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5장: 새로운 군주
이문회는 두변에게 미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영설 공주가 말했다.
“어서 떠나야 해요. 방계의 군대가 곧 경성을 봉쇄할 것이고, 북명검파의 고수들도 경성 안으로 밀려 들어올 거라서 지금 떠나지 않으면 못 떠나요.”
이문회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그의 눈빛도 점점 단호해졌다.
이문회가 영설 공주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전 떠나지 않고 이곳에 남겠습니다.”
영설 공주가 흠칫 놀랐다.
“경성에 잠복해 있겠습니다.”
이문회는 결심했다.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으니, 이대로 떠나는 건 잘못을 만회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영설 공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지금 영덕 위제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어요. 그는 분명 경성 전체에 고강도의 압력 통치를 시행할 것이고, 이대로 경성에 남겠다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에요.”
“제가 저지른 잘못이니 대가를 치러야지요. 저는 동창 심복과 함께 경성에 잠복하고 있겠습니다. 중요한 때나 적에게 치명타를 줄 때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중요한 정보를 경성 밖으로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제게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요.”
영설 공주도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닌지라, 이미 결심을 한 이문회를 더이상 붙잡지 않고 말했다.
“정말 결정한 건가요?”
“예, 공주 전하.”
이문회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때, 여완완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서 떠나야 해요. 방계 대군이 경성을 봉쇄하기 시작했어요. 북명검파 고수들이 우리를 잡으러 돌아다니고 있다고요.”
이어서 여완완이 이문회에게 상자 하나를 건넸다.
“안에 든 건 이수피 가면이에요. 원래 두 장 있었는데, 한 장은 이미 써버렸어요. 이게 마지막으로 남은 가면이에요. 이걸로 다른 사람으로 위장하면 좀더 안전하게 잠복할 수 있을 거예요.”
영설 공주도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얼른 몸을 숨겨요. 위제와 방계가 공공을 죽이려고 고수들을 보냈을 거예요.”
이문회가 허리 숙여 예를 올렸다.
“공주 전하, 몸조심하십시오. 서남으로 돌아간 뒤에 두변에게 전해주십시오. 이 아비가 절대로 두변을 실망하게 하지 않겠다고요.”
여완완이 말했다.
“의부 대인, 황태후께서 승하하시기 전에 영덕 위제를 폐위하면서, 두변 부군, 진남공 송결, 고순창, 의부를 고명대신으로 임명하셨어요. 네 분이 상의해서 새로운 황제를 세우라고요.”
이문회는 여완완의 호칭에 조금 놀랐지만, 곧바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신, 태후마마의 하늘과도 같은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그리고 영설 공주에게 말했다.
“지난번엔 제가 제 아들을 못 믿었지만, 이번에는 모든 걸 걸고 아들을 믿을 겁니다. 그러니 두변에게 전해주십시오. 이 아비는 두변이 정하는 사람을 황제로 모시겠다고요.”
영설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이 공공, 몸조심해요.”
영설 공주가 다시 두봉을 쓰고 여완완, 영종오, 이도진의 보호를 받으며 자리를 떠났다.
이들은 방계 군대와 북명검파 고수들이 경성을 완전히 봉쇄하기 전에 경성을 떠나서 서남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영덕 황제가 황릉에서 대살육을 저지른 뒤, 방계의 군대와 함께 원등, 난오 공작의 군대가 끊임없이 경성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북명검파의 수백 명 고수가 가장 먼저 황궁 안으로 들어가 영덕제의 안위를 책임졌다.
나머지 수천 명의 관리들과 공훈 귀족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영덕제가 진짜라고 믿는 척했다.
사실 영덕제는 자신이 모친을 시해한 악행과 자신이 영도현의 사생아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거라는 환상에 빠져 대살육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그의 환상에 불과했다.
무슨 일이든 천 명 이상이 알게 되면, 그건 더 이상 비밀이 될 수 없게 된다. 영덕제의 환상은 마치 종이로 불을 덮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영덕 황제의 출생의 비밀과 그가 모친을 시해한 죄는 반나절 만에 경성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대부분 사람이 이 소문을 믿지 않았고, 모두 두변의 음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소문은 점점 더 크게 퍼지기 시작했는데, 바로 황릉에서 영덕제가 수천 명을 죽인 게 화근이었다.
수천 명의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데, 그들 가족이 가만히 있을까?
영덕제는 이게 다 두변이 저지른 음모라고 말했고, 그자가 황릉을 급습해서 수백 명 대신과 수천 명 무구한 백성을 죽였다고 말했다.
