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깐프가 방송을 잘함
* * *
엘레나는 무턱대고 손우진의 집에 들어왔지만, 손우진의 태도를 보면
당분간은 정말 컴퓨터에 걸려있는 제한을 풀어주지 않을 것 같다.
지구의 인터넷은 재밌는 글 투성이인데 이걸 왜 못 보게 하는 거지?
거실에 드러누운 엘레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엘프 마을에 있는 컴퓨터에는 이상한 제한이 걸려있지만
손우진 본인의 집에는 당연히 제한을 걸었을 리가 없지.
마침 집의 주인도 피곤하다며 쉬러 간 상황.
절호의 기회이다.
숲 속의 파수꾼 종족의 특성을 살려 발걸음을 죽인 채 살금살금 방문으로 향한다.
손우진이 들어간 방을 제외하고 하나둘 방문을 열어보는 은밀한 깐프.
찾았다.
손우진의 방송부스로 스르르 잠입하는 깐프 한 명.
자신의 방과는 달리 모니터와 본체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두 개씩 놓여있다.
혼자 사는데 왜 컴퓨터는 두 개를 갖다 놓은 거지?
주위에 여러 가지 전자기기들이 있지만 뭐 어때, 컴퓨터만 할 수 있다면 그만 아닌가.
살포시 문을 닫은 뒤 컴퓨터 전원을 켜는 엘레나.
집에만 박혀있던 손우진은 최근 여러 가지 일에 휩쓸려 자주 외출한 상태이니
쉽게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은 마음껏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 무단 침입자가 컴퓨터를 켜자 마주한 것은 4자리 pin 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창.
“아앗!”
아니, 혼자 사는데 왜 비밀번호를 걸어두신 건가요!
집에 들어올 사람도 없으면서!
자신이 침입한 것은 뒷전으로 밀어두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애꿎은 손우진을 탓하는 깐프.
머리를 굴려 비밀번호를 유추해보는 침입자 깐프 엘레나.
임시방편으로 손우진의 생일을 입력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내가 우진님이 되었다고 생각해보는 거야 엘레나.
컴퓨터를 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두뇌를 풀가동 하는 깐프.
만사를 귀찮아하는 손우진이 그렇게 복잡한 비밀번호를 걸었을 리가 없다.
단순한 생각으로 접근하는 거야.
0000
틀린 비밀번호입니다.
1111
틀린 비밀번호입니다.
1234
환영합니다 user01 님!
“후흡...”
행여나 손우진이 깰까 봐 조용히 소리죽여 웃는 엘레나.
도대체 이럴 거면 비밀번호는 왜 걸어두는 건가요.
바탕화면에 들어서자마자 화면에 다양한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켜진다.
“이건 대체 뭘까요?”
송출용 방송 프로그램을 들여다보아도 인터넷에만 중독된 깐프가 알 리가 있나.
관심을 두는 시간도 아까운지 이내 관심을 꺼버리고 인터넷에 접속한다.
할 일이 정말 많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커뮤니티 유머글 웹툰 미튜브 영상들.
짧은 시간 내에 합리적으로 소비해야 한다.
그렇게 혼자 인터넷에 심취한 엘레나를 찍고 있는 카메라.
파란 불빛을 빛내면서 이 인터넷 중독 깐프를 유유히 찍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 모습을 지켜보는 시청자들.
오래간만에 원숭이가 방송을 켰다는 알림을 보고 손우진의 채널에 기어들어 왔지만
자신들의 성격 더러운 방장은 어디 가고 아름다운 여성 엘프 혼자 모니터를 보면서 웃고 있는 것일까.
[뭐야 손우진 해킹당함?]
[이게 그 버튜버인지 뭔지 그거냐?]
[원숭이 새끼 그런 취미 있었음?]
[실존 인물 같은데]
[화과산에 엘프들이 산다고 그러지 않았냐]
[근데 이분 방장 방송에 뭐함 ㅋㅋ]
뭐가 그리 웃긴 건지 자신을 두고 떠드는 시청자들은 뒷전으로 한 채
혼자서 커뮤니티에 중독되어 인터넷에 빠져든 엘레나.
