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장: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철수하라. 어서 퇴각하라고!”
진서 전장에 있던 소목지도 미친 듯이 퇴각을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전장의 진정한 지휘자는 상장 방천명이기 때문에 다른 장군들은 조용히 방천명만 바라보았다.
상장 방천명은 속이 뒤집힐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는 동방 연합 왕국을 대표해서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고,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승리는 습관이었고, 절대적인 영예였다.
그런데 살면서 처음으로 이렇게 대패라고 할 정도의 패배를 겪은 것이다. 병사들이 산사태처럼 무더기로 쓰러졌다.
동방 연합 왕국은 항상 비대칭전쟁(非對稱戰爭)을 해왔지만, 이런 식의 비대칭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신식 화포는 발포하기도 전에 망가지고, 화총 신군도 사격하기도 전에 전멸하다니.
상장 방천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정석 마포가 5초에 한 번 일제히 발포가 된 장면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의 10만 화총 신군이 불과 몇 분 만에 몇만 명이 죽었다.
도대체 왜일까?
동방 연합 왕국이 세상에서 가장 앞선 기술을 가지고 있고, 가장 앞선 문명을 가진 것 아니었나?
분명히 자신들이 남들보다 몇십 년은 앞서지 않았나?
불과 얼마 전의 오주성 전투, 염주성 전투에서 두변이 십몇만 병사를 잃지 않았나?
그런데 진서성 전투에서는 두변 쪽에 사상자가 발생하긴 했나?
어쩌면 이번 전투에서 두변의 군대는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사상자만 발생할 듯했다.
“상장 대인, 어서 퇴각을 명령하십시오. 어서요! 안 그러면 곤륜노 무사들이 전멸할 겁니다.”
소목지가 미친 듯이 소리치자 결국 상장 방천명도 눈물을 머금고 외쳤다.
“퇴각하라! 전군 퇴각하라!”
진서성에도 퇴각 호각이 울렸다.
미친 듯이 성벽을 오르던 곤륜노 무사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돌아서 질주했다.
아직 살아 있는 동방 연합 왕국의 냉병기 병사들, 그리고 화총 신군도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치욕스러운 대패를 겪은 방천명과 그의 병사들은 마음속 영광이 무참히 짓밟히는 심정이었다.
동방 연합 왕국의 군대는 아비규환의 모습으로 도망치고 있었고, 질서란 찾아볼 수 없었다.
성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전장에서 퇴각하는 동방 연합 왕국의 병사들은 꼭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사방으로 도망쳤다.
두변이 전호검을 치켜들고 마랑왕에 올라타서 외쳤다.
“추격해라. 적군을 전멸한다!”
그의 왼쪽에 있던 이도진도 다른 마랑에 올라탔고, 오른쪽에 있던 계청주도 전호검을 쥐고 마랑에 올라탔다.
“전부 죽여라.”
2천 5백 명의 마혈 기병과 2천 5백 명 절세 지하성 기병이 전호검을 쥐고 두변의 명령이 떨어지기 매섭게 동방 연합 왕국의 군대를 추격했다.
백색성에서도 여담, 영종오 대종사, 이도전, 완안영도, 기세 등이 전호검을 쥐고 마랑에 올라탔다.
“죽여라.”
여담이 명령하자, 2천 5백 마혈 기병, 2천 5백 절세 지하성 기병이 성문 밖으로 홍수처럼 몰려나갔다.
마랑을 탄 마혈 무사들은 정말 무적이었다. 마랑이 초속 30미터의 속도로 달리니, 도망치는 병사를 짓밟아 죽이기 충분했다.
“죽여라!”
마혈 무사는 마랑에 탄 채, 왼손으로 대검을, 오른손으로 전호검을 휘둘렀다.
어디를 달리든, 이들은 전부 1초에 한 명꼴로 목숨을 앗았다.
이들은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평범한 병사들의 허리를 두 동강 냈고, 건장한 곤륜노 무사는 전호검으로 한 번 전기충격을 준 뒤, 곧바로 대검으로 머리를 잘랐다.
진서성 전장에서는 두변이 이끈 5천 기병이 동방 연합 왕국의 십몇만 잔군을 추격했다.
백색성 전장에서도 여담이 5천 기병을 이끌고 십몇만 잔군을 추격했다.
사실 이미 사기가 바닥나고, 사방으로 도망치는 잔군은 병사의 숫자에 큰 의미가 없었다.
동방 연합 왕국의 병사들은 이미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
한 번도 이렇게 강력한 상대를 만난 적이 없으니 그 공포감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게다가 두변의 병사들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1초에 한 명을 죽였다. 이걸 안 이상, 동방 연합 왕국의 병사들은 더 이상 싸우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목숨이라도 부지하려고 미친 듯이 도망쳤다.