천진난만한 백성들은 선동되기 쉽긴 했지만, 이런 말까지 믿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당시 현장에서 살아남았던 대신들과 공훈 귀족들은 겉으로 황제에게 굴복한 것처럼 태후를 요녀라고 말했지만, 영덕제의 만행에 통탄하는 것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경성으로 돌아온 뒤, 살아남은 자들은 영덕제의 감시를 받았지만,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사건의 진상을 퍼트렸다.
이 사람들은 방계의 배척을 당해서 조당에서 쫓겨났다가 선황 덕에 다시 조정의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만큼 선황에게 감사한 마음이 크다 보니, 사생아 영덕제가 제위를 훔친 것이 영 탐탁지 않았다.
그때 낯선 군대가 경성 안으로 밀려오더니, 다짜고짜 경성을 완전봉쇄하기 시작했다.
군대의 병사들이 전부 군복을 갈아입고 군기를 바꿔서 겉으로 보기엔 계요 변진의 군대 같았지만, 이들의 정신 상태나 갑옷은 계요 변진 군대의 것이 아니었다.
계요 변진의 군대에는 이런 정예병들이 없다. 세상에 이토록 뛰어난 정예 군대는 오로지 방계의 군대와 두변의 군대뿐이었다.
사람들은 경성을 봉쇄하는 군대가 두변의 군대가 아니니, 방계의 군대일 것이라고 추측하기 시작했다.
선황의 천적이던 방계가 이제 경성을 장악했구나!
영덕제가 방계와 손을 잡았구나!
진실은 웅변보다 설득력이 있는 법이다.
경성의 백성들은 거리를 활보하는 방계 군대를 보면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으아악!”
영덕제가 황궁 안에서 격노하며 물건을 깨부수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자애로운 황제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영설 공주가 경성을 빠져나갔고, 이문회도 사라졌으며, 몇백 명 동창 무사들도 사라졌다.
경성 전체에 영덕 황제가 영도현의 사생아라는 사실이, 그가 모친을 시해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물론 아직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환상을 품고 영덕제를 믿고 영덕제에게 기대를 품었다.
그들은 영덕제가 모친을 시해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황궁 앞으로 모여들었다. 영덕제는 다시 한번 하늘을 울릴 정도의 연기력으로 이 모든 게 두변의 음모라고 외쳤다.
경성을 봉쇄하게 된 것도 두변의 군단이 황릉을 급습해서 수천 명 무구한 사람을 죽은 탓이라고 했다.
영덕제는 마지막에 눈물을 흘리면서 목청을 높였다.
“두변, 뭘 하려거든 짐에게 하여라. 짐의 백성들이 무슨 죄란 말이냐. 짐을 죽여도 되지만, 짐의 백성들은 해치지 말아라. 이들은 무고하단 말이다.”
황궁 앞에 모여든 수천 백성은 영덕 황제의 연기에 크게 감동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황제 폐하, 방계는 제국의 적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왜 방계의 군대가 경성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겁니까?”
황제는 그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한 척했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외쳤다.
“그들 군대가 군기를 바꿨지만, 저는 저들이 계요 변진의 병사들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습니다. 저는 대녕 제국의 백인장(百人長)이었는데, 작년에 경성의 곡식 창고를 지키다가 팔과 다리를 잃었죠. 그래서 이번에 경성으로 들어온 군대가 예전에 경성에서 나갔던 방계 정예 군대라는 걸 아는 겁니다. 저는 그들의 얼굴을 많이 알고 있고, 그들이 입던 갑옷도 알고 있으니까요.”
황제가 마지못해 대꾸했다.
“잘못 본 것이다. 저들은 계요 변진의 군대가 맞다.”
이어서 황제 옆에 있던 태감이 말했다.
“아, 이제야 알겠습니다. 저 사람은 두변이 경성에 심어놓은 첩자가 분명합니다. 일부러 헛된 소문을 퍼트리는 첩자입니다.”
또 한 사람이 인파 밖에서 외쳤다.
“영덕 위제! 나는 대녕 제국의 도찰원 어사다. 난 며칠 전 황릉에서 죽기가 두려워서 네놈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집으로 돌아오고 나니 매일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스승께서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내 꿈에 나타나서 나는 사내자식이 아니라고, 난신적자라고 호통치신다. 내 부모님도 내가 위제를 황제로 모신다는 게 치욕스러워서 자결하셨다. 그러니 나는 오늘 나서서 진상을 밝히겠다!”
이 사람은 4품 관포를 입고 있었고, 정말로 도찰원 어사대의 관리였다.
“경성의 백성 여러분! 저놈에게 현혹되지 마십시오. 장례식 당일에 저도 그곳에 있었고, 태후마마께서 직접 영덕 위제의 출생의 비밀을 밝히셨습니다. 저자는 북명 종주 영도현의 사생아이고, 선황의 친혈육이 아닙니다. 태후마마께서 저놈이 태후를 시해했다는 죄를 밝히셨고, 만인 앞에서 황제를 폐위했습니다.”
