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512화 (512/648)

512장: 두변 대 막한 여왕

진남공 송결을 죽인 직후, 영창제는 손바닥이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손바닥을 뒤집어 보자, 손바닥 위에 매화 모양의 혈공 다섯 개가 나 있었다.

재빨리 손바닥의 냄새를 맡아보고는, 독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 한시름을 놓았다.

진남공 송결의 옷을 들춰보자, 송결의 왼쪽 가슴에 정석 호심경(護心鏡)이 아직 남아 있는데, 막한 여왕의 검을 맞을 때 깨진 모양이었다. 영창제가 송결을 죽일 때 깨진 호심경 조각이 그의 손바닥을 찌른 것이다.

영창제는 깨진 정석 호심경을 송결에게서 떼어낸 뒤, 자신의 소매 속에 감췄다.

영창제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방을 나섰다. 그의 눈시울은 붉어 있었지만,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진남공께서 가셨소.”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갈랐다.

안남 왕국의 군대나 대녕 제국의 남방 군대엔 두 명의 정신적 지주가 있었다. 한 명은 여창 국왕이고, 다른 한 명은 진남공 송결이었다. 그런데 정신적 지주 두 명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안남 왕국과 대녕 제국의 병사들은 세계 종말이라도 온 듯 비통해했고, 옥진 군주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혼절해버렸다.

영창제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장군들과 10만 잔군의 백부장 이상 직급의 군관들을 둘러보았다.

“여창 국왕이 붕어했고, 진남공 송결께서도 먼 길을 떠나셨다. 너희들을 인도하던 사람들이 전부 사라진 것이다. 짐은 대녕 제국의 유일한 정통 황제이니, 짐은 그대들의 새로운 인도인이 되려 한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순화부 전투를 보았겠지만, 세상은 이미 변했다. 동방 연합 왕국은 완전히 새로운 전쟁 방식을 취하고 있다.”

군관들이 조용히 영창제를 쳐다보았다.

“승룡부로 가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승룡부로 갈 수 없다. 그곳에는 여창 국왕의 자식들이 있고, 승룡부로 가는 길엔 피난 중인 안남 왕국 백성들이 있다. 짐은 황제이니, 동방 연합 왕국의 목표는 짐일 것이다. 우리가 가는 곳이 곧 막한 여왕의 군대가 쫓아오는 곳이다. 그러니 우리는 전쟁을 승룡부로 끌고 갈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위대한 희생을 한 여창 국왕에게 그런 짓을 해선 안 된다.”

수많은 군관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들은 한낱 평범한 군관들일 뿐이었다. 고위층 사이의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막한 여왕이 빼앗으려는 곳은 안남 왕국의 영지일 뿐, 도망쳐 나온 10만 잔군에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영창제는 잔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들을 데리고 도망쳤고, 동방 연합 왕국과의 전투를 피하기 위해서 안남 왕국을 그들의 손에 고이 내어줬다.

동시에 동방 연합 왕국이 두변을 더욱 빨리 공격할 수 있도록 비겁한 수를 쓴 것인데, 잔군 앞에서는 안남 왕국의 무고한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의 발길을 자신에게 돌리겠다고 연설하는 중이었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짓이지만, 영창제는 자신의 행동을 무척 위대한 행동처럼 포장하고 있었다.

“우리는 북상할 수 없고 승룡부로 갈 수 없다. 그곳에는 많은 백성이 있고 그곳은 우리 대녕 제국의 영토니까. 지금은 진무 위제와 두변이 그 땅을 점령하고 있지만, 그곳에는 우리 대녕 제국의 백성이 살고 있다. 우리는 전쟁의 포화를 대녕 제국으로 끌고 가면 안 된다.”

영창제가 절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진남공 소속의 병사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의 부모와 가족이 전부 광서에 있던 터라, 당연히 가족들을 전쟁통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어딜 가든 전쟁의 포화가 따른다면, 우리는 서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없는 원시 산림으로 가서, 서쪽으로, 계속 서쪽으로 향할 것이다. 그래야만 잔혹한 전쟁의 포화가 무구한 백성들에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여창 국왕의 자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대녕 제국의 백성들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짐이 서쪽으로 떠나는 건 두변과 진무 위제에게 좋은 일이겠지만, 짐은 원망도 두려움도 없다. 이건 구사일생의 길이다.