두 다리로 아무리 달려봤자, 네 다리로 달리는 것만 할까. 특히 마랑의 달리는 속도가 시속 100킬로미터가 넘는 것을.
사실 동방 연합 왕국은 지금 다시 군대를 재정비해서 두변의 군대를 몰살할 기회가 있었다.
5만 화총 군단이 몇백 미터 앞에서 진을 치고 있으니, 일제 사격을 한다면 두변의 마혈 기병과 절세 지하성의 기병의 절반 정도가 목숨을 잃을 것이다.
하지만 동방 연합 왕국의 화총 군단은 벌써 절반 이상이 사상자였고, 남은 몇만 명은 미친 듯이 도망칠 뿐이었다.
조직력을 잃은 군단은 대열을 정렬하기는커녕, 총을 쥐여줘도 조준도 못 할 지경이었다.
전장 전체가 아비규환인 데다, 잔군이 사방으로 도망치면서 서로가 서로를 밟아 죽이는 상황도 생겼다.
두변의 마혈 기병과 절세 지하성의 기병은 상대적으로 몸집이 커서 조준하긴 좋겠지만, 이동 속도가 너무 빨라서 조준의 의미가 없었다.
동방 연합 왕국의 화총 군단이 사격한다고 해도, 아마 두변의 군대가 아닌 아군을 쏠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동방 연합 왕국은 아직 십몇만 대군이 남았지만, 사실상 전투력이 아예 없다고 봐야 했다.
그 사이, 두변의 5천 기병이 잔군을 닥치는 대로 짓밟고 죽이고 있었다.
죽여라! 죽여라!
마혈 무사와 마랑들은 눈이 새빨개 달아올라 있었다. 이번 전투를 치르기 전까지 너무 오랫동안 참았던 것이다. 전장에서 미친 듯이 질주해야 직성이 풀리는데, 드디어 전장을 누비면서 마음껏 적군을 죽일 수 있어서 흥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전장은 이미 염라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초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갔고, 피바다에는 불완전한 시신이 나뒹굴었다.
“막한을 추격하라!”
“소목지를 추격하라!”
두변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두 대종사와 종사 몇 명, 수십 명 주술사 사제와 무도 고수들을 이끌고 소목지와 막한을 쫓았다.
동시에, 백색성 전장에선 여담이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두강과 원천조를 죽여라!”
영창제가 수만 대군을 이끌고 이틀 동안 밤낮없이 달려서 수백 리 너머에 있는 홍하성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무수히 많은 공방과 납포, 그리고 은자가 넘쳐났다.
영창제가 일부 땅을 점령하긴 했지만 규모가 크지 않았고, 대외적으로 말하진 못하더라도 이미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홍하성을 점령한다면, 최소 수백만 은자를 건질 수 있었다.
홍하성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성벽에는 수위병이 몇천 명뿐이었고, 그나마 그 몇천 명은 딱 봐도 정예군이 아니어서, 머릿수만 맞추었다는 게 그대로 드러났다.
“하하하. 정말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두변 그놈은 곧 멸망할 거라서 여기 홍하성을 신경 쓸 겨를도 없겠군. 이곳을 지킬 제대로 된 병사 하나 없는 걸 보니, 짐은 손바닥 뒤집듯 쉽게 이곳을 점령할 것 같구나.”
영창제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홍하성 성문 앞으로 다가가서 외쳤다.
“짐은 대녕 제국의 유일한 정통 황제, 영창제다! 난신적자 두변은 곧 멸망할 것이다. 짐은 자애로운 황제인지라, 무고한 백성들이 다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짐이 명령하노라. 당장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한 뒤, 성문을 열라!”
성문 위에 있던 군관은 두변의 제4 군단에 속해있을 때 북방 전장에서 한쪽 팔을 잃은 상태였다. 전장에서 칼을 휘두를 수 없으니 하는 수 없이 2선 방위군으로 물러났고, 홍하성에서 문을 수위하는 수문관이 되었다.
수문관은 용포를 입은 영창제와 그의 뒤를 따르는 빽빽한 군대를 보더니, 땅에다 힘껏 침을 뱉었다.
“에라이. 이젠 개나 소나 다 황제라고 하고 다니나 보네.”
수문관이 비아냥거리자, 영창제가 격노하면서 검을 꺼냈다.
“난신적자 두변 놈은 누구나 죽일 수 있다. 성을 지키는 놈 주제야 감히 짐의 북벌 대업을 방해하려고 하느냐! 두변 그놈은 이치를 역행하는 자이고, 잔혹한 폭력 정치로 백성들을 괴롭혔다. 얼마나 많은 백성이 고난과 역경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얼마나 많은 백성이 우리가 구제해주길 기다리는지 아느냐? 두변의 폭력 통치를 받는 백성들을 구제해주기 위해서라면, 일분일초도 허투루 쓸 수 없다. 짐이 셋을 셀 동안 성문을 열지 않으면, 즉시 공성을 명령하여 네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것이다!”
