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503화 (503/648)

503장: 폐위하라 二

천윤제가 살아있을 때는 황제의 명성이 그저 그랬고, 군신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는 확실히 특별하게 영명한 군주는 아니었고, 인자하면서도 제멋대로인 구석도 있었다.

천윤제를 떠올린다면, 사람들은 그를 그저 좋은 사람, 순진하고 선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런데 천윤제가 죽고 나니, 그의 명성은 도리어 좋아졌고, 오히려 신성함에 가까워지기까지 했다.

조정의 대신이나 경성의 백성들이나, 모두 천윤제에게 탄복했고 그를 칭송하기까지 했다.

그는 아사하기 직전까지도 악의 세력과 타협하지 않은 군주였고, 백성들과 함께 공생공사한 황제였기 때문이다.

“대신들은 들으라. 애가는 영덕제의 황위를 정식으로 폐한다. 다들 들었는가? 애가의 지의를 따르겠는가?”

황태후가 외쳤다.

“신, 명 받들겠나이다.”

내각 수보 고순창이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신, 명 받들겠나이다.”

예부시랑 오삼석도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다.

황태후가 대신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그대들은 정녕 이런 파렴치한 자가 황위를 훔치는 것을 용납하는 건가?”

대신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으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신, 명 받들겠나이다.”

“신, 명 받들겠나이다.”

끼리끼리 뭉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이, 방계가 경성에서 물러난 뒤 선황이 고른 조정 대신 중에는 정말로 충직한 충신들이 존재했다.

방계가 조정을 장악할 때, 조정 중심에는 기개가 있다고 할 만한 대신이 한 명도 없었지만 말이다.

시간이 흐르자 3분의 1에 달하는 대신이 모두 황태후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신, 명 받들겠나이다.”

영덕제가 냉소하면서 태후를 가리켰다.

“할 말은 다 했느냐? 이 요녀 같으니!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두변은 정말 속내를 알 수 없는 놈이로군. 감히 모후의 시신을 훔치고, 요녀를 모후로 위장하다니. 그리고 짐이 모후를 시해했다고, 짐이 선황의 친자식이 아니라고 모함을 해?”

영덕제가 무릎을 꿇은 대신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짐은 선황과 외적으로 많이 닮았소.”

그가 헛웃음을 터트리면서 말을 이었다.

“이중턱 같은 속설로 짐이 선황의 친자가 아니라고 말하다니.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군. 이 요녀야, 두변이 네년을 보낸 것이라고 인정하여라. 모후의 시신을 어디에 숨겨놨느냐.”

황제가 이 말들을 할 때, 대신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말을 도저히 그대로 듣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영덕제가 선황과 닮긴 했지만 조금 비슷한 정도였다. 판박이처럼 닮은 게 아니었고, 영도현도 황실 혈맥이니, 두 사람이 어느 정도 닮은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영덕제는 이중턱 유전설이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했지만, 함께 논의를 한 대신들은 이중턱이 유전이라는 걸 믿었다.

영덕제가 아무리 혼신의 연기를 한다고 해도, 더는 그의 말을 믿는 사람들은 없었다.

“여봐라. 모후로 위장한 저 요녀를 당장 잡아들이고, 엄벌로 다스려서 진상을 밝히거라.”

영덕제가 외쳤다.

일순간, 십여 명의 고수가 나서더니 태후를 잡으려고 했다.

고순창 등이 화들짝 놀라면서 호통쳤다.

“지금 뭣들 하는 거냐. 감히 태후마마께 무례를 범하려 하다니. 반역을 일으키려는 거냐?”

영덕제가 냉소를 지었다.

“수보 대인, 사실대로 말하시오. 두변에게서 얼마나 많은 대가를 받았길래 저 요녀와 합심해서 이런 연극을 벌이는 것이오? 감히 짐을 폐하겠다고? 이런 난신적자를 보았나.”

태후는 짐승만도 못한 영덕제를 바라보면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보아라. 네가 네 친부 영도현과 똑같은 모습을 하는구나. 연기에 능하고, 비겁하고 파렴치한 짓을 일삼는 게. 양심이란 게 없고, 도덕성이라는 게 없는 게 네놈의 본성이다.”

태후가 노려보면서 하는 말에 영덕제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외쳤다.