너희들은 짐을 따르겠는가?”

“따르겠습니다!”

“황제 만세, 만세, 만만세.”

안남 왕국의 왕후 영신은 부아가 치밀어 올라서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솔직하고 직설적인 사람인지라, 정치적 수단 같은 걸 쓸 줄 몰랐다. 그러니 그녀의 인생 처음으로 정치적 호소력이 뭔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영창제가 권력을 빼앗으려고, 군대를 데리고 도망치려고, 안남 왕국을 막한에게 고이 넘겨주려고 서쪽으로 가는 건데, 꼭 위대한 희생을 하는 것처럼 연설을 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다니.

영신 왕후는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반박하고 싶었다. 최소한 안남 왕국 소속의 잔군은 자신이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그녀의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아무것도 챙길 필요 없이, 군대고 뭐고 할 것 없이, 옥진 군주와 함께 승룡부로 가시오.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계림부로 가서 두변에게 의탁하시오.’

여창 국왕이 살아있을 적엔 영신 왕후의 말이 그에겐 곧 법이었다. 여창 국왕은 아내를 미친 듯이 아꼈고, 아내가 하는 모든 말을 성지처럼 받들었다.

하지만 지금 왕후 영신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결정을 하든, 계속 남편의 그 한마디가 떠올랐고, 아무 조건 없이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남편은 자신보다 더 똑똑하니까. 그의 생각은 더욱 옳을 테니까.

그녀는 안남 왕국의 몇만 잔군을 포기하기로 했다. 여기서 영창제와 군대 쟁탈을 했다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영신 왕후가 지금 해야 할 건, 옥진 군주를 데리고 하루빨리 승룡부로 떠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영창제의 곁은 전장보다 더 위험했다.

옥진 군주가 진남공 송결의 몸을 꼼꼼하게 닦은 뒤, 정갈하고 위엄있는 옷으로 갈아입혔다. 이때, 그녀는 부친의 심장을 지켜주던 정석 호심경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챘다.

옥진 군주는 잠시 멈칫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비탄에 잠긴 그녀로서는 그런 자잘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송결의 시신 위로 나무가 쌓이고, 옥진 군주는 기름이 부어진 나무 위에 직접 불을 붙였다.

그렇게 송결은 화장되었다.

이 세계에는 시신을 화장하는 관습이 없었지만, 전쟁 중이라 시신을 옮기는 건 불가능했고, 이곳에 묻는 것도 불가능해서 시신을 화장한 뒤에 유골을 챙기기로 했다.

사람들은 세상이 떠나가라 울부짖었다.

두 시진 뒤, 옥진 군주는 송결의 유골을 챙겨서 10만 대군과 함께 서쪽에 있는 낭발랍방 왕국으로 향했다.

영신 왕후가 조용히 옥진 군주를 찾아와서 말했다.

“나와 함께 승룡부로 가서 두변에게 의탁해요. 당신의 모친과 형제들도 다 승룡부에 있잖아요.”

옥진 군주는 비통함에 잠겨 있던 터라, 당장이라도 두변에게 달려가서 그에게 의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친 송결이 죽기 직전에 영창제에게 충성을 바치라고 했다. 옥진 군주는 부친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고, 그 말은 이미 부친의 유언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불충 불효한 자식이 되고 싶지 않았다.

영신 왕후가 재차 설득했다.

“영창제는 우리의 군권을 빼앗은 뒤에 군대를 이끌고 도망치는 거예요. 안남 왕국을 고스란히 막한 여왕에게 내어준 거라고요.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는 위대한 희생인 양 연설했죠. 백성들을 전쟁의 불로부터 구하고 싶어서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간다고 말이에요. 그는 고의로 안남 왕국을 희생하려는 거예요. 자기 대신 남에게 화를 뒤집어쓰게 하는 거죠. 막한 여왕의 군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안남 왕국의 영토를 차지하게 될 거고, 더욱 빨리 두변을 공격하게 될 거예요.”

옥진 군주는 흠칫 놀랐다.

지금 그녀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옥진 군주는 솔직하고 의협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꽤 오래전에 두변과 생판 남이었을 때도 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려 하기도 했다.

