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장: 주먹으로
영창제가 비록 재빨리 도망치긴 했지만, 그래도 두변의 기병을 따돌리기엔 턱없이 느렸다.
그의 말이 부홍빙 장군이 이끄는 마혈 기병과 마랑을 어찌 이길까.
영창제를 호위하던 촉왕부 무사들은 이미 말끔히 죽은 후였다.
영창제는 겹겹이 포위된 채 멈춰 섰지만 용포를 입은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말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영창제의 사부인 여 대종사는 어디 갔을까?
그리고 이도진도 어디로 갔을까?
두 사람이 영창제의 시야에 보이진 않았지만, 멀리서 격렬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변이 이쪽으로 다가오자, 영창제가 고개를 치켜들고 호통쳤다.
“두변, 지금 시군(弑君: 섬기던 군주를 죽이다.)을 하려는 것이냐!”
말을 끝낸 그는 주위의 수만 대군을 둘러보았다. 이 수만 대군은 진남공 송결의 병사와 안남 왕국의 군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영창제는 두변이 이 대군을 집어삼키기 위해서 자신과 정의를 논할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은 워낙에 언변이 뛰어났다. 두변이 말싸움하자고 가까이 다가온 건 뭣도 모르고 설치는 짓이었다.
영창제는 자신의 생사가 바로 논쟁 싸움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두변, 네놈이 이미 천윤제를 시해했으니, 황제 한 명을 더 죽이는 건 일도 아니겠지. 시군의 죄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도 아닐 테니 말이다!”
영창제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두변이 천윤제를 죽였다는 건 순전히 영덕 위제가 지어낸 소문이었다.
당시 두변이 환관일 때, 천윤제를 위협해서 영설 공주와의 사혼을 얻어냈고, 첫날밤에 영설 공주를 파렴치하게 추행한 탓에 천윤제가 중풍으로 쓰러져서 생을 마감했다는 소문이었다.
영창제 영충삭은 당연히 이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두변을 꼭 천윤제의 죽음과 엮고 싶었다.
만약 두변이 정말로 황제인 자신을 죽인다면, 두변이 천윤제를 시해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논리지만, 아주 강력하고 교활한 여론 수법이었다.
영창제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두변, 네놈이 오늘 시군하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는 또 시군을 도모하겠지. 자신의 부인 영설을 황제로 옹립했다지? 여인이 황제라? 몇 년만 지나면, 그녀는 황위를 네게 양위할 것이고, 영문도 모르는 죽음을 맞이하겠지. 네놈이 마음 편하게 황제가 될 때, 대녕 제국이 아직도 대녕 제국이긴 할까?”
영창제가 말에 탄 채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어떤 이들의 죽음은 돈 한 푼의 값도 아깝지만, 어떤 이들의 죽음은 태산보다도 귀하오! 짐이 대녕 제국을 위해 죽는다면, 원하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고, 장렬하게 죽는 것이오!”
영창제가 다시 분개하면서 소리쳤다.
“두변, 시군을 하려면 지금 하거라. 짐이 당장 선황을 따라 지하로 갈 테니. 짐은 선황과 함께 하늘에서 네놈의 악행을 내려다볼 것이고, 난신적자인 네놈이 어떻게 대녕 제국의 강산을 빼앗는지 지켜볼 것이다.”
영창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열사의 모습을 보이면서, 쉴새 없이 천윤제와 자신을 묶어서 말했다.
그는 두변을 도덕적으로 구속하고, 멸시하고 모욕하는 방법으로 자극했다. 역설적이지만, 이래야만 영창제의 목숨은 구차하게라도 부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창제의 연기는 일품이었다. 자리에 있던 수만 대군은 황제의 연설을 들으면서 피가 끓었고, 마음 같아선 황제 대신 자신이 죽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영창제는 안남 왕국에서 도망치고부터 수차례 명품 연기를 선보였고, 덕분에 병장들의 눈에는 천고에 남을 성군이 되어 있었다.
“두변, 시군을 하려면 어서 오너라. 여기 짐의 머리가 있으니, 어서 와서 베어보아라.”
두변이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내 앞에서 허세 부리는 거라고.”
두변이 천천히 영창제에게 다가가더니, 한 손으로 그를 말에서 끌어 내렸다.
영창제는 말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두변에게 목이 잡힌 채로 바닥에 눌렸다.
두변은 곧바로 영창제의 얼굴을 향해 인정사정없이 주먹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퍽.