어사대 관리가 목청을 높여서 외칠수록 영덕제의 안색은 사색이 되었다.
황제 바로 옆에 서 있던 동창 대도독 풍보보가 냉랭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임 대인! 우리가 대인이 일찍부터 두변과 결탁했고, 두변에게 매수당한 걸 모를 거라 생각하시오? 우리 동창에 이미 증거가 있소. 여봐라. 저자를 잡아라.”
“하하하하!”
어사대 관리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내 스승은 위제에게 죽임을 당했고, 내 부모는 내 나약함 때문에, 더러운 위제에게 무릎을 꿇은 것 때문에 자결하셨다. 내가 위제의 진상을 밝히려고 결심한 순간부터 이 세상에 살아남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영덕 위제! 넌 천벌을 받을 것이다!”
어사대 관리가 있는 힘껏 외친 뒤, 허망한 웃음을 지으며 자결했다.
일순간, 황궁 밖에 모여있던 수천 백성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황제의 눈치를 보더니 다들 스멀스멀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날부터 여론은 완전히 방계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황제의 만행이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였고, 진실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대녕 제국 전체를 휩쓸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영덕제가 격노하면서 물건을 깨부수는 것이다.
태감과 궁녀들은 황제의 눈치를 보면서 조용히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이때, 황궁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 이런 꼴을 보이다니. 참으로 실망이군.”
낯선 중년 사내의 목소리였다.
영덕제가 그 말을 듣고 더욱 화를 내면서 호통쳤다.
“감히 어떤 놈이 짐에게 이런 말버릇으로 말하느냐. 죽기가 두렵지 않으냐.”
그때 한 사람이 유유히 황궁 안으로 들어왔다. 조각 같은 외모에 고결한 기개, 얼핏 보면 신선과도 같은 사내가 영덕제를 바라보았다.
걸어 들어온 사람을 확인하는 순간, 영덕제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는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내는 북명 종주 영도현, 영덕 위제의 친부였다.
영덕 위제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아신, 태상황을 뵙습니다.”
이번엔 영도현이 움찔 놀라더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영덕 위제는 역시 영도현이 생각했던 것처럼 비겁하고 창피함을 몰랐다.
“황궁에서 화를 내서 무엇하느냐? 선황의 혈맥이 아닌 게 뭐 어때서? 어차피 영씨 황족의 혈맥인데. 모친을 시해한 게 뭐 어때서? 역사상 부모를 시해한 황제가 적더냐? 어떤 황제들은 그 길을 걸어야만 천고 일제가 되었다.
제위에 오르기 전에 필요한 건 명성이지만, 제위에 오른 뒤에는 명성 따윈 필요 없다. 힘을 가져야만 왕도고, 승리하면 왕이 되는 것이다. 두변의 세력을 제거하고, 대녕 제국을 진정으로 통일하면, 모든 죄업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영도현이 말했다.
“부황, 두변이 제가 부황의 친아들이라는 비밀을 어떻게 안 겁니까? 뭔가 이상합니다.”
“성화교가 그를 돕고 있다. 동방 연합 왕국이 신대륙 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탓에 성화교가 아주 큰 위협을 느꼈겠지.”
“성화교가 두변과 손을 잡았다니, 정말 안 좋은 소식이로군요.”
“두변은 오만해서 성화교와 결탁하지 않을 게다.”
영도현은 뒷말을 삼켰다.
‘내가 성화교와 천계십자회에 재앙을 가져다줄 함정을 준비해놨다.’
영덕 위제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부황, 저와 소군 방진은 어떤 관계가 되는 겁니까?”
영도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두변을 제거하면, 동방 연합 왕국이 동방 연합 제국이 될 것이다. 대녕 제국은 다시 천조상국이 될 것이고, 동방 연합 제국의 중심 제국이 될 것이다. 그리고 대녕 제국의 황제인 너는 동방 연합 제국의 지도자가 되겠지.”
“그럼 소군 방진은요?”
“소군은 무척 원대한 이상을 품고 있다. 동방 연합 제국 하나로는 그의 성에 차지 않지. 동방 연합 제국은 소군의 도구에 불과해. 너도 이제 인자한 군주 연기는 무리겠구나. 백성들을 다스릴 땐 너무 관용을 베풀어선 안 된다. 이제 너의 철혈(鐵血) 통치를 시작해라.”
며칠 후, 경성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인자하던 영덕 위제는 하룻밤 사이에 잔혹한 폭군으로 변했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