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장: 대단한 아빠
“지금 너와 결투를 치르는 건 네게 불공평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까 반년 뒤에 나와 결투를 치르자.
이긴 사람이 살고, 진 사람은 죽는 결투다.”
연진 성주가 말을 끝냈다.
두변이 3개월 안에 한 취락을 1천 명 규모로 키우고, 6개월 뒤에 연진 성주와 목숨을 건 결투를 치러야 한다는 의미였다.
실현하기 불가능한 임무들이었다.
지금은 말세다.
새로운 취락을 만든다 해도 몇 년 안에 몇백 명 규모가 되기도 어렵다.
잔인하지만 현실적으로 얘기하자면, 종말이 도래한 지 십여 년이 지난 터라, 살아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살아있다고 해도 대부분 다른 강한 조직에 들어가서 보호를 받고 있을 것이다.
“여귀가 너와 어떤 관계였는지도, 여귀가 어떻게 죽은 건지도 상관없다. 어쨌든 네 덕분에 여귀가 죽은 건 맞으니, 네 딸의 사형을 사면해주겠다. 두 사람은 지금 즉시 난호영 취락으로 떠나라.”
연진 성주가 말했다.
풍엽영 영주 능매가 두 사람과 함께 수십 리 밖의 난호영에 가려고 오토바이에 시동을 거는데, 연진 성주가 영주를 제지했다.
“능매, 너는 갈 수 없다. 풍엽영 취락에서는 이 두 사람에게 어떤 지원도 하면 안 된다. 그게 사람이든, 변이과든, 무기든, 전부 다 안 돼.”
연진 성주의 단호한 말에 두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고민한 뒤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왭니까?”
“오랜 세월 식물인간이었던 허약한 사람에게 아무도 없는 영지를 3개월 안에 1천 명 규모로 키우라고 하질 않나, 반년 뒤에 무공 고수인 나와 결투를 해야 한다고 하질 않나. 누가 들어도 절대로 완수하지 못할 임무라는 걸 아는데, 왜 이런 조건까지 거냐고 묻는 거냐?”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진지하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해내지 못한다면, 난 약속대로 풍엽영을 쓸어버릴 것이고, 결투를 치를 때도 널 봐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너도 죽고 싶지 않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해져라.”
연진 성주가 말했다.
하지만 두변이 또 왜냐고 물었다.
연진 성주가 인내심을 보이며 대답했다.
“넌 특수하거든. 하지만 만약 이 임무들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넌 특수한 사람이 아닌 것이고, 얼마든지 죽여도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연진 성주가 고삐를 쥐고 말 머리를 돌렸다.
“내가 했던 말을 꼭 명심해라, 두변!”
연진 성주가 500명 무사를 데리고 빠르게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두변의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연진 성주는 마지막에 그를 두야가 아닌 두변이라고 불렀다.
오늘 그를 처음 보는 것이지만, 연진 성주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건 뭘 뜻하는 걸까.
영주 능매가 말했다.
“두 선생, 효효, 나도 돕고 싶지만, 정말 미안하게 됐어요.”
두변이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다 이해하니까요. 연진 성주는 어떤 사람입니까?”
“아주 강한 사람이에요. 태강 폐하의 시위대 출신이고, 희로애락이 변덕스러운 사람이죠.”
그 뜻은 즉, 태강 대제는 두변의 존재를 일찍부터 알았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태강 대제가 연진 성주를 통해 뭘 하려는 걸까?
능매가 말했다.
“난호영 취락까지 40리가 넘어요. 아직 해가 지지 않았으니까, 서둘러 떠나는 게 좋을 거예요. 해가 지면, 불사족이 더 많아지거든요.”
두효가 능매를 포옹하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선생님, 또 봬요.”
능매는 자신이 제일 아끼는 제자 두효를 꼭 끌어안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또 보자꾸나. 네 아버지를 잘 보호해드려라. 네 아빠가 정말 정말 특수한 사람일지도 몰라.”
두효가 풍엽영의 전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들 잘 있어요!”
전사들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두효를 바라보았다.
특히 젊은 전사 몇 명은 두효를 몰래 좋아했었는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아련함과 애정이 묻어났다. 효효는 예뻐도 너무 예뻤고, 거기다 놀라운 수준의 무도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젊은 전사들은 효효에게 고백은 못하고, 오랫동안 두효를 짝사랑해왔다.
“아빠, 이제 가요.”