교룡 혈맥인 두변의 주먹은 지금 용린으로 빽빽하게 덮여 있었다.
천근보다 더 무겁고 굳건한 주먹이 초당 열 번 넘게 내질러졌고, 영창제의 얼굴은 순식간에 피떡이 되었다.
퍽, 콰직.
이윽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영창제의 무공 수준도 준종사 수준은 되니 꽤 높은 편에 속하지만, 두변의 무공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영창제는 미친 듯이 발버둥 쳤지만, 두변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두변의 주먹이 영창제의 얼굴과 머리를 향해 수십 번, 수백 번 내리쳤다.
두변이 주먹질을 하는 동안 사방에 피가 튀고, 영창제의 얼굴은 금세 돼지 대가리처럼 퉁퉁 붓고 피와 살이 분간되지 않았다.
“허세를 부려? 내 앞에서 허세를?
시군이라고 했나? 에라이 빌어먹을 시군 같으니. 네깟놈이 무슨 군주나 돼?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 어디서 스스로를 군주라고 불러?
영충삭, 걱정하지 마라. 목을 베서 죽이진 않을 거니까.
대신 내가 주먹으로 때려 죽여주마.”
영창제 휘하의 수만 대군은 믿기지 않는 광경에 발끈했다.
“두변, 지금 뭐 하는 짓이오. 우리가 이전에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던 건, 당신이 진남공과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오. 진남공과의 정견이 다르긴 하나, 진남공께선 한 번도 공식적으로 당신을 공격한 적이 없소. 이렇게 겁 없이 폐하께 무례를 범한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소!”
진남공의 수하였던 총병 도삼사(屠三思)가 눈을 부릅뜨면서 소리쳤다.
퍽, 퍽, 퍽, 퍽.
두변이 영창제의 머리를 연달아 십여 대 더 때린 뒤, 도삼사를 쳐다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마음대로 하시오. 쯧. 멍청하긴.”
두변은 영창제가 진남공을 죽였다는 사실을 폭로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말 한마디 하기도 귀찮았다.
총병 도삼사가 검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두변, 어서 폐하를 놓아드려라. 폐하를 구하라!”
도삼사가 명령하자, 수만 대군이 검을 치켜들고 두변과 그의 2천 기병을 향해 달려왔다.
도삼사의 병사들이 두변 등을 포위하자, 두변이 개의치 않다는 표정으로 명령했다.
“굳이 봐줄 필요 없다. 저들이 먼저 칼을 휘두르는 순간, 싹 다 죽여버려라.”
“명 받들겠습니다.”
부홍빙이 대답했다.
마혈 기병과 절세 지하성 기병들이 전호검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이때, 멀리서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두변이 있는 곳을 향해 질주해왔다. 옥진 군주였다.
“모두 멈추세요! 지금 뭣들 하려는 겁니까? 설마 아군을 공격할 작정입니까?”
옥진 군주가 진남공 휘하의 군대를 향해 소리치자, 진남공의 총병 도삼사가 말했다.
“두변이 세상의 이치를 역행하는 건 차치하고, 시군의 죄와 상사를 모욕한 죄가 있는데 무슨 아군이란 말입니까?”
옥진 군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시군이라 하였습니까? 영창 위제 저 개만도 못한 놈이 주군이라는 건가요? 내 부친께서는 저놈에게 태산과도 같은 은혜를 베푸셨고, 저놈에게 무조건적인 믿음과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저놈은 군권을 위해서 내 부친을 죽였는데, 그래도 저자에게 주군이라는 말이 어울립니까?”
도삼사 총병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외쳤다.
“말도 안 됩니다. 폐하께서는 성군이십니다. 병사들을 자식처럼 아끼시는 분이 어찌 그런 양심도 없는 짓을 저지르셨겠습니까. 옥진 군주께서는 지금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서 사리분별을 못하시는 겁니다. 지하에 계신 진남공께서 참으로 창피하시겠습니다.”
옥진 군주는 이 말을 듣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영창 위제는 불과 2, 3개월 사이에 진남공의 군대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그들의 마음까지 제 것으로 만들었다.
옥진 군주는 영창 위제의 수완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지금 영창 위제가 진남공 송결을 죽였다는 걸 증명할 길이 없었다.
옥진 군주가 영창 위제에게 다가가서 차갑게 말했다.
“말해라. 네놈이 내 부친을 죽였지?”