한동안 이상한 프로그램 때문에 인터넷을 금지당한 엘레나는
금단 현상을 일으키는 듯 쉴 틈도 없이 정보의 바다를 헤매는 중이라
시청자들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닿지 않는다.
[거 같이 좀 봅시다]
[근데 사실 궁금하진 않아 ㅋㅋㅋ]
[ㄹㅇㅋㅋ 걍 이 눈나만 봐도 됨]
[채팅 언제 읽어 보냐]
[방송 켜진 줄도 모르는 것 같은데]
이 일방통행의 방송 진행이 슬슬 답답해졌는지 엘프의 관심을 바라는 시청자들.
엘프의 관심을 끌고자 결국 누군가 나서서 후원을 통해서 자신들의 존재를 어필하기 시작한다.
엘프누나채팅좀읽어 님이 10,000원 후원!
[저기요 방송 혼자 하지 말고 소통 좀 합시다]
“응앗!”
아무도 없는 방에서 전자음의 여성 목소리가 나오니 깜짝 놀라는 엘레나.
혹여나 잠자는 손우진이 들을까 급히 입을 막는다.
[응앗 ㅋㅋㅋㅋㅋ]
[존나 귀엽다 ㅋㅋㅋㅋ]
[커여워 엘프눈나]
“뭐야 이거? 누구세요?”
화면을 둘러보니 방송용 채팅창이 켜져 있는 것이 보인다.
스크롤을 올려 하나하나 확인해 보니 익숙한 이 채팅들.
손우진의 방송에 출몰하는 악동들이 아닌가.
“여러분, 방송 언제부터 틀어져 있었는지 아시나요?”
[처음부터요]
[30분은 진행한 듯]
[혼자 뭘 보고 그리 웃으십니까]
[이제야 여길 보는구나]
엘레나의 정신이 아찔해진다.
나 이상한 짓 하진 않았나? 방송이 왜 자동으로 켜진 거야?
내가 보던 인터넷 창도 본 건가? 이거 지금 꺼야 하나?
“저기... 이게 왜 자동으로 틀어졌을까요?”
[그걸 우리한테 물어봐도...]
[지금 손우진 집이세요?]
[송출용 컴퓨터 키신 거 아니에요?]
[이새끼들 ㅈㄴ 친절한 거 봐라 ㅋㅋㅋ]
[고아단 가면 어디다 숨겼냐 새끼들아]
송출용 컴퓨터?
아, 이제야 엘레나는 눈치챘다. 자신이 전원을 켠 컴퓨터는 손우진이 방송할 때 사용하는 송출용 컴퓨터였고, 그 옆에 있는 컴퓨터는 개인 PC였구나.
송출용 컴퓨터를 켜는 일은 방송을 할 때 뿐이므로 자동으로 방송 프로그램이 틀어지게 설정해 놓았던 손우진의 게으름이 이런 참사를 일으켰다.
“이거 지금이라도 꺼야겠죠? 몰래 하는 컴퓨터라서 들킬 텐데...”
아직도 손우진이 깰까 봐 두려운지 소곤소곤 얘기하는 엘레나.
[ ㅜㅑ ASMR 먼데]
[눈나 헤으으응]
[그냥 계속 방송해요]
[나이가 몇 갠데 몰컴 ㅋㅋㅋㅋ]
“계속하면 혼날 거에요...”
망설이는 엘프를 향해서 계속해서 속삭이는 고아단.
성격 더러운 방장을 볼 바엔 이 아름다운 엘프가 진행하는 방송을 보는 것이 더 낫다.
계속해서 칭찬과 유혹을 통해서 엘프를 꼬드긴다.
[방송 유망주 같은데요 엘프누나]
[ㄹㅇ 방송 소질 좀 있음]
[손우진보다 재밌어요 계속해줘잉]
[절대 방송 계속해]
손우진에게 저지른 패악질의 가면을 숨긴 채 깨끗한 채팅을 유지하는 고아단.