두효가 말했다.
두변과 두효는 배웅하는 사람들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먼 길을 떠났다.
두변은 몇 리 못 가서 체력이 고갈되고 말았다.
식물인간으로 거의 스무 해를 누워있었으니, 위축된 사지 근육이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왔을 리 만무했다.
두변은 두 다리를 움직여서 걷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아빠, 내가 업어줄게요.”
두변이 망설여하자, 두효가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아빠, 내가 예전엔 매일 아빠를 업고 다녔던 거 모르죠?”
그리고는 두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를 번쩍 업은 뒤, 앞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두효는 보기에는 호리호리한 체형이었지만, 힘이 무척 좋아서 두변을 업고도 거의 평소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딸의 등에 업힌 두변은 안쓰러우면서도 강인하고 건강하게 자란 두효가 너무도 대견했다.
해가 지기 전에 난호영에 도착해야 하다 보니, 두효는 두변을 업은 뒤로는 쉬지도 않고 달렸다.
밤이 되면, 강력한 힘을 가진 불사족들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에 말세의 밤은 무척이나 위험했다.
2시간 뒤, 두 사람은 드디어 난호영에 도착했다.
효효는 두변을 등에 업은 채 난호영 취락의 대문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적막만이 가득한 곳이었다.
이곳은 이미 생기가 없는 죽음의 땅이 되어 있었다.
난호영은 종말 전엔 인구가 약 만 명에 달하는 소도시였다.
소도시에는 슈퍼마켓과 술집이 여러 곳 있었고, 4, 5층 높이의 건물이 주를 이뤘다.
10층이 넘어가는 건물도 두 곳이나 있었고, 이곳 근처에 관광지구가 있어서 잘 만들어진 둘레길도 있었다.
이 도시에는 집도 있고, 깨끗한 물도 있고, 비옥한 농토도 있어서, 태강 대제가 이곳을 취락 중 한 곳으로 삼았다.
연진 성주는 1년 동안 천여 명의 인부를 동원해서 난호영에 4천 미터 길이의 높은 벽을 만들었다.
난호영에 사람이 제일 많을 땐 거주민이 7, 800명 정도였는데, 다른 연맹과의 전투 때문에 몇 년 사이 2, 300명을 잃은 데다, 그나마 난호영에 남아있던 500여 명도 엽해당에게 소리소문없이 죽임을 당했다.
난호영은 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산 사람 하나 없는 죽은 땅이 되었고, 이젠 이 땅이 두변과 두효의 영지가 되었다.
두변이 대문을 천천히 열었다.
크아아악!
문이 열리기 무섭게, 십여 마리의 불사족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두변을 향해 달려들었다.
불사족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눈 깜빡할 사이에 두변과 두효의 코앞까지 달려들었다.
불사족은 생김새가 무척이나 징그러웠다.
온몸에 정체 모를 병균이 퍼져있는지, 누구든 불사족에게 할큄을 당하거나 물리기라도 하면 저들 같은 불사족이 되었다.
그래서 종말이 온 뒤로는 시체가 변이할까 봐 시체를 무조건 화장해서 처리했다.
효효는 불사족의 외침을 듣자마자 긴장한 기색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효효 스스로는 혼자서 불사족 십여 마리를 거뜬히 해치울 수 있는 무사지만, 지금은 두변을 등에 업은 상태라 평소처럼 불사족의 공격을 민첩하게 피하지 못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던 불사족들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것들은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두변과 두효 앞에서 몸이 굳었다.
효효가 흠칫 놀랐다가, 재빨리 칼을 휘둘러서 불사족 십여 마리의 목을 잘랐다.
불사족들을 처리한 뒤, 두효가 뛸 듯이 기뻐하면서 말했다.
“아빠, 진짜 대단해요. 이게 바로 엽해당 아줌마가 아빠한테 전수해준 비술인가요?”
두변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효가 해맑게 웃으면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빠 최고.”
두변은 시험 삼아 정신술을 써보았고, 불사족 십여 마리를 고정시키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불사족들에겐 여귀색명이 통하지 않았다. 색명술(索命術)은 사실 사람을 놀라서 죽게 하는 기술인데, 불사족들은 뇌가 이미 변이되어서 마음을 완전히 잃었고, 살육 욕구만 느낄 뿐 두려움이나 무서운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두효가 두변을 등에 업은 채 영지에 남은 불사족을 처리했다.