견사 대사의 정신 환각 속에서 두변을 구하기 위해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희생하려 했었다. 그만큼 그녀는 꿍꿍이나 속셈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영창제가 사람들 앞에서 했던 연설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동방 연합 왕국과 영덕 위제가 연합했으니, 동방 연합 왕국의 목표는 영창제일 것이고, 그가 가는 곳으로 곧 막한 여왕이 따라올 곳이라고.

무구한 백성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야만 한다던 그의 말이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옥진 군주는 심경이 복잡하고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당장 옳은 결정을 하기 어려웠다.

영신 왕후는 옥진 군주를 위해서 이미 하루를 버린 상태였다. 그녀는 옥진 군주가 아직도 설득되지 않은 걸 눈치채고 인내심이 바닥나버렸다.

영신 왕후도 꽤 성격이 있는 편이라, 마음 같아선 옥진 군주의 뺨이라도 때리면서 정신 차리라고 윽박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화를 꾹꾹 참고 침착하게 말했다.

“하루만 더 기다려줄게요. 나와 함께 떠나지 않는다면, 이제 당신을 신경 써줄 수 없어요. 난 내일 바로 승룡부로 떠나서 두변에게 의탁할 거예요.”

다음날, 영신 왕후는 마지막으로 옥진 군주에게 함께 가자고 권했다.

하지만 옥진 군주는 영신 왕후의 제안을 거절하고 영창제와 계속해서 서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하루를 더 행군했다.

그날 저녁, 10만 잔군은 안남 왕국의 작은 현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내일이면 안남 왕국 영지를 완전히 벗어나 낭발랍방 왕국에 진입하게 된다.

영창제는 창문을 열고 밤하늘에 걸린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지금 자신이 바라던 대로 모든 일이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음에 뿌듯했다. 순화부가 함락된 건 여창 국왕과 진남공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과도 같았겠지만, 영창제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순화부가 함락된 덕에 10만 대군을 얻었으니까.

황제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 바로 자신의 직속 군대이다.

동방 연합 왕국은 곧 맹렬한 기세로 두변과 진무제를 공격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서남에 커다란 빈틈이 생길 것이고, 영창제는 그 틈을 타서 낭발랍방 왕국과 면 왕국을 공격해서 서남으로 직통하는 길을 개척해낼 것이다.

그는 낭발랍방 왕국과 면 왕국, 그리고 두변의 서남까지 한 번에 집어삼킬 계획이었다.

영덕 위제는 이미 명성이 바닥에 떨어졌으니, 자신이 대녕 제국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정통 황제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동방 연합 왕국도 영덕 위제가 대녕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이전에는 촉왕부에서 권세도 권력도 없는 세자로 지내면서 돼지우리에 가둬진 돼지처럼 자신의 영지에 발이 묶인 채 지내야 했다.

영창제는 그런 생활이 죽도록 싫었고, 그래서 열심히 무공 수련을 해서 세계를 유람하며 닥치는 대로 기회를 잡았다. 그 덕분에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고, 곧 대녕 제국의 정상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영창제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달을 올려다보았다.

“두변, 짐은 네놈의 시신을 밟고 정상에 오를 것이다. 네가 지은 시가 참 마음에 들더군. ‘그대 오래도록 살아, 천 리 먼 곳에서도 이 고운 달빛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이라. 자네도 지금 짐과 같은 달을 바라보고 있겠지?”

“폐하!”

이때, 옥진 군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창제의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영창제도 지금껏 수많은 여인을 품었었다. 심지어 옥진 군주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여인을 품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옥진 군주처럼 얼굴도 아름답고 폭발적인 몸매를 가진 여인은 평생 본 적도 없었다. 옥진 군주의 몸매는 유경 왕성에서도 무척 보기 드문 몸매였다.

유경 왕성에는 세상에서 제일 미녀가 많은 곳이고, 서방 여인들의 몸매는 태생이 폭발적이었다.

그럼에도 옥진 군주의 몸매는 거의 악마 수준으로 사악했고, 조물주의 걸작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저 탄탄한 몸매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힘과 터질 듯한 곡선을 보라!

그녀는 모든 사내가 꿈에서도 원하는 절세 미물이로다!

“들어오너라.”

영창제가 말했다.

문이 열리고, 옥진 군주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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