“요녀, 당장 그 입 다물지 못할까. 천하에는 공평한 법도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일개 요녀가 모후로 위장한다고 해서, 정말로 네년이 진짜 모후가 되는 줄 아느냐. 미련한 것, 어서 진상을 밝히거라. 그래야 고생을 덜 할 것이다.”

“비록 애가가 영도현의 약에 취해서 간음 당했지만, 그것 또한 여인의 정절을 지키지 못한 것이겠지. 그리고 애가의 제일 큰 죄는 불효자식인 네놈이 두변을 해치는 걸 모른척한 것이다. 네놈이 대녕 제국을 절벽 끝으로 몬 것이야. 애가는 천벌 받을 죄를 짓고도 이 세상에 살아갈 수가 없다.”

황태후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더니 처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애가는 무지하고 창피함을 모르는 여인이다. 애가는 선황과 선조를 뵈러 갈 면목이 없다. 이 일을 만천하에 알렸으니, 이제 마음 편히 죽을 수 있겠구나.”

태후가 관의 모서리 부분에 있는 힘껏 머리를 박았다.

쾅!

태후가 어찌나 세게 박았는지, 그녀의 머리가 쪼개지면서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방계의 고수들은 태후가 자결하는 걸 막을 수 있었고, 그녀를 생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회의 명령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황태후가 진상을 밝히고 있을 때도 두회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꼭 태후가 모든 걸 다 말하길 바랐던 것처럼, 그녀를 제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황태후가 참혹하게 죽자, 영덕제의 몸이 움찔거리면서 얼굴이 벌벌 떨렸다.

제 친모가 이번엔 완전히 죽었지만, 죽기 직전에 자신의 등에 칼을 꽂았으니, 더없이 치명적인 칼이었다.

‘지금의 국면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뭐가 어찌 됐든, 영설을 확실히 죽여야만 해. 만에 하나를 방지하기 위해서, 영설이 또 모후처럼 관에서 일어나서 사기극을 벌이는 걸 막아야 해.’

영덕제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여봐라.”

영덕제가 소리치자, 그의 뒤에서 비밀스러운 대종사가 나타났다.

영덕제가 명령했다.

“가서 영설의 관을 열어보아라. 영설이 죽었든 살았든, 그녀의 시신을 사정없이 토막 내버려라.”

“알겠습니다.”

대종사가 옆에 있던 관으로 다가가더니 한 손으로 상판을 들춰내면서 동시에 검기를 쏘아냈다.

샥, 샥, 샥, 샥.

관 안에 있던 시신은 눈 깜빡할 사이에 몇 개로 토막 났다.

그런데 다음 순간, 비밀스러운 대종사는 경악했다. 관 안에 있던 시신은 영설 공주가 아니었다.

영설 공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현재 이문회의 곁에는 세 명의 대종사가 서 있다.

이도진, 계청주, 그리고 예상 선자.

예상은 회임한 지 벌써 7개월이 지나서, 태아를 위해서라면 한동안 집에서 요양해야 했다.

하지만 영설 공주와 황태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두변은 여완완에게 도움을 줄 대종사 두 명을 붙여주었다.

이번 경성 작전의 지휘자는 여완완이었다.

원래는 이번 작전에서 영설 공주와 황태후를 전부 구할 수 있었지만, 여완완은 황태후가 장례식에서 부활극을 벌이며 황제의 실체를 폭로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황제에게 더 큰 타격을 줄 거라고 예상했다.

만약 이대로 황태후를 구해서 두변이 있는 서남으로 데려오면, 황태후라도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할 수가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영덕제가 모친과 누이를 시해했다는 죄를 알릴 방법도 없고, 이야기의 신빙성이 확보되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도 힘들 것이다.

두변이 제국 전체의 대신들을 죄다 서남으로 데려올 수는 없지 않겠냔 말이다.

이 세상에 TV나 인터넷 같은 게 없으니 황태후가 공개 연설을 할 방법도 없었다.

