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깐프가 방송을 잘함
* * *
꾸역꾸역 버티고 있지만 점점 붕괴해 가는 김승연의 육체.
“보고 계신 거 다 압니다.”
천상의 성좌에게 말을 걸어 보지만 한때 자신의 혈육과도 같던
아이의 끝이 이리 비참하니 애통한 마음에 말이 없는 천사.
끄으으으윽! 이렇게 죽을 바엔...!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뒤죽박죽인 오염된 신성을 끌어올리는 놈.
혼자 죽을 바엔 자폭해서 다 같이 끌고 가겠다는 거냐.
뒤를 돌아보니 분신 녀석은 이미 역장을 치고 안소정의 앞을 지키고 있고
안소정은 기도 주문을 중얼거리고 있다.
“끝까지 못난 녀석이네.”
다시 한 번 팔극의 기운을 끌어 올린 뒤 발을 들어 올려 대지를 찍어 누른다.
내 발밑으로 생겨나는 팔괘진.
불 물 바람 대지 번개의 기운이 사방으로 날뛰기 시작한다.
확실히 끝내주마.
태(?) 건(?) 곤(?)
감(?) 간(?)
리(?) 진(?) 손(?)
이건 스승님한테도 배운 적이 없는 나만의 고유 기술.
너를 위해 사용하니 영광으로 알아라.
손우진 오리지널 팔괘...
그 순간 상황을 지켜보던 천상의 성좌가 이제야 끼어든다.
<그만하거라 아이야.=""/>
“참나, 이제야 오셨군.”
파탄이 날 지경이 돼서야 개입하는 천상의 성좌 미카엘.
성좌가 등장했으니 기운을 흩트려 팔괘진을 지워낸다.
여기서부턴 가정 교육 시간이니 알아서 잘 타일러 자폭을 막겠지.
미카엘...!!!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들었다!!
<다내 잘못이다.="" 너에게="" 헛된="" 희망을="" 불어넣은="" 것="" 같구나,="" 미안하다...=""/>
대체 왜!!! 욕망을 불어넣었으면 능력 또한 같이 주었어야지!
악마가 되어버린 김승연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주르륵 떨어진다.
그건 니가...로 끼어들고 싶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기에 한 번 참는다.
나를 이렇게 만든 신을 원망한다!!! 이 비통스러운 일을 만든 신을 증오한다!!!
결국엔 자신이 섬기던 성좌마저 모욕하는 타락한 성직자 녀석.
놈에게 남아있는 것은 이제 신앙도 믿음도 신성도,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탁한 지옥의 신성과 함께 등장하는 망자들의 팔.
김승연을 저 땅속 너머로 끌고 들어가려 한다.
크에에엑... 놔라!!! 놓으란 말이다!!
<오랜만이군, 형제여.="" 지옥에="" 걸맞은="" 인재를="" 잘="" 키워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더러운 지옥의="" 배반자="" 녀석...!=""/>
성좌의 신성이 대립한다.
빛과 어둠이 서로 힘 싸움을 하듯 강력한 기운을 내뿜는 두 성좌.
<기회만 제공했을="" 뿐이다.="" 인간은="" 항상="" 스스로="" 선택할="" 뿐이지.=""/>
타락한 성직자와 천상의 성좌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즐거워하는 지옥의 주인.
아아아아아악!! 저주한다 미카엘!!! 손우진!!!
발악하는 악마를 망자들이 끌고 가지 못하자 등장하는 대악마의 손아귀.
녀석을 쥐어 잡은 채 저 심연 끝으로 사라진다.
타락한 성직자의 끝은 지옥으로 끌려가는 비극으로 끝났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당신께서 알던 김승연은 이제 없을 겁니다.”
지옥의 성좌가 정성을 들여 타락시킨 성직자를 그대로 두진 않을 것이다.
녀석의 복수심과 절망을 자극하여 새로운 존재로 탄생시키겠지.
결국 이번 사건은 뒷맛이 씁쓸한 채로 종결되었다.
실종된 교인들은 결국 김승연의 욕망에 희생된 지 오래였고,
심지어 일반인들까지 휘말린 사건이 되었다.
미카엘은 이번 일로 상심이 컸는지 교단의 성좌에서 물러나기로 했고
당분간은 대천사 가브리엘이 유일교 교단을 대신 이끌어 가기로 했다.
“챔피언님,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놈의 챔피언 소리는 또 시작이냐? 오빠 나 좀 풀어주면 안될까!”
사건이 마무리 되니 다시 체면을 차리는 동생의 태도가 눈꼴시려서급박한 상황에서 안소정이 했던 말을 따라해 본다.
“아이 진짜! 사람이 못돼 먹었어!”
“못돼 먹었어!”
결국 급 낮은 유아기 수준의 싸움으로 내려간 남매 간 싸움.
여동생과 오빠의 싸움은 항상 이런 식이다.
“빨리 가기나 해!”
“잘 지내고, 필요한 일 있으면 가급적 연락 하지 마.”
“빨리 가라고!”
떠나기 전 동생의 머리를 잔뜩 쓰다듬어 준 뒤 욕을 얻어 먹는다.
결국 사건의 마지막에 웃은 것은 지옥의 성좌뿐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직면한 타락한 성직자가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지옥의 성좌는 아마 김승연이었던 악마를 자신의 챔피언으로 삼을 것이다.
인간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지옥의 성좌는 언젠가는
다른 성좌들과 대립각을 세우겠지.
그날이 도달했을 때 새로운 존재가 되어 나에 대한 원망이 꺼졌을지
아니면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 . . . .
그리스 출장의 피로가 풀릴 만하자 이어서 들어온 교단 내 실종사건 의뢰.
백 개의 머리를 지닌 용과 타락한 성직자 그리고 악마.