난호영 부지가 그래도 꽤 넓고, 수백 동 주택이 있던 터라, 두효 혼자서 거리 곳곳과 건물 전체 층을 수색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두변에게는 강한 정신력이 있었다.
그는 정신력을 이용해서 반경 100미터 이내의 모든 생물과 불사족을 찾아냈고, 정확한 위치를 두효에게 알려줬다.
효효의 체력도 제법인 게, 그 호리호리한 몸으로 두변을 업은 채 4시간 동안 영지를 돌면서 불사족들을 처치했다.
효효는 지친 기색 없이 마지막 불사족까지 깔끔하게 해치웠다.
연진 성주가 이곳에 널브러져 있던 500여 구의 시신을 이미 한 곳에 모아서 불태웠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이었다.
“아빠,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죠?”
두효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었다.
두 사람은 영지 안에서 가장 안락해 보이는 집을 골라서 들어갔다.
효효는 개운하게 목욕을 한 뒤, 깨끗한 가죽 전투복을 입었다.
두변도 목욕을 마치고 편안하게 침대에 기대앉았다.
두효는 무척 신이 난 것 같았다.
풍엽영을 떠나게 되긴 했지만, 아빠가 깨어났고, 앞으로 아빠와 쭉 같이 살게 되는 게 많이 설레고 기대됐다.
“아빠, 나 이야기 하나 해주세요.”
효효가 두변의 옆에 엎드려서는 아이처럼 두 발을 흔들흔들 움직였다.
“좋아. 기다려 봐, 아빠가 효효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를 한 번 생각해볼게.”
두변이 눈썹을 으쓱했다.
그는 두효에게 물속에 가라앉은 아틀란티스 문명 이야기를 해줬다. 물론, 그 이야기는 허구의 이야기고 여러 버전의 이야기가 있지만, 두변 스스로가 이런 신비한 문명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된 책을 많이 읽었던 터라, 여러 버전의 이야기들을 잘 짜깁기해서 두효에게 이야기해줬다.
두효가 흥미로운 얼굴로 이야기를 듣더니, 놀라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장 2시간 동안 이야기한 두변은 이제 슬슬 잘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자, 효효가 잘 시간이 됐어. 계속 아빠 이야기 듣고 있다가는 들을수록 재밌어서 잠이 깨.”
두효가 사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효효는 두변의 침대에서 내려온 뒤, 옆 침대로 넘어가서 이불을 덮었다.
몇 분이 지나자, 효효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면서 금세 꿈나라로 갔다.
몇 분 만에 잠든 두효와 달리 두변은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무한한 감정에 휩싸였다.
‘정말 완벽한 딸이네. 용감하고, 건강하고, 강인하고, 정직하고, 결단력까지 있어. 하느님, 제게 이렇게 완벽한 딸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참이 지난 뒤, 두변도 다정한 미소를 띤 채 잠이 들었다.
다음날 동이 틀 무렵, 두변은 밖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에 잠이 깼다.
그의 딸 두효가 아침부터 칼을 들고 무공 수련을 하는 모양이었다.
두변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그의 침상 옆에 깨끗한 물이 담긴 세숫대야와 치약을 짜둔 칫솔이 놓여있었다.
두변은 세숫대야에 손을 넣어보았다.
물은 차가운 냉수가 아니라, 기분 좋게 따뜻한 물이었다.
두변은 딸의 다정함에 또 한 번 감동했다.
그는 양치와 세수를 끝낸 뒤, 마당으로 나가서 딸이 무공 수련하는 걸 구경했다.
두효는 두변이 구경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더욱 힘있게, 그리고 열심히 칼을 휘둘렀다.
그녀는 마당 전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면서 민첩하고, 힘있게 움직였다.
아무리 인간 혈맥에 변이가 있었다고 해도, 두효 나이에 벌써 7급 무사가 됐다는 건 아주 대단한 일이었다.
두변은 두효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단순히 힘과 민첩함만 봤을 때, 이곳의 7급 무사는 대녕 제국 차원의 3품 무사 정도였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현기 내력을 쓰기보단, 물리적인 신체의 힘을 더 많이 쓰는 듯했다.
정확히 말하면 체력에서 나오는 민첩함과 힘이었다.
두변은 연진 성주를 만난 날, 그에게 강한 현기 내력이 있음을 눈치챘고, 이 세상에서 내공을 가질 수 있는 건 아주 소수만의 특권이라는 걸 추측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