고아단의 패악질은 엘레나도 얼추 알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칭찬에 경계가 풀어진다.
“정말 안 되는데, 조금만 하다 갈게요?”
[어휴 편하실때로]
[엘프눈나 그녀는 신인가?]
[ㅋㅋㅋㅋㅋㅋㅋ 가증스러운 새끼들]
[쉿]
. . . . .
“그래서 이것들이 계속 말을 걸었다고?”
“저는 어쩔 수 없었다고요!”
당당하게 변명하는 깐프 녀석.
너를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와 이걸 우리탓으로 돌린다고?]
[제 잘못은 아닌듯함 ㅋㅋ]
[난 아님 ㅋㅋ]
[나도 아님 ㅋㅋ]
피해자만 존재하는 이 상황을 내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몰래 컴퓨터를 하다가 방송을 틀어버린 깐프와 그걸 또 좋다고 받아준 악질놈들.
일어나자마자 어질어질한 상황이 나를 반긴다.
“좋았냐?”
쉴 새 없이 올라오는 채팅들.
엘레나를 고정으로 섭외해야 한다는 등, 너는 그만 나와도 좋다, 채널을 물려줘라.
악담을 쏟아붓는 녀석들.
“참나, 진짜 어이가 없네.”
옆에서 눈치만 살피고 있는 이 깐프에게 물어본다.
혹시 엘레나는 엄청난 방송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닐까.
“대체 방송을 어떻게 했길래 이놈들 충성심을 단번에 쌓아 올린 거야?”
“글쎄요, 뭘 했냐고 물어보셔도 그냥 물어보시는 질문에만 대답해 드렸을 뿐인데요...”
“너에 대해서 전부 털어놨어?”
“아니요? 그냥 이름이랑 사는 곳, 고향에 대해서 말했을 뿐이에요.”
그게 전부잖아 이 멍청아!
이 녀석들, 방송을 끄거나 다시보기를 지운다 해도 이미 인터넷에는
엘레나에 대한 정보는 진작에 퍼져있을 것이다.
그럴 바엔 미리 으름장을 놓아야 한다.
“뭐 혹여나 말하는데, 방송을 본 뒤 엘레나를 보고 싶으면 화과산으로 오세요.”
[당장 간다 딱 대라 ㅋㅋㅋ]
[원숭이가 어쩐 일로 저러지]
[진짜루 간다?]
[엘프눈나 팬미팅 하는거야?]
“대신 이놈의 허락을 받은 사람만 만날 수 있을걸.”
지금쯤이면 히어로 협회가 업로드 했겠지.
히어로의 전투 영상을 모아둔 미튜브에 들어가서 손우진을 검색한다.
손우진, 그리스, 크립티드 전투 영상.
여기 있네.
그리스에서 있던 일을 공중에서 촬영한 영상을 틀어준다.
백개의 머리 라돈과 그에 맞서는 하예은과 나.
공중에서 내리는 강철비, 라돈의 헌드레드 브레스.
역린을 맞아 도시를 파괴하는 용.
“얘가 이번에 그리스에서 데려온 새로운 자택 경비원인데, 이름은 라돈이야.”
말이 없어지는 채팅창.
“아무래도 내가 없을 때 보안이 불안하기도 해서 데려왔거든? 엘레나를 만나러 왔다고 한번 물어봐.”
[경비원 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말은 통하냐고 야발련아]
[진짜 개미친놈이네 이게 지금 서울에 있다고?]
[히어로 협회는 뭐하는 거야]
“어허, 정식으로 인정받았거든? 협회에서도 키워도 좋다고 했거든.”
엘레나를 직접 보고 싶으면 라돈과 상의하라는 엄포를 놓은 후 방송을 끄려고 했지만 여기서 껐다간 오히려 더 궁금해서 파고들 놈들이다.
적당히 놀아준 다음에 방송을 꺼야겠지.
의도치 않게 방송을 시작한 이래로 첫 합방 파트너는 화과산 깐프 엘레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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