어째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는 상황이 연속되는 느낌이다.
현역에서 물러나니 오히려 더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이번 사건은 결과적으로 내가 개입했기 때문에
상황의 개요 정도를 협회에 보고한 후 다시 집으로 향했다.
교단의 위상을 위해서 깊은 속 사정까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민간인의 피해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항상 즐겁다.
이번 일로 느낀 점이 있다면 역시 집 밖은 위험해.
이번에는 어떤 일에도 말려들지 않을 것이다.
깐프 마을을 거쳐 수렴동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저 멀리 존재감을 과시하는 백 개의 머리를 지닌 용, 라돈.
그 커다란 덩치 위에는 깐프 주니어들이 올라타고 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이 작은 아이들이 뛰어놀아 봤자 느낌도 나지 않는다.」
보초 당번을 서는 라돈의 머리 하나가 대답한다.
위에서 깐프 주니어들이 뛰어놀든 말든 99개의 머리는 여전히 잠에 취한 채로 있는 상황.
수면을 선물 받은 뒤로 성격이 한없이 부드러워진 이 드래곤.
그리스에서 째려보던 그 성격 더러운 파수꾼은 어디 간 걸까.
“그래, 뭐 네가 알아서 관리하겠지. 아이들이 다치지만 않게 해줘.”
「그러지.」
“우진님!”
깐프 마을에서 달려 나오는 은발의 깐프.
“엘레나, 오랜만이네.”
“우진님!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이 녀석, 왜 이리 급하게 뛰어오는지 대강 짐작이 간다.
“컴퓨터, 인터넷이 고장 났어요! 특정 사이트에 접속이 안 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종료되고 있어요!”
“알아.”
당연히 알고 있지.
내가 한 짓인데.
“네?”
당황하는 엘레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준다.
“엘레나, 너의 머리에는 독소가 가득해. 그동안 지구의 인터넷에 오염된
너의 머리에 있는 정보를 빼내야 했어.”
“그, 그만두세요...”
“너의 컴퓨터는 내가 통제하고 있다, 이런 셈이지.”
“그만둬!!!”
내 등에 매달려서 엉엉 우는 깐프를 매달고 수렴동을 향해 올라간다.
“내 컴퓨터 돌려줘잉...”
울음 섞인 목소리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는 깐프.
아직도 깐프 머릿속에 마구니가 가득하군.
그 광경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는 엘레나의 오빠 일레인.
“오빠! 제발 우진님 좀 설득해줘!”
“엘레나, 엘프의품위를 지켜라.”
“이이이익...! 오빠도 똑같은 악당이야! 이 배신자!”
“일레인, 요즘 세계수는 어때?”
울다 못해 이제는 얼굴을 꼬집는 엘레나를 무시하고 일레인에게 안부 인사를 건넨다.
“황금사과나무의 영향인지 어머니 세계수의 기운이 아주 좋아졌다.”
한창 성장기인 세계수가 흡수하는 영양 에너지가 많았던 모양인데
황금사과나무의 기운을 받아 어느 정도 극복한 모양이다. 신목 자매들끼리 잘 지내나 보네.
“그러냐, 그럼 이만 간다.”
“못난 동생 때문에 고생이 많군.”
일레인의 위로 아닌 위로를 들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수렴동, 역시 집이 최고야.
그런데 엘레나 녀석, 아직도 등에 매달린 채 집까지 따라 들어왔다.
“엘레나, 그렇게 애원해도 당분간은 풀어주지 않을 거야.”
볼을 부풀린 채 대꾸도 안 하는 이 깐프 녀석.
그러게 나보고 애새끼맨, 넌씨눈. 모쏠 같은 발언을 하랬나.
“마음대로 해, 난 씻고 잘 거니깐 대충 놀다 가든지 해라.”
욕실로 가기 전 한 가지 더 말을 꺼낸다.
“냉장고에 과일도 있으니깐 배고프면 꺼내 먹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부엌 선반에는 과자도 있고.”
“푸흡...”
어머니처럼 잔소리하는 내 모습이 웃긴 지 실소를 머금는 엘레나.
금세 표정을 재정비 하고 삐졌다는 듯 볼을 부풀린다.
웃는 네 표정 이미 다 봤거든.
그러거나 말거나.
하루의 피로를 욕실에서 싹 씻어낸 뒤 그대로 침대를 향해 몸을 던졌다.
. . . . .
“..냐고요? 아니요 저는...”
몽롱한 상태에서 들려오는 깐프의 미성.
대체 몇 시간이나 잔 거야.
시계를 확인해보니 대략 6시간이 지나 있는 상황.
엘레나가 집에 따라왔었지.
근데 누구랑 대화하는 걸까?
수렴동은 나 아니면 찾을 수 없는 곳이라 내가 동반하지 않는 이상
외부인은 출입할 수도 없는 곳이다.
혼잣말하는 것 같진 않아 보이는데.
트레이닝복을 대충 챙겨 입은 뒤 엘레나를 찾아 나선다.
내 방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게 보인다.
저기는 내 컴퓨터가 있는 곳인데.
아.
큰일 났다.
진짜로.
“엘레나! 너 설마...!”
급하게 문을 열어 봤지만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전원이 켜진 컴퓨터.
모니터에 떠 있는 방송용 프로그램.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
그걸 읽고 답변을 하다가, 방 안으로 들어온 나를 돌아보는 깐프 여성 한 명.
[손우진 표정봐라 ㅋㅋㅋㅋㅋ]
[ㅋㅋㅋㅋ 얼탄 표정 존나 웃기네]
[저새끼 누구임 여기 엘레나눈나 방인데 ㅋㅋ]
[손우진이 잘가고]
[손우진 쳐내! 손우진 쳐내! 손우진 쳐내!]
정신 나갈 것 같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