“셋!”
“둘!”
“하나!”
셋을 다 센 영창제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성을 공격하라!”
그를 따르는 수만 대군이 홍하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영창제는 북쪽을 바라보았다. 몇백 리만 더 가면 진서 왕성이었다.
‘그곳의 전투는 이미 끝났겠지. 두변은 이미 죽었을 것이고.
두변! 짐이 네놈의 홍하성을 빼앗아주마. 네놈이 어렵게 모은 식량과 은자는 전부 짐의 것이 되는 것이다. 네놈이 이 소식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화가 치밀어오를까? 피를 토하려나? 짐은 지금 불난 집에 강도질하는 게 아니라, 무고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함이다.
두변, 짐이 네놈의 땅을 빼앗고, 네놈을 따르는 무지한 병사들을 모조리 죽여주마. 네놈이 이 장면을 보지 못하다니, 참으로 애석하구나!’
영창제가 속으로는 낄낄거리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무척이나 의연한 모습이었다.
“성을 공격하라! 두변에게 충성하는 역적놈들을 전부 다 죽이고, 무고한 홍하성 백성들을 구하라!”
영창제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이때, 어디선가 어지러운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면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영창제가 화들짝 놀랐다.
‘저건 어디 군대지? 동방 연합 왕국의 군대는 아니겠지? 짐이 홍하성을 차지하겠다고 해서 화가 난 건가?’
잠시 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던 기병 부대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영창제의 예상대로 이들은 동방 연합 왕국의 군대였으며, 족히 몇천 명은 돼 보였다.
게다가 말도 타지 않고 그냥 두 발로 뛰는 곤륜노 무사들도 있었다.
영창제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죽어도 동방 연합 왕국과 싸우는 걸 원치 않았고, 비밀리에 만난 동방 연합 왕국 사신과 나눴던 밀약을 여기서 떠벌릴 수도 없었다.
영창제 휘하의 대신들이나 군대는 영창제가 동방 연합 왕국과 엮였다는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 또한 영창제가 아직 자신의 것도 아닌 주권과 이익을 동방 연합 왕국에게 주기로 약속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동방 연합 왕국의 기병 부대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영창제는 두피가 저릿해지면서 맞서 싸워야 할지, 한 번이라도 더 좋게 대화를 해봐야 할지 고민했다.
그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민하고 있을 때, 기병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소목지, 즉 소군 방진의 직계 수하라는 걸 발견했다.
영창제는 머뭇거리다가 소목지와 교섭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소목지는 영창제를 곁눈질로 한 번 쳐다볼 뿐, 쉬지 않고 질주했다. 소목지의 표정은 공포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설마 저들이 지금 도망치는 건가?’
영창제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소목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소목지의 뒤를 쫓아 곤륜노보다 더 무시무시한 기병 부대를 발견했다.
두변의 마혈 기병이 바람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돌진해 오는데, 조만간 추월해서 소목지와 소목지의 잔군을 포위할 기세였다.
두변의 마혈 기병이 소목지와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일부 마혈 기병이 소목지를 포위할 기세로 그를 추월했다.
영창제는 꼭 얼음굴에 들어간 것처럼 온몸이 차가워졌다.
‘설마 두변이 이번 전투에서 이기고, 도망치는 소목지를 추격하는 건가?
그런데 짐은 지금 불난 집에 강도질을 하려고, 두변의 뒤통수에 세게 한 대 꽂으려고 그의 홍하성을 털려고 하는 거고?’
영창제는 죽어도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이런 광경이 펼쳐질 거라고는 생각조차, 상상조차 한 적 없었다.
그는 세상을 유람한 적 있는 사람으로, 필요 이상으로 세상 물정을 잘 알았다. 그는 동방 연합 왕국이 얼마나 강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동방 연합 왕국이 서방 세계의 연합군을 무찔렀다는 소식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의 눈에는 동방 연합 왕국은 고귀하고 범접할 수 없는 거룡(巨龍)이지만, 두변은 이름도 없는 시골 촌뜨기에 불과했다.
두변이 여여해와 여진 제국을 이겼다지만, 그건 원시적이고 낙후된 대녕 제국에서 운이 좋아서 잠시 화제가 됐던 것뿐이지, 동방 연합 왕국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고 밟혀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예상과 다르게 소목지는 도망치고, 두변이 그 뒤를 맹렬한 기세로 추격하고 있다?
오늘 태양이 서쪽에서 뜬 건가? 아니면, 헛것이 보이는 건가?
두변이 1천 명 마혈 기병을 이끌고 영창제의 눈앞을 빠르게 지나쳤다.
두변도 곁눈질로 영창제와 그의 뒤에 있는 수만 대군을 확인했다. 하지만 영창제야 원래도 그닥 대수롭지 않으니,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계속해서 소목지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