못 할까.
이 기이한 소년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경험해 볼 시간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랑 대화할 때는 정확하게 대답해.”
“네…”
“대답.”
“넵!”
빛의 왕자 쿠 훌린에게 기술 하나 배우고자 왔건만 그의 제자루카스의 갈 길이 더 멀어 보인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루카스의 성장이 보일 때마다 성좌에게 기술의 노하우를 빼먹어야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