그녀가 나중에 영덕제의 실체를 밝힌다고 해도, 전부 두변이 시킨 것처럼 보일 것이다. 황태후가 서남에서 지의를 내린다고 해도, 그것 또한 두변의 흉계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황태후가 자신의 장례식에서 제국의 대신들, 공훈 귀족들, 백성들 앞에서 영덕제의 죄를 밝힌다면, 그 살상력은 황제를 폐위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리고 황태후가 영덕제를 폐위하라는 지의를 내리면, 두변이 새로운 군주를 세울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생기는 셈이다. 그래야만 두변이 새로 제위에 올리는 사람이 바로 대녕 제국의 정통이 될 테니까.

물론 그렇게 되는 순간, 황태후가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황제의 악행과 출생의 비밀을 세상에 공개하는 건, 자신의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세상에 밝히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비록 황태후는 영도현의 사악한 약에 취해서 능욕을 당한 것이지만, 스스로가 태자비로서 정절을 지키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영덕제의 출생을 비밀로 했고, 영덕제가 두변을 해치는 것도 좌시했으며, 영덕제가 방계와 결탁하는 것도 무시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황태후도 대죄를 저지른 공범인 셈이니, 그렇게 그녀를 죽음으로 몬 것이다.

이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여완완은 영설 공주를 관에서 꺼낸 뒤, 누군가를 영설 공주와 바꿔치기해야만 했다.

그녀는 영설 공주와 얼굴 윤곽이 비슷하고 몸매가 비슷한 여인을 찾아내서, 하관식 전날 밤에 영설 공주와 바꿔치기했다.

비밀스러운 대종사가 영덕제 곁으로 다가가서 목소리를 낮췄다.

“영설 공주의 시신이 아닙니다. 영설 공주는 사라졌습니다.”

영덕제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모후께서 죽지 않았으니, 영설도 당연히 죽지 않았겠지. 이게 다 두변 그놈의 음모다. 확실해.’

영덕제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두변을 완벽하게 이겼어야 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가장 잘하는 정치 싸움이니까.

그의 계획대로라면, 두변은 이번 싸움에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신세를 망치고,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신세를 망친 건 자신이고 이 국면을 만회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정치 싸움에서 두변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이때, 내각 수보 고순창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 퇴위하십시오.”

예부시랑도 외쳤다.

“폐하, 퇴위하십시오.”

바닥에 무릎을 꿇었던 대신들도 황제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태후의 지의를 따르겠다는 의지가 명확했다.

이들은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킬 작정이었다.

영덕제가 고개를 젖혀 크게 웃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고순창, 지금 반역을 일으키려는 건가. 저 여인은 짐의 모후가 아니라 두변이 보낸 요녀에 불과하다. 자넨 짐보다 저 요녀를 믿겠다는 건가?”

고순창, 오삼석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폐하, 퇴위하십시오.”

“고순창, 오삼석, 너희들이 두변과 일찍부터 작당모의했었군. 너희들은 전부 다 난신적자다!”

황제가 호통치더니, 손짓하면서 명령했다.

“여봐라. 저 난신적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려라.”

수천 명 무사가 앞으로 나서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은 대신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일순간, 수백 명 대신들의 목이 잘렸다.

영덕제는 피가 흥건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적색맹인지라, 흥건한 붉은색이 전부 초록색으로 보였다. 어디서도 이런 잔인한 광경을 본 적 없던 영덕제라서 초록색 피가 흥건한 장면이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영덕제가 남은 대신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조금 전에 나타났던 여인은 황태후가 아니라 두변이 보낸 요녀다. 짐의 말이 맞는가?”

남은 대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벌벌 떨었다.

그때 두회가 무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척, 척, 척, 척.

무장한 정예 무사 2만 명이 황릉 전체를 빈틈없이 포위했다. 그리고 동방 연합 왕국의 절대 고수들과 북명검파의 절대 고수들이 번개처럼 인파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누군가를 하나하나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두변 휘하의 고수들이 인파 속에 잠입하지 않았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십여 명 대종사급 강자가 인파 속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황제가 장례식에 참가한 수천 명 사람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조금 전의 그 여인은 황태후가 아니라, 두변이 보낸 요녀다. 짐의 말이 맞느냐?”

“파렴치한 놈!”

“황제를 폐위하라!”

“황제를 폐위하라!”

이 말들을 외치는 사람은 대신들이 아니라, 태후의 하관식에 참석한 백성들이었다.

원래 백성들에게 친근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수천 명의 백성을 부른 셈이지만, 이제는 자기가 제 무덤을 판 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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