영창제가 허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옥진, 비록 짐이 그대를 애모하긴 하나, 그대는 두변을 좋아한다고 했소. 이미 두변에게 정절을 빼앗겼으니, 그의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말이오. 짐은 그대와의 이별이 너무도 마음 아팠지만, 어쩔 수 없이 그대를 놓아줬소. 시집간 딸은 쏟은 물과도 같다는 말이 있지. 당신이 난신적자인 두변을 얼마나 감싸든 다 이해하지만 동의할 순 없지 않소. 이런 식으로 짐을 매도하는 건, 짐과 이미 돌아가신 당신의 부친을 모욕하는 것이오.”
옥진 군주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손이 벌벌 떨릴 지경이었다.
사람이 비겁해도 정도가 있지, 이렇게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뻔뻔스럽게 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네놈이 내 부친을 죽였잖아! 이 짐승만도 못한 놈!”
옥진 군주가 울음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그녀가 오늘 미친 듯이 두변의 뒤를 쫓아온 건, 진남공 휘하의 군대를 되찾기 위함이었다.
두변의 여자가 된 뒤로, 그녀는 두변이 어느 정도로 인내심이 없고,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 더 절실히 깨달았다. 만약 자신이 나서지 않는다면, 두변은 정말로 이 군대를 몰살할 수도 있었다.
“흐흐흐.”
영창제가 두변과 옥진 군주를 쳐다보면서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냉소를 지었다.
그는 옥진 군주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승리의 감회가 새로웠다.
‘짐이 진남공 송결을 죽였다. 왜? 그게 뭐 어때서? 아무도 네 말을 믿지 않을걸?
이 몇만 대군은 이미 짐에게 완전히 굴복했거든. 이들은 짐을 믿지, 사실을 믿지 않아.
짐에게서 이 몇만 대군의 민심을 되찾겠다고? 하. 꿈 깨라!’
두변이 명령했다.
“목을 들어 올려라.”
마혈 무사 한 명이 영창 위제의 목을 움켜쥔 후 그를 일으켜 세우고는 그의 몸에 걸친 모든 옷을 칼로 찢어버렸다.
그의 아래는 잘렸었지만, 표령 도주의 심복이 잘 봉합해놓긴 했다. 하지만 워낙 조잡스럽게 이어진 그 물건에는 흉측한 흉터가 덕지덕지 남아있었다.
영창 위제가 미친 듯이 소리쳤다.
“으아악! 두변, 감히 짐에게 이런 치욕을 주다니. 네놈은 절대로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어서 짐에게 옷을 다오. 어서!”
영창 위제는 언제나 품위 있고 기품이 넘치는 사내로, 무슨 일이 있어도 체면 상할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헐벗은 채로 서 마혈 무사의 손에 매달려 있는 데다, 제 물건의 흉터가 그대로 사람들에게 노출되지 않았나.
영창 위제는 극도의 불안함을 느끼면서 미친 듯이 어딘가에 숨고 싶었다.
간신히 이어붙인 그 물건은 그의 사내로서의 자존심의 최대 약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절세미인이 가슴에 지렁이처럼 징그러운 새까만 흉터가 있다면, 그 미인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흉터를 가리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두변이 말했다.
“영충삭, 네놈이 진남공 송결을 죽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몇만 대군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바뀔 건 없다. 난 전혀 개의치 않아. 저들을 전부 포로로 잡아서 광산에 보내서 노비로 쓰면 그만이야. 내겐 이 정도 병사가 부족하지 않거든.”
두변이 검을 뽑아 들고 영창 위제의 아랫도리를 향해 검날을 세웠다.
“원래는 네놈을 주먹으로 얌전히 때려죽이려고 했는데, 죽기 전까지도 이렇게 속 메스꺼운 연기를 할 줄은 몰랐네. 네놈이 죽을 방식을 바꿔주마. 내가 다시 한번 네놈을 고자로 만들어 줄 테니, 과다출혈로 죽거라.”
영창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솜털이 삐쭉 서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한 번 잘린 적이 있던 터라, 다시는 그 끔찍한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영창 위제는 이제야 두변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두변은 시군의 죄니, 명예이니, 그딴 건 안중에도 없는 사람으로, 오늘은 정말 자신의 제삿날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죽는 건 확실하지만, 어떻게 죽는지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을 뿐이다. 고통스럽고 치욕스럽게 죽거나, 깔끔하게 바로 죽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